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급할 것 없잖아(1)
“먹어라.”
호발귀 앞에 오리구이가 놓였다.
어설프게 구운 고기가 아니라 양념까지 발라서 제대로 구웠다.
질 좋은 음식, 꽃잎 띄운 물에 목욕도 하고, 입기가 아까운 비단옷도 입고.
그래도 마참지 시술의 후유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렸다. 위협하는 사람도 없는데, 눈치를 살폈다. 볼일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고슴도치처럼 몸을 움츠렸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런 행동이 나온다.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 이런 상태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은 멀쩡한데, 괜히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어쩌랴.
“네 사부, 살아있다.”
무인이 불쑥 말했다.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혈천방으로 끌고 갔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거야.”
무인이 호발귀가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말을 독단적으로 해줄 리 없다. 형당 무인이 바깥 사정에 능통할 리도 없고, 밖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마참지 시술을 당하면서 느낀 게 있다.
천살단 무인들은 흑백밖에 모른다. 흑백 사이에 무수한 색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천살단 무인은 세상을 정과 사로만 분류한다.
이들에게 자신은 사인이다. 나쁜 놈이다. 고문을 하고, 설혹 고문 중 죽어도 하등 안타깝지 않다.
그런 자에게 호의를 베풀 리 없다. 호발귀가 지금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보여도 일말의 동정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 해준 말은 천원주나 형당주의 명령이다.
“써…… 줄. 까?”
호발귀가 힘들게 말했다.
“뭐?”
“좋은 소식을…… 알려줬으니…… 혈…… 마록…… 써줘?”
호발귀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쉬익!
느닷없이 갈고리 같은 손이 날아와 목을 움켜쥐었다.
“컥! 컥컥! 컥!”
호발귀는 숨을 쉬지 못하고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무인이 손에 힘을 꽉 주어 숨통을 틀어막더니, 그의 몸을 벽에 확 내동댕이쳤다.
“명심하는 게 좋아. 비급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그가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갔다.
호발귀가 혈마록을 써줄 리 있나. 놀리는 말이다.
“킥킥! 킥!”
호발귀는 두 발을 쭉 뻗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사부, 죽었다고 생각했다.
무덤이 어딘 줄 알아야 나중에 향이라도 한 대 피워주지.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자 된 도리인걸.
당신이 희생한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래야 저승에서 만나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겨우 이 모양 이 꼴이라서 할 말도 없지만.
그런데 살아계신단다.
천살단이 수집한 정보는 매우 정확하다. 이들은 무정하고, 잔혹하지만, 일은 명확하게 한다.
사부가 살아있다!
“후후후!”
호발귀는 나직하게 웃었다.
사부, 반드시 찾아낸다.
이생에서 찾지 못하면 내생에서라도 찾아간다. 그래서 사부 품에 있는 것들을 모두 훔쳐낼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중에…… 전부 다 나중에 한다.
* * *
삼각(三閣), 사전(四殿), 십삼당(十三堂), 일관(一館)의 주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천원주 휘하에는 스물한 개 조직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배수가 혈마록을 외우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니 위협은 안 되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환은 털어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재각주(財閣主)가 우려를 표명했다.
“봉맥할 생각이에요. 그것도 불안하면 폐맥하고.”
천원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참지를 견뎌낸 위인입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치러냈습니다. 이 부분, 원주님께서 심공을 사용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심공으로 봉맥이나 폐맥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죽이시는 게.”
모두 같은 의견이다.
마참지에 들어간 사람을 살려준 사례는 없다.
마참지 처분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고문을 받다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혹여 산다고 해도 살려주지 않는다. 원한이 너무 깊어서 반드시 배신한다.
살을 갈가리 찢고, 뼈를 가루로 만든다는 고문이다.
어떤 자도 그런 고문을 받으면 천살단에 관한 생각이 달라진다. 충성심은 사라지고 원한만 높아진다.
그래서 마참지 형국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생존자를 안락사시킨다.
모두 호발귀를 죽이자는 의견이다.
호발귀 같은 자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겨둬봤자 귀찮기 때문에 죽이자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마참지 시술을 끝내고도 생존자를 살려주었다는 전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전례는 반복되는 것이 본성이라서, 어느 때 누군가는 반드시 이 일을 거론하면서 살려주자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원주가 화선지 서른 장을 내밀었다.
“이게 호발귀가 적어준 일 권 내용이에요.”
제일 앞머리에 일(一)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비급 열 권 중 첫 번째 권이다.
모두 원주가 내민 화선지를 힐끔 쳐다봤다.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호발귀가 혈마록을 외운 것은 맞다. 그들도 해독은 하지 못하지만 혈마록에 쓰인 글자라는 것은 알아본다.
“책사께서 이 글을 살펴봤는데, 천지연기(天地緣起)로 밝혀졌어요.”
“천지연기!”
접객당주(接客堂主)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천지연기는 무공이 아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유생(儒生)이나 불문의 승려, 도인(道人)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봤겠지만, 그들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지연기란 천지자연의 생성 이치다.
어떻게 해서 하늘이 만들어졌고, 땅이 만들어졌으며, 서로 간에 어떻게 화응하는지, 또 어떤 식으로 균형을 이루는지에 대한 이치를 다룬 글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도 매우 달라지고, 주장한 바를 증명하지도 못한다.
어떤 자는 원래 하나였던 세상을 초거인이 칼로 베어내자 하늘과 땅으로 나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말을 믿어야 하나? 이런 주장을 반박하고,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나?
천지연기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혈마 무공의 근간이 혈기다.
어떤 사람도 사용한 적이 없는 원정을 일으켜냈으며, 인위적으로 사용했다.
천지자연이 만들어내는 기운을 이해하지 않고는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으음! 천지연기. 정말 혈기가 적힌 책인가.”
비보전(秘報殿) 전주가 침음했다.
천지연기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침묵했다.
호발귀가 혈마록 열 권을 외우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고, 그것이 혈기를 다룬 책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원주가 말했다.
“책사도 이것이 혈기를 다룬 책인지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아직 초반 부분밖에 해독하지 못해서. 앞으로 어떤 내용이 밝혀질지 모르겠지만…… 글쎄요? 죽여야 할까요?”
원주가 되물었다.
이제는 무턱대고 죽이자고 말할 수 없다.
혈마록이 혈기를 다룬 비급이라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마공인지 정공인지를 구분해야 하고, 마공이면 폐기하고 정공이면 이용해야 한다.
어떤 측면이든 원정을 이용한 무공이라는 측면에서 무림사에 한 회글 긋는 비급인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도 호발귀를 살려두는 것보다 깨끗하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급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졌다. 굳이 말하면 두 생각이 팽팽하다.
원주가 말했다.
“호발귀는 혈마록 열 권을 외우고 있어요.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지 않겠어요.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거수해 보세요.”
스물한 명 중 아홉 명이 손을 들었다.
그 속에는 호발귀에게 직접 마참지 시술을 시행했던 형당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려두고 비급 내용을 알아야 한다. 거수하세요.”
스물한 명 중 여덟 명이 손을 들었다.
네 명은 기권이다.
아직 원주의 선택이 남았다. 하지만 원주는 원래부터 참회동에 집어넣자고 말했다.
결구 구 대 구다.
“네 분, 기권하시면 안 되겠네요. 결정해 주세요.”
원주가 손들지 않은 네 명을 보며 말했다.
회합은 결론이 날 때까지 해산하지 않는다.
모두 천원 대청에서 먹고 잔다. 하루가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이틀, 이틀에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사흘…… 결론이 날 때까지 계속 토론한다.
“봐주지는 않은 거야? 시술을 견뎌냈다니 믿을 수가 없어서.”
“견디다가 미치기는 하지. 미쳐서 굴복할 시간을 놓친 건데,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고. 호발귀는 미치지 않았어. 정신이 말짱해. 그런 상태로 견뎌냈고. 저놈을 참회동에 넣으면…… 솔직히 말하자면 두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것 같아.”
형당주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마공관주도 죽이자는 쪽이다.
“책사께서도 이제 겨우 종이 한 장, 그것도 초반부 몇 글자만 해독한 상태. 열 권을 모두 해독하려면 백 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떤 비급인지 알지도 못한다는 건데,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보네.”
비보전주는 살리자는 입장이다.
“원정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발상이지. 혈마가 반미치광이가 된 것은 처자식이 간살 당했기 때문이고. 이게 마공이라는 증거도 없으니, 없앨 이유는 없다고 봐.”
“그런가? 난 혈마록이라는 말만 듣고도 피 냄새를 맡았는데. 나만 그런가?”
죽이자는 쪽과 살리자는 쪽이 생각을 말했다.
“거수하죠.”
원주가 자리를 정리했다.
모두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 들었던 거수는 무효다. 다시 거수한다. 의견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번 거수가 유효하다.
죽이자는 쪽은 호발귀가 중원 제일 신투 투심문 배수라는 점, 마참지 시술을 이겨낸 독종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런 지독함으로 천살단을 해칠 수 있다.
꼭 사람을 죽이는 것만 해치는 것이 아니다. 천살단 내부 기밀을 빼내는 것도 해치는 것이다. 호발귀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투심문 배수가 아닌가.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했다.
살려두자는 쪽도 강조할 점이 있다.
무공 수련이 걱정된다면 혈을 봉맥하면 된다. 그것도 불안하면 아예 평생 무공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폐맥시켜 버린다.
참회동은 탈출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참회동에서 탈출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밖에서 꺼내주지 않으면 나오지 못한다. 평생 창틀 너머로 보이는 하늘만 보면서 살아야 한다.
천살단은 약하지 않다. 무림을 피로 물들이던 절대 마인들이 모두 천살단 손에 추살되었다.
솔직히, 호발귀는 위협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뒤를 말끔하게 처리하자는 것인가?
살려두면 언젠가는 본인이 뜻을 바꿔서 순순히 혈마록을 적어줄 수도 있는데?
“죽이자. 거수하세요.”
일곱 명이 손을 들었다.
“참회동. 거수하세요.”
열네 명이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기권이 없다. 토론을 충분히 했다.
원주가 말했다.
“호발귀를 참회동에 넣으세요. 집행은 형당주께서 하시고. 비보전은 호발귀의 행적을 다시 한번 추격해줘요. 혹여 놓친 게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형당주는 최악의 죄인에게나 사용하는 봉혈폐맥(封穴閉脈)을 사용했다.
원주의 뜻은 명확하다.
호발귀는 비자에게 일 권을 내주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혈마록이 머릿속에 담겼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니 일단 가둬놓고 잘 구슬려보자.
형당주도 원주의 뜻을 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이런 자는 후환만 될 뿐이다. 그러니 살려는 주되, 조처는 단단히 취한다. 절대로 무공을 수련하지 못하도록.
“진기를 쓰지 못할 것이다.”
단전 부위에는 강침을 박았다.
“침을 빼내면 기혈이 흩어져 죽을 것이다. 움직이기 불편해도 뽑지 마라.”
양쪽 어깨, 쇄골에도 강침을 꽂았다.
“팔을 쓰는 데는 이상 없을 것이나 주먹질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 주먹은 이제 솜주먹이야. 침을 뽑지 마라. 역사침(逆絲針)이기 때문에 뼈가 뜯길 것이다.”
호발귀는 참회동으로 들어섰다.
말이 참회동이지 뇌옥이나 다름없다.
천연동굴에 인위적으로 석벽을 뚫어서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열쇠를 밖에서 채웠다.
완전한 석실 뇌옥이다.
“밥은 매 끼니 주니 걱정마라. 그럼 살 만큼 살고 먼 훗날 보자.”
구르르릉!
묵중한 석문이 닫혔다.
철컥!
자물쇠도 채워졌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사방에서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