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공조(共助)(1)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가득했다.
사람은 앉아있지만, 말이 없다. 가끔 찻잔을 들어서 목을 축일 뿐, 깊은 침묵이 이어진다.
쿵! 쿵! 쿵!
멀리서 거침없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리낌이 전혀 없는 발걸음이다. 보폭도 넓고 딛는 힘도 거세다. 힘도 꽤 실려있다.
“살단 총주(總主)님 드셨습니다.”
문밖을 지키던 검벽 무인이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문은 검벽 무인이 열었다. 그러자 산적처럼 거친 사내가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살단 총주가 단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단주는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살단 총주는 의자로 걸어가서 철퍼덕 앉았다. 두 발을 편히 쭉 뻗고, 머리를 의자 뒤로 젖혔다.
그는 한동안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를 모로 돌려서 주치균을 쳐다봤다.
“당했다면서?”
역시 거침없는 말이다.
“네. 면목 없습니다.”
주치균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거…… 그거?”
살단 총주가 오른쪽 볼에 새겨진 흉터를 가리켰다.
주치균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오른쪽 눈 밑에서부터 입까지 살이 움푹 팼다.
잘 생겼던 미남이 한순간에 흉한 얼굴이 되었다.
왼쪽만 보면 여전히 미남인데, 오른쪽을 보면 눈길이 저절로 돌려진다. 하지만 주치균은 용모가 훼손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법에 당했습니다.”
“지법? 지법이면 손이 얼굴에 닿았다는 것인데, 검주에게는 백인백팔투가…… 그것도 안 먹혔나?”
“네. 통하지 않았습니다.”
주치균은 시종일관 냉정하게 말했다.
“백인백팔투가 안 통했다? 백인백팔투라면 나도 칼 몇 대는 맞아야 하는데, 오히려 얼굴을 그어놨다? 재미있는 놈이군. 단주님, 제가 맡겠습니다.”
살단 총주는 단주에게 말을 할 때도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하지만 말투는 상당히 정중했다.
“그자, 혈마록을 익혔다네요?”
천원주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말했다.
“혈마록? 혈마록을 수련했다는 놈이 한두 놈인가? 지금까지 내가 죽인 놈만 해도 열 놈이 넘어.”
“제 의견이 아니라…… 책사가 한 말이에요.”
“듣긴 들었어. 듣긴 들었는데, 정말이야?”
총주가 주치균을 쳐다보며 물었다.
“손가락을 튕겨서 귀화미요공을 펼쳤습니다. 곧바로 양광보조와 비어악기로 석실을 봉쇄했는데, 그 틈을 뚫고 다가와서 완맥을 타격했습니다.”
“참회동 그 좁은 데서?”
“네.”
“검주는 시력을 잃었고?”
“대략 숨 두세 번 들이쉴 시간 동안 장님이었죠.”
“음! 그럼 혈마록이 맞네. 흐흐! 하하! 흐하하! 단주님, 이건 제가 맡아야겠습니다.”
살단 총주가 눈빛을 빛냈다.
단주 집무실에 모인 사람은 네 명이다. 단주와 천원주, 살단 총주, 그리고 검벽 검주다.
그들은 검벽 검주와 호발귀가 싸운 부분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호발귀는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 강침을 어떻게 뽑았고, 봉혈폐맥은 어떻게 풀었고, 혈마록 고어는 어떻게 해독했으며, 참회동 좁은 석실에서 무공 수련을 어떻게 했는지.
이 많은 의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꺼내지 않는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답을 말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천원 휘하 각 전, 각 당에서 연구에 돌입했다.
그들이 해법을 찾아내서 보고할 것이다.
“지금 책사가 호발귀와 함께 있어. 혈천방으로 가는 중인데…… 괜찮은 방법이지 않나?”
단주가 말했다.
살단 총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천원주는 차만 마셨고, 주치균은 무표정하게 듣기만 했다.
“책사 말대로 하지. 검주, 책사를 따라붙어. 총주, 검주를 따르고. 책사가 신호를 보내면 혈천방을 치도록 하지. 뿌리는 못 뽑아도 타격을 줄 수 있잖아.”
살단 총주가 즉시 말했다.
“호발귀라는 놈이 혈천방을 뒤흔들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보지도 않은 자를 어떻게 믿어? 난 책사를 믿어. 책사가 나섰다면 이미 혈천방은 흔들린 거야.”
단주가 말했다.
“호발귀와 정식으로 싸우면 어떻겠냐?”
“집니다.”
“영 안 될까?”
“책사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어린 혈마라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겠죠.”
“하하! 하하하! 그렇군. 하지만 그건 안 돼.”
“……?”
“그건 허락 못 해.”
단주가 연속해서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죄송하지만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치균이 침착하게 말했다.
비사칠초 중 최후의 절초는 사즉사(死卽死)다.
사사(死死), 사사초(死死招), 사사비초(死死秘招) 등으로 부른다. 삶이 없는 초식, 오직 죽음만 있는 초식, 피아(彼我)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초식이다.
주치균은 비사칠초를 생각하고 있다.
호발귀와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같이 죽을 수는 있다.
“호랑이하고 사람하고 우리에 넣어두면 어떻게 될까?”
“……”
주치균이 단주를 쳐다봤다.
“백 번을 해봐도 백 번 다 사람이 먹힐 거야. 간혹 호랑이를 찢어 죽였다는 장사도 있긴 하지만…… 사람이 죽는다고 봐야지? 한 끼 식사 거리가 되는 거지.”
“그럴 겁니다.”
“그러면 호랑이와 사람을 산에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도 백 중 백 사람이 당할까?”
“……”
“힘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꼭 지지는 않는다는 거지. 힘이 없으면 활을 쓰면 되고, 창을 써도 되고, 올가미를 만들어도 되고. 여전히 호랑이가 우세하겠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어.”
“네.”
“비사칠초는 구학봉에게 검신이라는 칭호를 안겨준 무적 검초야. 결코, 혈마 무공 아래가 아니지. 사사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폐관 수련을 권하고 싶네만.”
“생각해 봤습니다만, 십 년은 족히 걸립니다.”
“안 하겠다는 거군.”
“죄송합니다.”
“책사가 염려되어서?”
“제가 지켜봐야 안심이 됩니다.”
“네 목숨으로 지켜주는 것은 책사도 원하지 않을 텐데? 서로 상처만 남아.”
“……”
“쯧! 고집하고는. 가라. 검벽에서 열 명을 데려가.”
“아닙니다. 검벽은 단주님을 호위하는……”
“너희 아니라도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 데려가. 부려먹을 일이 많을 거야.”
“네.”
주치균은 더 사양하지 않았다.
* * *
“후우!”
호발귀는 맑은 공기가 좋아서 연신 깊은숨을 들이켰다.
몇십 년 후에나 세상 공기를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빨리 나왔다.
솔직히 어제저녁만 해도 오늘 석실 밖에서 움직이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점심을 먹을 때, 오늘 저녁에는 무정삼절과 귀명검법을 섞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들이닥쳤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탈출을 한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사 년 만이네.’
그래, 벌써 사 년이 흘렀어. 석실에서 겨울을 네 번 보냈으니까 사 년이 지난 거야.
문득, 사부가 생각났다.
혈천방에 끌려갔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계실까? 아마 죽었을 것이다.
노야, 사부, 왕소, 동패, 모두 잊고 있었다.
아니,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러면 머리를 흔들어서 지워버렸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석실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복수할 힘도 없으면서 복수만 빨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잊고 살았다.
아직도 복수하기에는 먼 것 같다.
겨우 천살단 하급 무인과 힘겹게 싸웠다. 자칫했으면 오히려 자신이 당할 뻔했다. 말단 무인이 이 정도면 진짜 고수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겠나.
호발귀는 주치균과 등여산이 어느 정도 고수인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을 형당주에게 가르침 받는 제자 정도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젊다. 기껏해야 자신 또래밖에 되지 않았다. 젊은 자가 높은 위치에 있을 리는 없다. 또 참회동으로 찾아와서 살인 명령을 집행하는 것만 봐도 하급 무인이지 않겠나.
하지만 단순한 일반 무인이라기에는 무공이 강하다. 천살단 모든 무인이 이 정도로 강할 리는 없다. 그러면…… 자신을 고문했던 형당주의 직제자 정도 되지 않을까?
호발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혈천방에 가는 동안 무공 수련을 계속해야 해. 지금은 어림도 없어.’
등여산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을 이용해서 참회동을 내려왔다.
사실, 천살단 주변 이십 리는 경비망이 물샐 틈 없이 깔려있다. 아무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이라고 해도 지켜보는 눈이 반드시 있다.
그들이 보고도 나서지 않을 뿐이다.
경비는 천원 내위당(內位堂) 무인들이 맡고 있는데, 조용히 보기만 할 뿐 앞을 막지 않는다.
등여산은 서둘러서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호발귀와 대화를 이어갔다.
“배수였다면서요?”
“배수는 무슨. 요즘은 촌 동네 소매치기도 배수라고 거창하게 말해주나?”
“보고 싶네요. 어땠는지. 솜씨 좀 보여줘요.”
“엠병!”
“네?”
“서로 목에 칼 대고 있으면서 뭐 하자는 거야? 그냥 귀무살에게 안내나 해.”
호발귀가 사납게 말했다.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다. 하기는 이제 막 참회동에서 벗어났으니 세상 모든 사람이 경계 대상일 터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가슴이 텅 비어있다는 말이 된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다가서는 사람이 벗이 된다. 본인은 경계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그녀는 벗이 될 생각이다. 그래야 혈마록에 대해서 알게 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했다. 혈마록에 대해서 알아야 혈마를 잡는다.
혈천방은 호발귀가 잡을 것이다. 그러면 호발귀는 누가 잡나? 혈천방과 같이 공멸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살아남는다면 천살단 몫이 된다.
‘사람 감정을 이용하는 건 잘못이지만, 모두를 위해서 어쩔 수 없어. 당장 검주만 해도 그래. 혈마록이 나타나자마자 얼굴이 상했어. 이게 마공이야.’
그녀는 마인을 벗으로 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스님, 배 안 고파요?”
등여산이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히 툭 던졌다.
아직 식사 때가 되려면 한 시진 정도 남았다. 하지만 어차피 밥 먹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호발귀가 대화를 거부하니 스님과 대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답변이 들려왔다.
“너 어디 아파?”
“네?”
“여기 스님이 어디 있어? 아무도 없는데 방금 누구에게 말한 거야?”
“네?”
등여산은 멍한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지금 호발귀 눈에는 장진 스님이 안 보인다. 그렇다면 장진 스님이라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다. 그가 장진 스님을 볼 때는 실제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아! 내가 왜 이러지? 난 아직도 따라오고 계시는 줄 알았네. 어디 가셨어요?”
“미향암.”
‘미향암?’
“이제는 안 따라오세요?”
“오고 싶으면 오겠지. 올 거야. 혼자 있는 걸 싫어하니까. 부처되기는 틀린 중이야.”
호발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말했다.
지금 봐서는 호발귀가 미쳤다고 말할 수 없다. 아주 멀쩡하다.
“그런데 왜 제게 말 놔요?”
“너도 놔. 서로 믿는 사이도 아닌데, 편하게 지내자고.”
호발귀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이 사람 어디를 보고 미쳤다고 하는가? 형당 관찰이 너무 소홀했다. 호발귀가 장진 스님을 보는 건 맞지만, 훨씬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