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배수 짓을 한 대가(2)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호발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많은 것을 알아냈다.
발걸음 소리가 퉁퉁 울린다. 울림이 꽤 넓고 깊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큰 동굴이다.
발걸음 소리를 흘리는 사람은 보폭이 넓고, 일정하다. 거침이 없다. 사내다. 땅을 밟는 힘도 균형이 잡혔다.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걸음이다. 무인이다.
‘두 명이었는데, 여자가 없어.’
귀를 기울여 봤지만, 여인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강하에 이 정도 되는 동굴이 있었나? 없는데.’
호발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하뿐만이 아니라 황수 이북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아는데, 이렇게 큰 동굴은 없다.
발걸음 소리가 그쳤다.
사내가 다가와 옆에 섰다.
“깨어났군. 한 대 맞은 것치고는 너무 오래 쉬는 거 아냐?”
음성이 발걸음 소리만큼이나 차분하다.
호발귀는 차분함 속에서 진한 살기를 읽었다.
이들은 전혀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귀무살이다. 귀무살이 살인에 미친 살귀들이라면, 이들 비자는 차분한 가운데 가차 없이 살수를 쓰는 비정한 살인귀다.
와락!
억센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훔친 물건은 어디 있나?”
입을 열면 죽는다. 용도가 끝난 물건은 즉시 폐기당한다.
입을 열지 않으면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고문을 당하면 반드시 입을 열게 되어 있다.
선택의 여지가 있나? 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무림의 고문 수법은 상상 이상이다. 사람을 몽환 상태로 집어넣어서 속에 있는 말을 끌어낸다. 정신이 혼몽한 상태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린다.
그런 고문을 이겨내고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없다.
육신이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서, 살아있어도 죽느니만 못한 폐인이 된다.
결국은 사실대로 말하게 되어 있다.
맞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느냐, 실컷 맞고 난 후에 말하느냐의 차이만 있다.
호발귀는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비급을 외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태웠다.
비급이 온전히 머릿속에 담겨 있을 때, 한 가닥 살길이 생긴다.
“훔친 물건? 훔친 물건이 워낙 많아서. 뭘 말하는 거야?”
“책 열 권.”
“책? 아! 그거? 그게 왜?”
호발귀가 태연히 사내를 쳐다봤다.
“뭣!”
사내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호발귀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이봐. 이 세계를 몰라서 이러는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손에 들어온 물건은 우리 거야. 남의 물건을 이런 식으로 핍박해서 뺏어가려고 하면 되나?”
“뭐!”
“돈을 주고 사던가, 아니면 공손하게 돌려달라고 요청하던가.”
“죽으려고 작정했군.”
“후후!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아! 목숨으로 협박하는 건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거, 알지? 우린 목숨보다는 돈이야. 참고해.”
파앗!
사내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졌다.
호발귀는 사내의 눈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눈은 왜 부라리고 지랄이야.’
사내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사내의 목적이 비급에 있는 한, 절대로 죽이지 못한다.
그는 동굴 밖을 신경 썼다.
귀무살이 쫓아올 때가 되었다. 아니, 벌써 동굴 밖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귀무살이 하오문 강하 분타를 압박해 들어가면 비자까지 드러난다.
그때부터는 무인의 영역이다. 비자의 피신과 귀무살의 추격 대결이다.
지금까지는 비자들이 모두 당했다.
두 사람이라고 다를 바 없다. 이들은 귀무살에게 발각된다. 반드시 추살당한다.
하지만 동굴 밖에서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동굴이 깊어서인지, 누가 온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응? 아무도 없어? 생각보다 늦네.’
호발귀는 동굴 밖이 조용한데 놀랐다.
사내는 호발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체 비급에 대한 말만 물었다.
“네 말대도 돈을 주던지, 사정하든지 하지. 그 전에 비급 행방부터 알아야겠다. 있기는 있나?”
“외웠어.”
“뭐, 뭣!”
“거참 사람 말도 못 알아듣나. 외웠다고.”
“외웠다…… 재미있는 말이군. 며칠 만에 열 권을 모두 외웠다고? 하하하! 당대에 문성(文星)이 나올 모양이군. 그걸 다 외웠다? 해독도 하지 못하는 고어를? 하하하!”
사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에이, 사람을 뭐로 보고. 그거 외우는데 하루밖에 안 걸렸어. 별거 아닌데 뭘.”
빠악!
관자놀이에 일격이 틀어박혔다.
아프다!
머릿속이 텅 비면서 오직 아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또 아픔은 즉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시작이군.’
그가 고개를 쳐들며 웃었다.
“큭큭! 머리를 때려? 비급을 회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봐? 머릿속에 비급이 담겨 있는데 머리를 때리면 어떻게 해? 에이, 벌써 글자 몇 자 잊어버렸네. 앗! 또 잊어버리려고 한다. 이러면 비급 가격이 계속 올라가지.”
“좋다. 외웠다고 치자. 그래도 진위는 확인해야 하니까. 묻는다. 열 권, 권제(券題)가 뭐냐?”
“몰라.”
“……!”
“열 권, 권제가 없었거든. 표지에 숫자가 일부터 십까지 쓰여있긴 했는데, 권제는 딱히.”
“후후! 그럼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데?”
“그걸 꼭 확인해야 하나? 그냥 믿으면 안 돼? 아! 안 되나? 안 되는구나. 난 배수니까. 좋아, 인심 썼다. 붓과 종이를 가져와. 일 권만 써주지.”
호발귀는 순순히 말했다.
일 권 정도는 적어 줄 수도 있다. 아니, 적어줘야 한다. 자신이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산다. 종이를 가져오는 순간부터 살게 되는 거다.
호발귀는 그러는 동안에도 동굴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귀무살이 너무 늦어. 벌써 왔어야 해.’
사내가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좋아, 가져다주지.”
“기왕이면 마혈도 풀어주면 안 되나?”
“그건 안 되지. 넌 쥐새끼라서.”
동굴 안에 횃불이 밝혀졌다.
호발귀는 무심히 붓을 잡았다. 그리고 호기롭게 글자를 적었다.
일(一)!
“봐. 외우고 있잖아.”
“장난하지 마라!”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일 권을 적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거 적어주면 진위 확인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차피 그쪽도 해독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거고. 그냥 아무렇게나 적을까?”
“……”
사내가 말없이 쏘아봤다.
“알았어, 알았어. 적어주면 될 거 아냐.”
호발귀는 붓을 들었다.
이제는 살았다. 지필묵을 가져온 순간부터 살았다. 진위 확인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 권을 적어주면 열 권을 모두 적을 때까지 안전이 보장된다.
그때는 비자가 제발 귀무살 손에서 벗어나 주기를 기도해야 한다.
스읏! 슷!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림을 그린다.
‘이놈 봐라?’
팔비자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 외웠다. 이제는 의심할 수가 없다.
호발귀 손에서 고어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글이 그림 형태로 변화되어서 종이에 적힌다.
호발귀가 모두 외웠다는 건 사실이다.
팔비자는 혈마록에 쓰인 글자를 해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자 몇 개 정도는 알고 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획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는 안다.
혈천방이 혈마록은 연구한 시간만큼 천살단도 혈마록에 쓰인 글자를 찾아 헤맸다. 지금도 고어를 해독하기 위해서 천축(天竺), 남만(南蠻), 서역(西域) 등 많은 곳에 사람이 풀려있다. 대부분 학문 깊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십육비자가 글자 몇 개 아는 것은 당연하다.
호발귀는 고어의 형태를 완전하게 그려내고 있다.
‘혈마록!’
팔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치를 떨었다.
천살단은 혈마록을 혈마 무공이 적힌 무공비급으로 보고 있다.
현재 혈천방은 혈마 무공을 완벽하게 계승했다. 하지만 혈마가 무림을 찢어놓을 때만큼 강한 위세를 떨치지 못한다. 무엇인가 하나가 빠졌다.
천살단과 혈천방은 혈천방 무공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안다. 혈마 무공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작이자 전부인 ‘혈기(血氣)’다. 가장 중요한 혈기가 빠졌다.
천살단과 혈천방은 그 혈기가 혈마록에 적혀 있다고 생각한다.
혈마 무공의 근간은 혈기다. 초식이 아니다.
혈천방은 무공과 초식들은 완전히 계승했지만, 진짜 알맹이인 혈기를 잇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생명 보존에 필요한 힘이 있다.
진원지기(眞元之氣), 혹은 원정(元精)!
외부로 표출되는 힘이 아니다. 오로지 생명 유지에만 쓰이는 근원적인 힘이 있다.
이 힘이 있으면 생명을 유지한다. 힘이 사라지면 죽는다.
혈마는 원정을 끌어내서 파괴에 사용했다.
원정을 사용한다는 것은 육신의 모든 힘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원정을 사용했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주는 힘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죽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힘을 쥐어짜 내서 딱 한 번 쏟아내고 죽는 무공, 그것이 혈마 무공이다.
혈마 무공에서 초식은 중요하지 않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도 혈마 무공만 깨달으면 당장 초상승 고수로 둔갑한다.
몸이 번갯불처럼 빨라진다. 주먹에는 바위를 부수는 힘이 담긴다. 연약한 인간이 눈 한 번 깜짝이는 짧은 순간에 호랑이나 곰처럼 강해진다.
원정, 진원지기를 사용한 무공은 가히 경이적이다.
그러면 중원 무인은 왜 이런 힘을 두고도 사용하지 않나? 이렇게 강한 힘이라면 누구든 사용하지 않겠나. 들어보니 어떤 내공심법보다 우선할 것 같은데.
아! 사용하고 나면 죽는다고? 세상에는 힘이 없어서 짓눌린 사람들이 많다. 오직 한 놈만 죽이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사람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혈마 무공을 내밀면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배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정을 끌어내는 방법이 없다.
간혹 인간은 신들린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힘없는 아낙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오는 황소를 밀쳐낸다거나, 화살을 열 대나 맞고도 죽지 않고 십 리를 달린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자신도 모르게 원정이 쓰인 것이다.
원정을 온전히 사용한 것도 아니다. 상황이 너무 급해서 자신도 모르게 일부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자신도 어떻게 힘을 쓰는지 모른 체 엉겁결에 힘을 쓴 것이 그런 결과를 일으킨 것이다.
원정은 그 누구도 찾지 못한다. 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힘으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만약, 혈마록에 원정을 사용하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면? 원정을 사용한 후에도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혈마 무공을 관통하는 ‘혈기’라면?
호발귀는 일 권을 깔끔하게 기재했다.
팔비자가 일 권을 쭉 훑어봤다.
“이게 일 권이라고?”
“제길! 안 믿는 표정이네. 어떻게 해야 믿나? 사실을 사실대로 적어줘도 안 믿으니. 그럴 거라고 했잖아. 글도 모르면서 뭘 적어달라고 그래. 어쨌든 난 적어줬으니, 진위 확인은 그쪽이 알아서 해야지? 그것까지 내가 할 수는 없잖아?”
호발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 너…… 다시 봐야겠군. 천재야.”
“천재라면 이렇게 잡혔을까?”
“시간을 주지. 비급을 모두 적어라. 필요한 건 모두 갖다 주지.”
호발귀가 말했다.
“그 전에 흥정부터 해야지? 일 권을 확인했으면, 값을 말해봐. 적당한 가격이면……”
빠악!
다시 일격이 관자놀이를 비틀었다.
이번 일격도 너무 아프다. 머리뼈가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다. 무슨 놈의 주먹이 송곳처럼 콱 틀어박힌다. 그리고 딱따구리처럼 머리를 쪼아댄다.
“죽기 싫으면……”
“클클! 정말 말귀가 어두운 사람이네. 목숨이나 고문 따위로 협박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한 대 맞았으니 한 권은 잊어버렸다. 너희에게 넘겨줄 건 총 아홉 권이야. 킥킥!”
“넘겨주긴 할 모양이군.”
“넘겨줘야지. 그래야 살 테니까. 하지만 두 대 맞았으니 가격은 세 배로 높아졌어.”
“가격을 불러라.”
호발귀가 팔비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첫째, 황수를 건너간 다음에 적는다. 둘째, 안전을 보장받아야겠어. 방법은 당신이 생각하고. 셋째, 각 권당 황금 백 냥. 무공비급이 이 정도면 싼 거야.”
“후후후!”
사내가 웃었다. 그리고 차게 말했다.
“좋아! 그 조건 모두 들어준다. 단, 네 안전을 언제까지고 보장해 줄 수는 없고, 널 놓아준 후 칠 일까지 지켜주는 것으로 마무리 짓겠다.”
“그 정도면 좋지. 나도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하하! 자, 이제 밥 좀 주지. 배고파.”
호발귀가 일어나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