第七章 공조(共助)(3)
스릉!
검은색 검을 뽑았다.
이 검은 자신의 검이 아니다. 참회동에서 빼앗은 검이다. 동굴을 벗어나면 천살단 무인가 격렬하게 싸울 줄 알고 빼앗은 것인데, 뜻밖에도 아무 충돌 없이 빠져나왔다.
검을 괜히 빼앗았다. 무인에게 검은 생명인데.
호발귀가 검을 뽑은 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등여산이 다가오며 말했다.
“좋은 검이지? 묵사검이라고 해.”
“묵사검.”
“묵철로 만든 검이라서 묵검. 그런데 이 검으로 사람을 베면 피가 묻지 않아. 그래서 비킬 사를 가운데 넣었어. 피가 안 묻는 검은 검이라는 뜻이야.”
“이 검을 잘 아는군.”
“내가 찾은 검이야.”
호발귀는 뜻밖인 듯 등여산을 쳐다봤다.
* * *
천살단에는 철장(鐵場)이 있다.
정식 명칭은 철당(鐵堂)이다. 한데 당주가 대장간에 당(堂)이 가당키나 하냐면서 철당은 철장, 당주는 야장(冶匠:대장장이)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요구는 불허됐다.
철장, 야장으로 부르면 하급 무인들까지 가볍게 보기 때문에 철당, 당주가 바르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지금도 당주는 자신을 야장이라고 말한다.
등여산은 철장에 자주 갔다.
천살단 철장에는 이름만 야장이 많다. 중원에서 쇠를 잘 다룬다는 사람은 모조리 데려왔다.
천살단 병기는 가볍고, 강해야 한다.
등여산은 설화팔극검을 효과적으로 펼칠 수 있는 연검이 필요했다. 그래서 연검 제작을 부탁했다. 매일 철장에 방문해서 쇠를 선택하는 것부터 빠짐없이 지켜봤다.
그러다가 녹슨 검을 발견했다.
녹이 잔뜩 슬어서 검으로써 생명은 끝난 상태다.
쇳물로 녹이기 위해서 수북이 쌓아놓은 녹슨 병기 중 하나였는데, 용케 눈에 들어왔다.
“저 검은 뭐예요?”
“버리는 겁니다. 쓰지 못합니다.”
“제가 꺼내 봐도 돼요?”
“제가 꺼내드리죠. 손에 쇠 냄새 배면 오래 갑니다.”
야장이 녹슨 검을 꺼내주었다.
등여산은 녹슨 검에서 생명을 읽었다.
다른 검들은 부서지고 갈라졌는데, 그녀가 꺼낸 검만은 형태가 온전했다.
“이거 녹 좀 벗길 수 있을까요?”
“하하! 못쓴다니까요. 이렇게 녹이 많이 나면 재질이 물러져서 약간만 충격을 받아도 부러지죠.”
“녹 좀 벗겨주세요.”
“내일 오세요. 벗겨놓겠습니다.”
그날 밤, 철장 당주가 직접 찾아왔다.
당주는 나무상자를 들고 왔는데, 안에는 손잡이 없는 검이 시커먼 빛을 토하며 누워있었다.
묵사검이다.
“녹을 벗겨내자 이게 나왔습니다. 녹 밑에 쇠가 또 한 겹 있었어요. 이놈도 녹에 닿았는데, 전혀 녹나지 않았습니다. 갈아서 시험해 봤는데, 명검입니다.”
등여산은 묵사검을 휘둘러봤다.
묵사검으로 설화팔극검도 펼쳐봤다. 손에 딱 맞는다. 검이 가볍고,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좋은 검이네요.”
“그럼 연검 제작은 중지하겠습니다.”
“아뇨. 해주세요. 이건 줄 사람이 있어요. 이 검, 제 손에도 맞지만, 더 잘 맞는 사람이 있어요.”
야장이 방패막이와 손잡이를 만들었다. 검집도 만들었다.
색은 묵사검에 맞춰서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검집은 약물 처리한 가죽을 썼다.
등여산은 묵사검을 주치균에게 주었다.
“광류비검에 맞을 거야.”
“내가 검이 없을까 봐? 나 검 많아. 명검이라고 불리는 게 벌써 여섯 자루다. 내가 오히려 한 자루 주려고 했는데.”
주치균이 묵사검을 뽑았다.
스릉!
검신이 햇살에 반사된다.
순간, 등여산은 검신 구학봉이 전인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했다.
검을 든 주치균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늠름했고, 다부졌으며, 강했다.
‘네가 내 친구인 게 자랑스러워.’
나이를 초월해서, 성별을 넘어서 벗이 되어준 주치균이 마냥 자랑스럽다.
“마음에 들지?”
“아주 마음에 들어. 다른 검보다 훨씬 좋아. 그냥 보고 돌려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이거 내가 가진다. 대신 평생토록 네 인생 책임져줄게.”
“까분다!”
“하하하! 길을 막고 사람들에게 물어봐. 여자가 남자에게 명검을 줬다. 이게 무슨 뜻이냐? 장담하는데, 한결같이 정인(情人) 아니냐고 물어볼걸?”
“그럼 다시 내놔!”
“하하하! 이놈 자리는 여기야!”
주치균이 묵사검을 검대에 놓았다.
첫 번째 검을 일곱 번째로 옮기고, 그 자리에 묵사검을 꽂았다.
* * *
“내가 가질 검이 아니군.”
스릉!
호발귀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돌려줘야겠어. 여긴 천살단에서 관리하는 곳 같은데, 그냥 여기 놓고 가면 되나?”
호발귀가 묵사검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등여산이 묵사검을 손으로 쓱 쓸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소요귀명검법, 알지?”
“……”
“생각할 것 없어. 그것도 혈천방 무공이야. 엄밀히 말하면 혈마 무공. 보고 싶어. 혈천방 검법이 아니라 혈마 검법은 어떤지. 수련하는 셈 치고 보여줘.”
등여산이 묵사검을 호발귀에게 던졌다.
호발귀는 묵사검이 손에 착 감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치균의 검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자신을 위해서 존재했던 검처럼 느꼈다.
스으읏!
묵사검으로 소요귀명검법을 펼친다.
역천금령공은 사용하지 않는다. 잔잔하게 흐르는 진기, 이령귀화만 사용한다.
소요귀명검법은 수줍은 검이다.
검법을 펼치다가 불쑥불쑥 독니를 드러내는데, 이곳에서 살겁이 일어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부분, 피할 수 없는 절기, 필살초가 터진다.
호발귀는 독니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면 귀명검법이 청명검법으로 변한다. 소요문 도인들이 펼치는 잔잔한 검법이 된다.
묵사검은 검이 지닌 예기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검이 부드러운 갈대처럼 휘날린다. 강풍이 아니라 미풍이 살갗을 스친다.
스읏! 스스스슷!
이령귀화는 완벽한 음과 양의 조화다. 그래서 아름답다. 잔잔하면서도 율동적이고,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단호하게 끊고 맺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냥 음이지도 않고, 마냥 양이지도 않다.
부드러움과 강함이 조화를 이룬다.
“아!”
등여산은 탄성을 흘렸다.
아름다운 검, 황홀한 검을 많이 봤다. 강렬한 검도 봤고, 살기 가득한 검도 봤다.
호발귀의 검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검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 너무 유약해서 강한 검을 받아내지 못한다. 부딪치는 즉시 깨진다. 어린아이가 휘둘러도 이보다는 강렬할 것 같지 않은가.
‘아닌가? 이 강함은 뭐지? 아냐. 잘못 봤어. 부드러워.’
아름답다!
부드러운가 하면 강하고, 강한가 하면 부드럽다. 강약 조절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절정 검이다. 하지만 여전히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 굉장히 뛰어난 검무(劍舞) 같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게 바로 실전용이라는 것이다.
[이백 년 전, 수많은 무인에게 펼쳐졌던 검법이다. 검의 흐름마다 피가 맺혔다.
아름다운 검날 뒤에는 언제나 붉은 피와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이게 혈마 무공……’
호발귀가 펼치는 검공이 혈마 무공일 리 없다. 잔인하고, 악랄하며,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빼앗았던 살인귀의 검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스읏!
검무를 마쳤다.
역천금령공으로 펼친 귀명검법과 이령귀화로 펼친 검법은 완전히 다르다. 거센 풍랑이 잔잔한 울림으로 바뀌었고, 귀곡성이 조화를 이룬 음률로 바뀌었다.
“훗!”
그는 피식 웃었다.
이건 사기다.
다른 사람의 눈을 현혹하기 딱 좋은 검법이다.
원래는 악귀의 탈을 뒤집어쓴 검법인데, 아주 선한 얼굴로 방긋 웃고 있다.
왜 이령귀화로 귀명검법을 펼쳤을까?
이령귀화는 오로지 생기 보존에만 쓰인다. 밖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묵사검을 잡는 순간, 퍼뜩 이령귀화가 떠올랐다.
묵사검, 확실히 자신에게 맞는 검이 아니다.
날카로움만 보면 악기(惡器)이지만, 피를 탐하지 않는다.
묵사검, 피가 묻지 않는 검? 아니다. 묵사검이라는 검명은 제대로 잘 지었다. 다만, 검 자체가 피를 원하지 않는다.
철컥!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탁자에 올려놓았다. 주인이 찾아갈 수 있게.
등여산이 말했다.
“여긴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야. 여기다 그런 검을 놓으면 당장 주워갈걸?”
“연락을 취하면 되지.”
“본단과 연락 취해도 돼?”
“나를 귀무살에게 안내만 해주면 돼.”
“안내해 주고 있어.”
“그러면 난 마참지 시술을 잊는 거고.”
“굳이 안 잊어도 돼. 천살단은 혈마를 상대할 수 있어. 마참지 시술은 혈마록을 손댄 대가지. 어려움을 자초한 거야. 남 탓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피곤하게 다투지 말자. 우리 약속을 말하는 것이니까. 약속을 지키는 동안, 속이지 말고. 신경 쓰는 거 피곤하잖아. 천살단과 연락, 마음대로 해. 어차피 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 할 것 없어.”
“알았어. 먼저 제안한 거니까, 받아들이지 뭐.”
호발귀는 검을 놓고 일어섰다.
등여산이 말했다.
“그 검은 나중에 직접 돌려줘. 보통 검이 아니고, 뺏은 사람이 돌려주는 게 예의일 것 같은데? 뺏긴 사람도 그냥 돌려받기보다는 스스로 다시 뺏길 바랄 거고.”
호발귀는 두말하지 않고 검을 집어서 허리에 찼다.
일반인이 입는 면복에 보검, 어울리지 않는다.
* * *
등여산은 강하로 간다.
강하에는 혈천방이 없다. 이미 근거지를 옮겼다. 독림은 독림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래도 등여산은 강하로 갈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천살단도 혈천방의 움직임을 놓쳤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서 사람을 보냈다.
일단 강하에서부터 독림까지, 독림 너머까지도 뒤져보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됐을까? 보낸 무인들 모두 행방불명이다.
독림까지는 흔적을 남기는데, 그 이후부터는 모든 단서가 끊긴다. 완벽하게 세상에서 사라진다.
어차피 혈천방을 찾으려면 강하로 가는 수밖에 없다.
“필양(馝陽).”
주치균이 낮게 중얼거렸다.
등여산이 은막에 서신을 남겼다.
밀마(密碼)를 은밀히 남긴 것이 아니다. 탁자 위에 서신을 남겼다. 버젓이 다음 행로를 적은 것이다.
이게 어떤 경우지?
주치균은 현재 등여산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호발귀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당장 달려 나갔을 것이고.
두 사람은 은막을 벗어난 후에는 사람 눈을 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간다.
가장 가까운 도읍이 필양이다.
그곳에서 강하까지 가는데 필요한 물건을 준비할 것이다.
“너희는 강하로 가 있어.”
검벽 무인들에게 지시했다.
“강하로 가서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귀무살이 있는지 파악해. 있어도 건드리지는 말고,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놈들처럼 행세해.”
“저희 염려는 마시고. 저희가 먼저 가도 괜찮겠습니까?”
“별일 없어. 그냥 뒤따르기만 하는 일이니. 절대 독림을 수색하지는 마라. 이건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검벽 무인 열 명이 일제히 포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