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23화 (23/500)

第五章 급할 것 없잖아(3)

“아미타불!”

느닷없이 불호(佛號)가 들려왔다.

“뉘쇼?”

호발귀는 와락 문으로 다가가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주먹밥이 들어오는 구멍을 통해서 바깥을 본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외부 사람인가.

“오늘부터 빈승이 밥 당번입니다.”

“밥 당번? 먼저 놈은 어디 가고?”

호발귀가 밥 구멍을 통해 스님을 봤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발과 장삼만 보였다.

‘후후! 슬슬 수작질인가? 중을 보내서 달랜다 이거지? 혈마록을 빼내려고.’

스님의 속내를 읽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외부 사람과 말한 지가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밥 주던 무인은 이놈 저놈 욕지거리만 했다. 하지만 참회동에 갇힌 사람은 그 소리마저 반갑다. 하물며 스님은 말을 꽤 길게 해준다. 근질거리던 입이 확 풀렸다.

“천원주가 보내서 왔지요. 심심할 텐데, 말벗이나 해주라고.”

“천원주가 보냈다고? 그럼 당신도 천살단 주구야?”

“천살단 주구는 아니고, 주구면 또 어때? 우리가 뭐 몇 번이나 만나겠어?”

호발귀가 말을 놓자 스님도 말을 놨다.

“여기가 왜 참회동인 줄 알아? 다 부처님께 귀의하라는 뜻이지. 머리 깎고 중 될 생각 없어?”

“중 되면 풀어주나?”

“그건 안 되지.”

“하하! 밥이나 주지?”

“내 법명(法名)은 장진(暲眞). 앞으로는 장진이라고 부르고. 요 앞 미향암(微香庵)이라는 암자에 거주하는 돌중이야. 사실 법명 받은 지도 얼마 안 돼.”

“하하! 솔직하네. 목소리가 젊은데 몇 살?”

“스님한테 나이 묻는 놈도 있네. 우리 동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말 편히 하는 거야.”

“동갑? 그럼 정말 말벗이네?”

호발귀는 스님이 천원주가 보낸 독약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신없이 빠져들어 갔다.

장진은 생식하고, 좌선하고, 오로지 불도에만 전념한다.

천살단에서는 주로 마음이 병든 사람들에게 불경을 외워주는 일을 한다.

무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소림사에서는 스님도 무공수련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불자의 수련은 기지개 켜는 것으로 충분하단다.

스님은 아침마다 주먹밥을 준다.

“잠깐 기다려. 곧 올게.”

장진 스님이 주먹밥을 줄 때마다 늘 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먹밥을 줘야 해서 몇 마디라도 나누려면 잠시 기다려야 한다.

호발귀는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스님은 대략 반 시진쯤 지나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한동안 말벗을 해줬다.

“겨울이 깊다.”

“그런가? 여기서는 겨울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몰라.”

“토굴을 파놨어. 거기서 겨울을 날 거야.”

“뭐하러 사서 고생해? 그냥 암자에 있으면 되잖아.”

“그래도 불도를 닦는다는 놈이 토굴 생활 한두 번쯤 해봐야지. 그래야 어디 이름이라도 걸지 않겠어? 그냥 멋 좀 부려보는 거야.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하! 멋?”

“처처불(處處佛)이라고 하잖아. 암자나 토굴이나 내가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곳곳에 있다는 부처가 왜 여긴 없냐?”

“없긴 왜 없어. 있지. 네가 못 보는 거야.”

“허풍 좀 작작 떨어라. 중이 거짓말하면 지옥 가.”

“넌 사사불(事事佛)이 안 되기 때문에 처처불이 안 되는 거야. 하는 일, 모든 행동이 부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해. 그럼 모든 게 확 달라질 거다.”

“멋진 말. 너 그 말 외우느라고 며칠 걸렸냐?”

호발귀와 장진 스님은 한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참회동 일직이 보고차 들었습니다.”

“일직이?”

“오늘이 사백 일째 되는 날입니다.”

“아! 그래, 들여보내.”

형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호발귀를 주시했다.

아침저녁으로 보고를 받았다.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꼼꼼하게 보고 받았다.

호발귀는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놈처럼 게으른 놈은 처음입니다. 온종일 잠만 자요. 푹 쉬러 온 놈 같습니다.

매번 같은 보고였다.

그 후로 보고를 뜸하게 받았다. 근래에 들어서는 특이한 일이 아니면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괜한 기우였어.’

놈을 죽이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놈을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일 보고는 정기 보고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즉각 달려와야 한다. 별일이 없으면 백 일마다 보고한다. 호발귀에게 일이 생겼든 아니든 보고한다.

틀림없이 특별한 일은 없을 것이고, 예전처럼 잠만 늘어지게 잔다는 보고일 것이다.

덜컹!

문이 열리며 무인이 들어섰다.

“특이한 점 있어?”

형당주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그놈…… 드디어 미친 것 같습니다.”

형당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무인을 쳐다봤다.

“그놈이 귀신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들어보니 장진인가 하는 중하고 말을 하는데, 처처불이 어쩌고 사사불이 어쩌고…… 이번 겨울은 토굴에서 난다는 등.”

“헛소리한다는 거냐?”

“네.”

“분명히 헛소리가 맞아?”

“맞습니다. 아무도 없는 벽에다 대고 중얼거리거든요. 혼잣말하는 게 아니고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지금은 뭐 하고 있어?”

“좌정에 든 것을 보고 왔습니다.”

“좌정? 운기 할 수가 없는데? 너 지금, 놈이 금제를 깨고 무공을 수련한다는 거야?”

형당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아뇨. 운기 하는 것은 아니고…… 참선 같은 것. 아마도 장진이라는 중이 참선을 가르쳐준 모양입니다. 당장은 궁둥이부터 붙이는 법을 배우라는 등 그런 소리를 했거든요.”

형당주는 침묵했다.

호발귀는 운기 하지 못한다. 진기를 일절 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 좌정이다. 참선하듯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좌정 역시 호발귀의 몸으로는 오래 할 수 없다. 단전에 꽂힌 강침이 창자를 찌른다.

“알았다. 내 한 번 올라가 보지.”

형당주가 말했다.

* * *

주먹밥 속에서 대나무 잎이 나왔다.

주먹밥에 묻혀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절반으로 가르면 어김없이 찰진 잎사귀가 붙어 있다.

거기에는 글자가 쓰여 있다. 그리고 뜻을 알 수 있게 그림도 그려져 있다.

잎사귀 하나에 대여섯 자 정도가 들어있다.

아주 간단한 글자이지만 한눈에 쏙 들어온다.

- 도참부제(刀斬斧齊).

오늘 글자는 ‘칼로 벤 듯 가지런하다’라는 글자다.

‘도참부제. 도참. 칼로 벤 듯 가지런하다. 뭐가? 앞에 하나가 빠졌는데. 뭐가 빠졌지?’

장진 스님이 소일거리로 하루에 한두 말을 수수께끼로 던져주었다.

대나무 잎에 글자를 적어주면, 호발귀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글가 가장 비슷한 현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뭔가가 빠졌는데, 뭐가 빠졌지?’

방금 주먹밥 하나를 먹었다. 그런데 또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배가 고프다. 실제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울린다.

그는 잠깐 사이에 두 시진이 흘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도참부제라는 글자에 파묻힌 게 두 시진이다. 숨 한 번 몰아쉰 것 같은데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당연히 난다.

‘이거 주책도 여간 주책이 아니네. 벌써 배고프면 어쩌자는 거야. 놀고먹는 주제에 너무 염치없잖아.’

그는 배고픔을 참고 다시 ‘도참부제’라는 글자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생각하면서 걷는다.

세 걸음이면 돌아서야 한다. 걷고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단전 강침과 어깨 역사침이 통증을 일으키면 쉰다. 급한 것도 없는데 무리할 필요가 없다.

“거(胠)!”

호발귀는 ‘거’라는 말을 뱉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옆구리를 더듬었다.

거(胠)다!

허리 윗부분에서 겨드랑이 아래까지를 ‘거’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난타하면 칼에 베인 듯 가지런해진다.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에 들어있는 말도 아니다.

도참부제라는 말에 몰두하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다.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면서 칼로 벤다. 호박을 썰듯이 가지런하게 벤다.

‘도참부제……’

생각한 것을 몸으로 표현하면 아주 좋은 무공 초식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초식을 수련하는 것은 아니다. 무공도 모르는 스님이 초식을 알려줄 리도 없고. 수수께끼로 던진 글자가 우연히 초식처럼 보였을 뿐이다.

주먹밥 세 개에 들어있는 글자를 모두 합하면 스무 자 정도는 된다.

아침 주먹밥에 들어있던 글자는 칼을 연상시켰다.

어떤 때는 창, 어떤 때는 도끼, 어떤 때는 검, 철추, 수리검, 표창…… 온갖 병기들이 떠오른다.

하루에 세 번, 칼로 치고, 검으로 찌르고, 도끼로 부수는 장면을 상상한다.

‘여기는 어떤 글자가 들어있나?’

호발귀는 다음 주먹밥을 집어 들었다.

주먹밥에 눈이 묻어있다.

눈이 많이 내린 것 같다.

휘이이잉! 휘이잉!

바람도 매섭게 몰아친다. 차가운 한풍이 들이치지는 않지만, 싸늘함은 여실히 느껴진다.

‘기온이 뚝 떨어졌어. 한겨울이야.’

참회동 석실은 온도 변화가 적다. 사시사철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꽃과 나비와 눈까지 볼 수 있고, 마음껏 움직일 수만 있다면 선경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살기에는 딱 좋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춥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이가 덜덜 떨려서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석실 한쪽 구석에 흐르던 물도 살얼음이 덮였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세수인데, 오늘은 얼음을 걷어내기가 싫다.

석실이 이런데 밖은 어떻겠나? 어지간히 추울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돌변해서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사박! 사박! 사박!

식사 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응?’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추워지니 주먹밥을 일찍 주려는 것인가? 그것도 괜찮고. 어차피 밥이 목적이 아니니까. 얼굴도 보지 못한 벗이지만 참회동에서 만난 유일한 말벗인데. 그런데,

툭! 투두둑!

주먹밥이 떨어져야 할 곳에 책이 떨어졌다. 그것도 한 권이 아니다. 서너 권이 한꺼번에 놓였다. 불을 밝힐 수 있게끔 화섭자와 유등도 놓여있다.

호발귀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생각지도 않았던 기적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물건을?

스님은 구멍으로 손을 넣어서 자신이 떨군 것을 안쪽 깊이 밀어 넣기까지 했다.

스님이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심심하다며? 그래서 비급 좀 훔쳐 왔어.”

“비급을?”

“귀화미요공(鬼火迷擾功), 혈천도법(血天刀法), 소요귀명검법(逍遙鬼冥劍法)이라는 거야. 순서대로 읽어. 풀이해줄까? 시간이 없어서…… 딱 한 번만 말해줄 테니,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겠거든 ‘그만’해. 괜히 욕심부리다가 기억이 뒤죽박죽되면 곤란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돌중이?”

“내가 무공을 어떻게 아냐? 이거 훔쳐놓고 좀 보다 보니까 알게 되는 게 있어서. 네가 더 깊이 파보고, 집중해! 먼저 귀화미요공이야. 불을 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다. 작은 불꽃이 눈앞에서 탁 피어나야 한다.”

석문 밖에서 장진 스님이 소곤소곤 읊조렸다.

호발귀는 재빨리 귀요미요공을 펼치고 스님이 풀이해주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그만!”

호발귀는 아쉽지만 ‘그만’을 말했다.

귀화미요공을 풀이했다. 이어서 혈천도법을 풀이하는 중이다. 거의 삼분지 일 정도 풀이했는데, 더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지금까지 기억한 것을 되새기는 데만도 며칠은 걸릴 것 같다.

“저놈들에게 들키면 너만 죽는 게 아니라 나도 죽으니까 물건 간수 잘해!”

장진 스님이 은밀히 속삭이며 물러갔다.

‘스님이 죽는 일은 없을 거야.’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더는 지인을 잃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는 일은 두 번 다시 만들지 않는다.

호발귀는 정좌했다. 그리고 장진 스님이 일러준 풀이를 되뇌였다.

무공을 수련할 수는 없다. 진기를 일으키지 못하고, 수족을 움직일 수도 없다. 하지만 무공이 점점 모양을 잡아간다.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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