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출동(出洞)(4)
“내가 왜 죽어야 하지?”
호발귀가 물었다.
“몰라. 죽인다잖아. 눈 아픈 건 어때?”
장진 스님이 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횃불을 보자 눈이 시려왔다. 눈을 뜨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
호발귀는 급히 눈을 감았지만, 아픔은 여전했다.
눈물이 흘렀다.
“혈마록, 천살단 것도 아니잖아. 혈천방은 자기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찾는다 치고, 천살단은 자기 물건도 아니면서 왜 주인 행세야? 날 핍박하는 이유가 뭐냐고?”
“이놈한테 직접 물어. 왜 나한테 그래?”
“어이! 날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호발귀가 검든 사내, 주치균에게 물었다.
호발귀가 뭐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음성이 갓난아기가 옹알거리는 것처럼 아주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미쳤다고 하잖아.”
“장진 스님이라는 사람하고 말한다더니 정말이군. 빨리 죽이는 게 낫겠어.”
“그래.”
등여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혹시나 하고 따라왔는데, 특별한 일이 없다. 미친 자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스읏!
주치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찔렀다.
검은 목과 어깨를 잇는 부분, 쇄골을 노렸다. 깊이 푹 찔러넣어서 단번에 죽일 생각이다. 그런데,
터엉!
묵사검이 퉁겨졌다.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막대기로 힘껏 쳐낸 듯 검이 거칠게 밀려났다.
“웃!”
주치균은 깜짝 놀라서 급히 검을 회수했다.
호발귀가 손을 쓴 것 같지는 않다. 호발귀는 여전히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그럼 누가? 석실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나?
스윽!
호발귀가 일어섰다.
두 손을 밑으로 축 늘어트리고, 머리도 들지 않아서 귀신이 일어서는 형상이었다.
“뭐야?”
주치균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단전과 어깨에 강침을 박혔다. 그래서 움직임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지금 호발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있다. 강침은 보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기까지 활용하는 것 같다.
그러면 봉혈폐맥도 풀렸다는 소리?
“이건 또 뭔 조화지?”
주치균이 호발귀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참회동에 들락거린 사람은 밥 주는 무인뿐이다. 그러면 혼자서 강침을 뽑았다는 것인데, 말이 되나? 봉혈폐맥은? 봉혈은 어찌어찌 풀었다고 치고, 폐맥은 무슨 수로 고치나?
“뭐지?”
그가 재빨리 등여산에게 물었다.
“몰라. 기문(奇聞)이야.”
등여산이 짧게 말했다.
상황이 급박해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일부러 짧게 말했다.
그녀 역시 호발귀 같은 경우는 처음 봤다.
“넌 실전 경험이 없잖아. 선제공격해. 눕힌다는 생각은 버리고, 물러서게 한다는 심정으로 싸워. 알지? 틈만 보였다 싶으면 재빨리 튀는 거야!”
“이 자, 굉장한 고수야. 튀지 못해.”
“그래? 내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네 눈에는 달리 보이나 봐? 어쨌든 싸움을 길게 끌면 불리해. 여긴 천살단 본진이야. 일단 빠져나간 후에……”
“기습은 어떻게 하지?”
“그런 것까지 내게 물으면 어떻게 해. 네가 알아서 해.”
“안 도와줄 거야?”
“중한테 주먹질하란 말은 아니지?”
“이럴 때만 중이지?”
호발귀는 구뢰마권을 떠올렸다.
사내를 눕힐 생각이라면 팔십일수를 사용한다. 은밀히 다가가서 요혈을 찍는다.
물러서게 할 요량이면 구뢰마권이 낫다. 우뢰소리만 듣고도 물러설 수 있다.
‘첫 싸움! 해보자!’
호발귀를 이를 꽉 깨물었다.
탁!
호발귀가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소리만 난 게 아니다. 불꽃이 터지는 듯 했다. 순식간에 거무스름한 연기가 피어나더니 횃불을 확 감쌌다.
일순, 주위가 새카매졌다.
“귀화미요공! 이놈!”
사내가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검은 말보다 더 빨랐다. 소리가 터진 순간, 석실에 검영(劍影)이 가득 들어찼다.
양광보조(陽光普照)!
햇살이 세상을 두루 비추는 것처럼, 검영이 온 세상에 가득 들어찼다.
세 평 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호발귀가 피할 곳은 없다.
천살단은 혈천방 무공을 집중 연구했다.
현재, 혈천방 무인들이 구사하는 무공뿐만 아니라 혈천방 무공을 십이성 수련했을 때 나타날 결과까지 연구하는 중이다. 당연히 대응 방법도 고심하고 있고.
주치균이 쳐낸 검공은 귀화미요공에 대한 대응 초식이다.
혈천방 무인들은 귀화미요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한다고 해도 겨우 시정잡배들이 구사하는 잡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귀화미요공을 잃어버렸다는 편이 맞다.
한순간, 눈앞에서 검은 연기가 풀썩였다. 주치균은 본능적으로 수백 번도 더 연습해서 몸에 붙어버린 대응 초식을 펼쳐냈다. 반사적인 반격이다.
바박! 바바박! 바박!
검이 석실을 긁었다.
돌로 만든 석실이 검에 긁히면서 돌가루를 피워냈다.
하지만 파육음이 들리지 않았다. 살이 베어지는 소리,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검에 찰싹 감기는 살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치균은 즉시 검초를 다시 뻗어냈다. 비어약기(飛魚躍起)!
파르르릉! 파파팟!
물고기가 바다 위로 튀어 오르듯이 석실 바닥을 쓸어간 검이 천정을 향해 솟구쳤다. 순간,
“웃!”
주치균이 짤막한 경악성을 흘렸다.
날카로운 송곳이 손목을 툭! 찔렀다.
주치균은 검을 놓쳐버렸다. 완맥에 강한 충격을 받자, 손아귀에서 힘이 쫙 풀렸다.
쒜엑!
그가 놓친 검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허공에서 꿈틀거리더니, 오히려 그를 향해 쳐왔다.
“혈천도!”
석실 뒤에 물러서 있던 등여산이 빽 소리 질렀다.
그제야 주치균은 위급함을 느끼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석실 입구까지 쭉 밀려났다.
“으음!”
주치균이 다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 시력을 잃었다. 호발귀를 놓친 상태에서 검을 두 번이나 쳐냈다. 그래서 석실 안을 모두 공격할 수 있는 양광보조와 비어약기를 펼친 것이다.
호발귀가 전개한 귀화미요공은 진짜다.
“나와!”
등여산이 주치균의 허리띠를 와락 잡아당겼다.
주치균이 석실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서 문을 닫을 수 없다. 한 발짜국만 물러서면 닫을 수 있는데. 일단 석실 문을 닫고 난 다음에 차분히 생각해봐야 한다.
등여산의 순간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주치균 생각은 달랐다.
쉬잇!
그는 오히려 호발귀를 향해 지쳐갔다. 손에는 어느 새 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석실이 좁다. 놈이 그가 놓친 묵사검을 들고 있지만, 좁은 석실에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근접전을 벌일 것이고, 박투술(搏鬪術)을 사용한다.
쉬잇! 쉿! 쉿! 쉬이잇!
단검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몰아쳤다.
광류비검술에는 백인백팔투(白刃百八鬪)라는 박투술이 있다.
몸이 바싹 붙은 상태에서 단검, 단도로 펼칠 수 있는 근접 전투 기술이다.
단검이 호발귀 몸을 찢는다. 찌른다. 스쳐간다.
놀라운 점은 호발귀가 백인백팔투를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다. 단검을 용케 피한다. 얼핏 보면 쩔쩔 매는 듯 한데, 결코 결정적인 기회는 주지 않는다.
“뭐하고 있냐?”
“싸우는 거 안 보여?”
“시간 끌면 손해야. 지금 네가 여유 부릴 때가 아냐.”
“여유 부리는 게 아니라 쩔쩔 매는 거 안 보이냐고!”
“그놈은 괜찮아. 그놈은 가진 게 무공 밖에 없어. 저 여자, 저 여자는 꼭 죽여.”
“여자를 어떻게 죽여! 못 죽여.”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눈을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파라라라락!
호발귀의 손속이 급변했다.
주치균의 완맥을 강타하고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실제로 공격도 해봤다.
검으로 혈천도법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좁은 석실이 문제다. 검이 마음대로 초식 변화를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자 속도도 죽었다. 피가 두 배, 세 배로 돌지 않는다.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이 되었다.
구뢰마권도 펼칠 수 없었다. 사내가 초식을 취할 만한 틈조차 주지 않았다. 마영심도, 소요귀명검법, 무정삼절 등 모든 무공이 사용할 수 없는 무공이 되어 버렸다.
호발귀는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사내가 바싹 붙어서 단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뭔가를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호발귀는 이미 충분히 모든 것을 하는 중이었다.
검벽 검주는 상당히 젊지만 천살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다. 중원 전체에서도 최상승 고수로 꼽힌다. 그런 사람의 공격을 받고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있다.
호발귀가 이런 사실을 몰라서 당황한 것일뿐, 정작 놀라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등여산, 그녀는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잃었다.
주치균의 백인백팔투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몸에 바짝 달라붙어서 휘두르는 단검…… 저 손짓을 열 번 이상 받아낸 고수가 드물다. 거의 열 번 이내에 무너졌다.
지금 주치균은 거의 오십여 초나 휘두르고 있다.
호발귀는 들고 있던 검을 놓아버렸다.
손에 검만 쥐어 쥐면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검부터 빼앗은 것인데, 검을 들자 오히려 움직임이 더 둔해졌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동안 사내는 무섭게 공격해 왔다.
찌르고, 쓸고, 당기고, 베고…… 눈이 팽팽 돌 정도로 쉴 틈 없이 공격했다.
터엉!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호발귀는 다시 자유롭다,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서 석실에서 혼자 손을 놀릴 때 느꼈던 편안함이 쑤욱 밀려 들어왔다.
파라라라락!
손속이 당연히 급변했다.
손이 먼저 가고, 뒤이어서 붉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혈천도법으로 펼친 일지공(一指功)이다. 검지손가락을 사마귀처럼 세워서 진심으로 쳐낸다.
- 배제잡념(排除雜念),의주응경어수지(意注凝勁於手指),불가용졸력(不可用拙力).
‘잡념을 배제하고, 손가락에 경력을 모으되, 급하게 모으지 마라.’
일지공의 구결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휘익! 파앗!
일지공이 주치균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치균은 상반신을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급히 눕혔다. 그런 후에야 간신히 일지를 피해냈다.
“흐음!”
주치균은 경미한 신음을 흘렸다.
일지공이 얼굴을 스치면서 눈가에 상처를 냈다. 심한 상처는 아니지만,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기회가 생겼다!
우르르르릉!
두 손에서 우룃소리가 울렸다.
구뢰마권이 일어났다.
석실 문을 지키고 있는 구치균을 향해서 강맹한 권력이 벼락처럼 밀려 나갔다.
“후웁!”
구치균이 급히 단검을 들어서 호발귀의 손을 내리찍었다.
꽝! 퍼억! 퍽!
거센 격타음이 터졌다.
호발귀는 검에 찔려서 휘청휘청 물러났다.
주치균은 강맹한 권력을 얻어맞고 비칠비칠 물러서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우욱!”
주치균이 격렬하게 피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