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공조(共助)(2)
등여산은 호발귀를 천살단 은막(隱幕)으로 데려갔다.
평소, 은막은 텅 비어있다.
관리는 주기적으로 한다. 청소도 하고, 부엌에 먹을거리도 갖다 놓는다.
은막은 천살단에서 외부로 나가는 사람들, 혹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되고, 본단 지시를 기다리는 장소로도 이용된다.
보통 은막은 천살단 본단에서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다.
“오늘은 여기서 잘 거야. 방에 옷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갈아입어. 좀 씻고. 서로 말 놓기로 했으니까 나도 반말. 불쾌해도 할 수 없어. 그쪽이 한 말이니까.”
등여산은 호발귀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호발귀라는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허물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저녁은 뭐로 할래? 석빙고(石氷庫)에 가면 고기가 있을 텐데, 고기 좀 구워줘?”
“고기?”
“무슨 고기 좋아해?”
“후후! 고기…… 그러고 보니 고기 한 번 제대로 못 먹였네. 그 노인네, 고기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후후!”
호발귀가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은막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호발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호발귀도 등여산을 신경 쓰지 않았다.
등여산은 이대로 도주할 수 있다.
그녀는 인질이나 마찬가지다. 그녀 스스로 귀무살에게 안내한다고 했지만, 그 전에 호발귀가 죽일 마음으로 검을 쳐들었었다. 그러니 엄연히 인질이다.
그녀는 천살단 무인에게 연락해서 호발귀를 공격할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언제든 틈만 생기면 도주할 것이고,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런데도 호발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촤아악! 촤악!
몸에 물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발귀는 등여산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 사람 뭐지?’
등여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호발귀가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마두라면 신경 쓸 것이 없다. 사람 감정을 이용한다는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모든 행동이 마두를 제압하는 업무에 불과할 뿐이니까.
등여산은 호발귀에게서 마두다운 모습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사람 꼴이 아니군.’
사 년 동안 머리가 치렁치렁 자랐다. 석굴 속에 있으면서 다듬지 않아 서로 엉키기까지 했다.
엉킨 부분이 떡까지 져서 찰싹 달라붙었다.
호발귀는 칼로 머리를 잘랐다.
다소 짧게 자른 면이 있지만, 건(巾)을 두르면 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수염도 깎았다.
머리와 수염을 깎았는데도 아직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씻어야 한다.
욕탕에 뜨거운 물을 퍼담고, 몸을 푹 담갔다.
사 년 묶은 때가 뜨거운 물과 함께 녹아들었다.
‘좋군.’
호발귀는 눈을 감고 뜨거운 물을 즐겼다.
강하에 있을 때도 씻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얼굴이야 매일 씻었지만, 몸은 일 년에 한두 번 씻는 것으로 족했다. 굳이 몸에 신경 쓸 일도 없었다.
지금은 너무 더러워서 씻는다.
“기어이 안 죽였네?”
“여자와 어린아이는 못 죽여.”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문규가 그래.”
“큭큭! 네가 무슨 문(門)이 있다고. 투심문? 그것도 문파라고 문규 따지는 거야? 그런데 왜 여자와 어린아이야? 힘없는 자라면 노인도 포함해야지?”
“아무리 배수라도 코 묻은 돈까지 뺏는 건 그렇지. 그래서 어린아이 제외. 아무리 배수라도 여자 속곳에 손을 찔러넣은 것은 그렇지. 그래서 여자 제외.”
“후후! 그건 투심문 때 이야기고. 지금은 무림이잖아. 여자도 칼을 쓴다고.”
“어쨌든 제외야.”
장진 스님이 탕에 있는 물을 떠서 머리 위로 끼얹었다.
“아휴! 이거 땟국물이…… 이 물, 맞 좀 봐라. 무척 짤 것 같지 않아?”
“이거 맛을 왜 봐? 변태가 따로 없다니까.”
호발귀는 장진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언제든 대화만 나누면 걱정 근심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장진 스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땡중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선승이었다.
방에는 옷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었다.
사내 옷부터 여자 옷까지, 비단으로 만든 옷부터 삼베로 만든 옷까지, 무복(武服)에서부터 농민들이 입는 옷까지 다양한 옷들이 벽면 가득히 걸려 있었다.
호발귀는 갈색 면복을 골라서 입었다.
무복은 어쩐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다.
역시 늘 입던 면복이 가장 편하다.
“어!”
등여산이 놀란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몸을 씻고, 머리를 다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훤칠한 사내 모습이 드러났다.
“와! 잘 생겼는데?”
그녀가 마음을 숨기지 않고 감탄했다.
“이름이나 알지? 난 호발귀.”
호발귀가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탁자에는 채소 무친 것 두 가지와 밥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밥을 같이 먹자는 뜻이다.
“그쪽 이름은 알아. 내 이름은 등여산.”
“등여산!”
호발귀가 놀란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날 알아?”
“천살단…… 책사?”
“어멋! 날 아는 사람도 있네?”
그녀가 놀란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순간, 호발귀는 사부를 떠올렸다.
‘이놈의 영감!’
등여산의 표정으로 미루어보면 강호 무인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천살단 책사인데도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건 짐작인데, 어쩌면 천살단에 책사가 있다는 사실도 비밀인지 모른다.
그런데 사부는 단번에 등여산 이름을 말했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석학 수석내각대학사 이평을 제치고 오직 등여산만이 혈마록을 해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날수수가 등여산을 어떻게 알았을까?
노야와 날수수는 강하 촌구석에 숨어있으면서도 눈과 귀는 세상을 향해 열어놓았다.
- 이놈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값나가는 것을 훔칠 수 있는 법이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정도가 아니다. 중원 무인이 모르는 등여산의 존재까지 파악할 정도라면 상당히 깊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노야와 날수수, 숨긴 게 정말 많다.
“혈마록은 풀었고?”
호발귀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하! 음! 하아! 그렇군. 이게 밥이었군. 밥맛이 원래 이랬어. 정말 맛있는데.”
호발귀는 등여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밥 한 수저에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차고 딱딱한 주먹밥과 나물 곁들이 따뜻한 밥이 같을 수 없다.
‘마성이…… 안 보여.’
등여산은 콧등을 찡그렸다.
몇 번을 고쳐봐도 호발귀는 마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하지만 참회동에서 그가 사용한 것은 분명히 혈천방 무공이었다. 그것도 마공의 정화였다.
“앞부분만 약간. 그런데 혈마록은 어떻게 푼 거야?”
등여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풀다니? 뭘?”
“혈마록. 혈마록 풀었잖아?”
“이게 무슨 오뉴월에 까마귀 얼어죽는 소리? 내가 혈마록을 어떻게 풀어? 한 글자도 모르겠는데.”
“……”
등여산은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정말로 혈마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이다.
“참회동에서 사용한 무공은 뭐야? 다른 건 잘못 봤다고 해도 귀화미요공만큼은 확실했잖아? 내가 직접 당했으니까. 두 호흡 정도 눈을 잃었거든.”
“귀화미요공을 알아?”
“……?”
등여산은 호발귀를 또 쳐다봤다.
이 남자 도대체 뭐야? 뭐 이런 말을 다하고 있어?
당금 무림에서 귀화미요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혈천방이 귀화미요공을 잃어버려서 사용하지 않고 있고, 사용한다고 해도 잡술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혈마가 사용했던 무공이기 때문에 명칭만은 알고 있다.
그런데 호발귀는 마치 자신만 아는 무공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나.
“귀화미요공은 혈천방 무공이야.”
“뭐라고?”
“몰랐다는 말처럼 들리네?”
“혈천방 무공? 그럼 귀무살 무공이란 말이야?”
“귀무살이 무엇을 수련했는지는 모르겠고, 귀화미요공이 혈천방 무공인 건 확실해.”
“으음!”
호발귀가 식욕을 잃은 듯 저금을 놓았다.
“그럼 이건 어때? 참회동에서 우룃소리를 들었어. 구뢰마권이지? 그것도 혈천방 무공.”
호발귀가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맞다. 호발귀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실해진다. 참회동에서 들은 우룃소리는 우연이 아니다. 구뢰마권이었다. 호발귀 자신도 우룃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등여산은 더 말했다.
“손이 움직일 때 붉은빛이 어른거리더라고? 혈천도법. 혈천방 무공. 비자에게 잡혀올 때 혈마록 일권을 써줬지? 그걸 해독해 보니까 마영심도가 나왔어. 마영심도 역시 혈천방 무공. 사용한 무공 모두 혈천방 무공이네?”
호발귀가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진정 혈천방 무공인지 몰랐다는 투다. 혈마록은 혈천방에서 훔쳐낸 것이다. 만약 혈마록을 해독해서 무공을 얻은 것이면 혈마 무공이라는 걸 모를 수 없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거야? 혈마록을 해독한 게 아니면 도대체 혈마 무공을 어떻게 배운 거야?’
분명한 것은 호발귀가 혈마 무공을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혈천방은 귀화미요공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호발귀는 사용한다. 검주도 당했고, 자신도 당했다. 천살단 상승고수가 일시 눈이 멀어서 마구잡이로 검초를 펼쳤다.
혈천방에서 혈마 무공을 이 정도로 수련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현재 혈천방은 혈마 무공에 연연하지 않는다. 혈마 무공을 계승하되, 다른 마공도 탐구한다.
귀무살이 혈마 무공을 수련했냐고 물었나?
일부분은 수련했지만…… 다른 마공이 주를 이룬다.
혈마가 활약하던 시기가 [이백 년 전이다. 그동안 무공도 많은 발전을 했다. 혈마 무공보다 더 강하고, 잔인한 무공이 수없이 탄생했다가 사라졌다.
혈천방이 혈마 무공을 거의 대부분 복원해 냈지만, 다른 마공이 많이 섞였다.
“석실에서 만난 사람도 없을 테고, 혈마 무공을 어떻게 배운 건데?”
등여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발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아예 듣고 있지 않은 듯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확인해 보면 되지!’
스읏!
그녀는 두 손에 진기를 운집했다.
태산금나를 펼친다!
호발귀의 옷소매를 잡아챌 것이다. 옷소매 다음은 손목, 손목 다음은 어깨로 단숨에 짚어 올라간다.
그녀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보여.”
“……?”
“손 움직이는 게 보여. 너무 느려.”
호발귀가 태연히 말했다.
“이걸 봤다고?”
등여산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손가락을 구부리자마자 금나술이 발각되었다. 손을 움직인 것도 아니다. 손가락만 움직였다.
‘진기! 진기를 본 거야!’
호발귀는 손가락에 운집된 진기를 느낀 것이다.
“똑바로 말해줘. 손가락을 본 게 아니라 손에 운집된 진기를 느낀 거지?”
그녀는 호발귀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기도 봤고, 손도 봤고. 엠병! 우리 투심문에는…… 그 손보다 두 배는 빠른 손이 있어.”
호발귀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어렸다.
이 순간, 등여산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짙은 그늘이 깔렸다.
‘혈기!’
퍼뜩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혈마 무공은 대수롭지 않다. 솔직히 마공만 놓고 보면 혈마 무공보다 잔인한 마공이 많다.
혈마가 무서운 것은 혈기 때문이다.
혈기로 펼친 무공은 무적이다. 어떤 자도 따라잡지 못한다. 빠름, 파괴력에서 모두 뒤진다.
‘혈기 맞아! 혈기 아니면 이런 식으로 남의 진기를 읽지 못해! 내 진기를 느꼈다는 건…… 이거 정말 혈마 무공이야! 부인 못 해. 혈마록을 수련했어. 완벽히. 아! 혈천방을 무너트릴 게 아니라 이 사람을 죽여야 해!’
등여산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