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탈출할 수 없다면(3)
짹! 째짹! 짹!
산새가 요란하게 지저귄다.
호발귀는 아홉 권째 비급을 불쏘시개로 넣었다.
드디어 마지막 한 권만 남았다.
- 십(十).
열 번째 책 표지에 적힌 글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고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책을 열 권이나 외우다 보니까 이것도 이력이 붙는다.
같은 글자가 여러 개 나온다. 그런 글자는 오래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보자마자 뇌리에 콱콱 틀어박혔다. 그림으로 바꾸기 쉬운 모형은 외우기가 더 쉬웠다.
‘너도 가라.’
마지막 십 권을 불 속에 들이밀었다.
화르륵! 활활활!
기름 먹은 비급은 마른 장작보다도 더 잘 탄다. 기름이 오래 먹어서인지 불길이 닿자마자 재가 된다.
그는 마지막 비급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저벅! 저벅!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 한 발은 길게, 다른 발은 짧게…… 원래부터 절름발이는 아니고, 경혈을 다치는 바람에 절룩거리면서 걷는다.
“쯧!”
날수수는 풀어진 책 보따리를 보면서 혀부터 찼다.
“잘 숨겨두라니까. 태우고 앉았냐? 이게 어떤 보물인지 알고나 하는 짓이야?”
호발귀는 손가락을 들어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걱정하지 마. 다 외웠어.
“이걸 다?”
끄덕끄덕!
“대가리도 잘 굴리지 못하는 놈이 머리 자랑은. 이거 외울 머리는 있고, 손댈 것과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머리는 없냐?”
“염장 지르지 마. 나도 후회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후회할 짓을 왜 했냐고, 이놈아! 느낌이 안 좋으면 당장 물러서라고 했어, 안 했어! 자식이 말은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단 말이야. 그리고 꼭 나중에 후회해요.”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네놈이 갈 데가 어디 있어!”
날수수가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날수수의 표정은 어두웠다.
산신각이 불탔다. 무슨 일인가 있었다. 호발귀 옆에 있어야 할 동패가 없다. 죽은 것이다. 동패가 바로 이 장소, 산신각에서 귀무살에게 죽었다.
그렇다면 호발귀는 바로 이 장소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귀무살이 이미 왔다 간 장소이기 때문에 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생각을 역으로 짚었다.
하지만 귀무살 같으면 여기서 한 번 더 반(反)으로 짚는다.
자신들이 뒤졌던 장소 중에서 의심스러운 곳이나 께름칙한 곳을 다시 한번 점검한다.
산신각은 되치기 당하기 딱 좋은 장소다.
호발귀는 아직 그런 점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세상을 아직 몰라.’
호발귀는 강하 밖에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 강하로 데려왔기 때문에 강하에 대한 추억밖에 없다. 황수 건너에도 몇 번 다녀왔지만 그게 고작이다.
날수수가 신발을 벗어서 툭툭 털며 말했다.
“가라고 할 때 바로 떠날 것이지 왜 아직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좌우지간 네놈 말 안 들어먹는 통에 내가 미친다. 사람 말 좀 들으면 어디가 덧나냐!”
항상 신경질적이고, 사기나 치려고 하고, 거짓말로 돈이나 뺏는 날수수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화를 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맞받아쳤을 것이다.
오늘은 참는다. 꾹 눌러 참는다. 악담이 아니라 몰매를 맞아도 싸기 때문에 참고 또 참는다.
날수수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
“노야께서 가셨다.”
날수수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뱉었다.
“……!”
호발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고작 한다는 말이 이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사조께서.’
자책하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돌아가신 분이 살아올 리 없다.
“귀무살이 들이닥쳤는데, 죽지 않고 배기나. 다행히 노야는 자진하셨다. 죽음이 괴롭지는 않으셨어.”
“살 수는 없었을까?”
“쓸데없는 소리. 나도 늘 노야께 돌대가리라고 핀잔을 듣는데, 넌 어떻게 된 게 나보다 더 돌대가리냐? 노야께서 살 수 있었으면 사셨지.”
이번에는 날수수가 물었다.
“동패는?”
호발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풋! 그럴 줄 알았다. 왕소도 죽었다. 그놈, 하필이면 비자 봇짐을 땄어. 네가 바꿔치기한 봇짐을 그놈이 건드렸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어디 있냐? 모두 뒈지려고 작정한 거지.”
“왕소…… 언제 죽었는데?”
“어제.”
“어제? 어떻게?”
“어제. 비자 봇짐을 털었다가 비자와 함께 불타 죽었다. 객잔이 홀랑 날아갔어.”
노야도 죽고, 왕소와 동패도 죽었다. 비급도 이미 불태워졌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지금부터는 어제의 삶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삶이다.
날수수가 손을 뻗어서 호발귀의 손을 잡았다.
너와 나만 남았다. 넌 어떻게든 살아라. 그래야 투심문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
날수수의 말 없는 진의가 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휴우! 오면서 소문을 냈다.”
“……?”
“혈천방이 나타났다. 사람을 죽이고 객잔을 불태웠다. 귀무살이 노야를 죽였다. 후후! 지금쯤이면 강하에서 노야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호발귀는 귀무살을 또 떠올렸다.
바람이 부는 듯 부드러운 신법, 벼락 치듯이 스쳐 가는 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하는 악심(惡心), 입가에 드리워진 비릿한 미소까지 모두 떠올렸다.
‘귀무살!’
호발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날수수가 말했다.
“소문이 별로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제 멋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
“……”
호발귀는 침묵했다.
귀무살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굳어질수록 ‘어떻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워낙 무공 차이가 크게 나는데, 그런 자들을 어떻게 상대하나?
호발귀가 말했다.
“당분간 여기 있으려고. 여기가 안전한 곳 같아서.”
‘안전하기는 개뿔!’
날수수는 핀잔을 주려다가 참았다.
말해줄 필요가 없다. 호발귀 스스로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였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보고 느끼는 것이 듣고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자극을 준다.
“동패가 이 잿더미 속에 있냐?”
호발귀는 고개를 돌려서 사부를 쳐다봤다.
사부는 시커먼 잿더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이놈아 뭐라고 했냐. 이번 일에 관여된 놈들은 모두 죽는다고 했지? 왕소가 죽을 것도 짐작했지? 빨리 달려갔는데도 한발 늦었더라.”
호발귀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사부가 품에서 동패를 꺼내 호발귀의 손에 쥐여주었다.
“받아라. 노야의 선물이다.
“……”
“새끼. 기죽었냐? 어째 말수까지 줄었어?”
“아니, 그놈들……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 중이야. 동패처럼 죽여야겠지? 입을 틀어막아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한 후에 머리 가죽을 벗기고, 팔 하나를 잘라서?”
“그렇게 죽었냐?”
호발귀는 머리를 끄덕였다.
“잠이나 자둬라. 네 놈 팔자도 동패 못지않을 테니까.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 산 밑으로 해서 용소(龍沼)로 빠지는 거야. 거긴 바위산이니까 네놈 신법이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히히! 저놈들은 소리를 안 낼 수가 없어.”
“같이 안 가?”
“노야가 선물을 갖다주라고 하기에 온 것뿐이야. 내가 무슨 죄지었냐? 도망가게. 내가 네 놈이야? 잘 가고…… 그 동패(銅牌) 잘 간직해라. 노야의 모든 것이야.”
“사부(師父).
“사부? 이놈이 징그럽게 왜 이래? 죽을 때가 되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고마웠어, 사부. 잘살고 있어. 곧 올게.”
“그래라, 이놈아.”
날수수가 몸을 일으켰다.
타탁! 타타탁! 타타탁!
나무를 치고, 바위를 두들기고, 풀잎을 후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호발귀는 잠이 들었다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바로 지척에서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인다.
‘누가!’
그는 바싹 긴장해서 두 귀에 온 신경을 모았다.
타탁! 타타타탁! 타타탁!
소리가 일정한 방향에서 들려온다. 아래에서 위로, 골짜기에서 산정으로 향하고 있다.
-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 산 밑으로 해서 용소로 빠지는 거야.
‘사부!’
호발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사부가 귀무살을 유인하는 중이다. 귀무살을 자신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 산꼭대기로 유인하고 있다.
사부는 어젯밤에 산 밑 용소로 가라고 말했다. 저들이 오기 전에 그 말을 했다. 그렇다면 사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곳,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반(反)에 반에 반! 한 수 더 짚었다!’
사부는 왜 위험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위험한 줄 알면 어젯밤에 같이 떠났으면 되었을 텐데.
떠나는 것은 해결책이 안 된다. 아무리 빨리 도주해도 결국은 잡힌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부가 유인하고, 자신이 용소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저들은 곧 따라붙는다.
‘사부, 꼭 살아있어. 죽으면 용서 안 해!’
그는 급히 산 밑으로 치달렸다.
사부를 쫓아가는 것은 사부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다. 혈마록까지 태워버렸으니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의 복수도 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자신이 복수할 때까지 사부도 살아있어야 한다. 정말로 살아있어야 한다. 귀무살…… 사부만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 사부까지 죽이면 뼈를 갈아버린다.
호발귀는 두 귀와 두 눈을 활짝 열었다. 귀무살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 모든 일…… 반드시 갚는다.’
휘릭! 휘리릭!
산정에 귀무살이 내려섰다.
날수수는 도주하지 않았다. 더는 도주할 곳도 없다. 날개가 있다면 모를까.
“은허신법(隱虛身法). 후후! 투심문이더냐!”
쌍부가 비웃듯이 말했다.
“나 같은 놈이야 밤이슬 맞는 게 일상이지만, 딱 보니 존귀하신 분들 같은데. 꼭두새벽부터 산꼭대기는 어쩐 일이시우? 해맞이라도 하시려나?”
날수수가 그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귀무살 다섯 명.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
한두 명이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다섯 명이면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한다.
“호발귀, 지금 어디 있어?”
“엥? 호발귀? 왜? 그 새끼가 사고라도 쳤수?”
“희롱은 용납하지 않는다. 농하지 마라.”
“난 농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우. 그 새끼…… 일 벌일 줄 알았다니까. 오해는 마슈. 그놈하고 나, 잔재주 몇 수 가르쳐주고 밥 좀 얻어먹는 사이밖에 안 되니까. 내가 다리만 이렇지 않아도 그런 놈, 등쳐 먹을 일 없지.”
“농하지 말라고 했다!”
쒜엑!
쌍부가 버럭 일갈을 내지르며 덮쳐왔다.
“햐! 사람을 아예 벌레 취급하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 다우.”
날수수가 급히 신형을 비틀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쳐냈다.
꽝!
쌍부의 도끼와 장(杖)이 정면에서 격돌했다.
“커억!”
날수수는 일 초도 견뎌내지 못했다.
도끼와 장이 부딪치는 순간, 또 한 자루의 도끼가 땅에서 솟구치더니 허벅지를 깊게 찍었다.
쌍부만 상대하는 것이면 전력을 다하겠는데, 다른 귀무살도 견제해야 한다. 귀무살은 공명정대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라서 항시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다.
“끌고 간다.”
무지는 벌써 등을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