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탈출할 수 없다면(2)
“당했군!”
무지가 피식 웃으면서 걸음을 멈췄다.
“당해? 뭘?”
“그 서신, 아무것도 아냐. 지금과 같은 때를 대비해서 안전장치로 받아둔 거지. 시간 벌려는 작전에 꼼짝없이 당했어. 저게 별 것 아니라는 건 전서구 한 마리면 알게 될 거고…… 그러면 벌 수 있는 시간은 반 시진.”
“반 시진? 그걸 벌어서 뭐하…… 앗차!”
섬전이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반 시진은 무척 짧다. 그 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하지만 한 사람을 빼내는 데는 충분하다. 자신들이 점방을 덮쳤을 때, 안에는 피신시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쒝!
잔살이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신형을 쏘아냈다.
놋그릇 점방에서 나온 지 일다경도 되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면 피신시키는 놈을 잡을 수 있다.
쒝! 쒜에엑!
섬전과 쌍부도 뒤질세라 신형을 쏘아냈다.
노야는 회계대에 앉아서 차분하게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못 판단했나?’
무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곧 노야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생기(生氣), 생기가 없다.
휙!
재빨리 다가선 그는 노야의 목에 손을 댔다.
“음!”
신음이 흘렀다.
노야가 죽었다. 외상은 전혀 없다.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고 자진했다.
“이거 이상한데? 심맥을 끊어? 그럼 무인이라는 거잖아. 우리가 왜 무인을 못 알아봤지?”
“죽은 것도 이상하고. 내가 이 자라면 되든 안 되든 싸워보기라도 할 텐데, 왜 죽지?”
잔살과 섬전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지. 우리가 모르는. 노야라는 이 자, 과거를 수소문해보자. 뭔가 나올 거야. 부를 축적하는 과정도 조사하고.”
“난 본방에 다녀올게. 이 자에 대한 것들, 웬만한 건 다 나와 있을 거야. 워낙 유명한 자라.”
월도가 말했다.
노야는 나이가 구순에 가깝다. 가족은 없고, 홀로 산다.
표면상으로는 놋그릇 장사를 하지만 실질적인 수입원은 와주와 사채업이다.
와주로는 희귀물품을 조달한다.
흔히 구할 수 없는 희귀물품을 고관대작에게 비싼 값으로 넘긴다.
사채 역시 같은 방법을 쓴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저리로 돈을 빌려준다. 그래서 노야라는 존칭도 듣는다.
아주 간단한 속임수다.
그가 서민들에게 빌려주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병아리 눈물보다도 적은 돈을 빌려주면서 생색만 내는 게다. 그는 부자들에게 상당한 고리로 막대한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부자들은 그 돈을 빌려서 서민들에게 더 비싼 고리 이자를 놓는다.
노야의 막대한 부는 그렇게 조성된다.
힘든 일도 없다. 그저 갈퀴로 땅에 떨어진 은자를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것도 필요 없다. 부자들이 다 쓸어 담아서 망태기째로 가져다주니까 말이다.
노야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이것밖에 없다.
“또 없어?”
“없어.”
“황수 이북이 범죄자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열다섯 마을을 다 합치면 인구가 사천 명이 넘어. 그중 제일 부자야. 이것밖에 없을 리가 없어.”
“하지만 사실이 그래.”
“날수수 행방은 아직도?”
“이놈도 감쪽같이 사라졌어. 아무 단서가 없어. 흔적 지우는 게 십육비자보다 더 뛰어나.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 방면에 조예가 깊은 놈이야.”
무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배수에게서 비급을 회수하는 일은 장난이었다. 아주 쉬웠어야 한다.
그런데 노야를 만나면서부터 일이 뒤틀어졌다.
노야가 자살했다. 그를 추궁할 수가 없다. 날수수와 호발귀는 종적을 감췄다.
추격 단서가 뚝 끊겼다.
일이 꼬였다.
“섬전, 쌍부, 월도. 황수를 맡아줘. 호발귀가 황수를 넘어가면 곤란해.”
황수를 넘는다고 해서 추격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추격범위도 한도 없이 넓어진다. 결국은 잡겠지만,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그러니 강하에서 처리해야 한다.
“잔살, 나하고 산신각으로 가지. 거기서부터 다시 뒤를 밟아보게.”
“그러지.”
잔살이 대답했다.
호발귀에 대한 수색은 산신각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산신각은 호발귀 패거리들의 은신처다. 그 말 때문에 동패라는 자를 잡았다.
한 명쯤 산신각에 남아서 계속 기다렸어야 했나?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노야라는 자가 이토록 빨리 죽을 줄 몰랐다. 덕분에 추격 단서가 갑자기 뚝 끊겼다. 날수수가 십육비자보다도 능숙하게 사라질 줄 몰랐다. 배수가 아니라 무인이다. 마지막으로 호발귀라는 배수를 너무 가볍게 봤다.
물론 호발귀도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호발귀를 잡는 단서는 여전히 산신각에 있다.
호발귀는 틀림없이 산신각에 들렸다. 아니면 앞으로 들릴 것이다. 동패가 왔기 때문에 확신한다.
만약 거기서도 찾지 못하면 매우 피곤해진다. 그때는 강하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배수를 족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 갔다 와. 황수는 우리가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쌍부가 웃으면서 말했다.
* * *
사부가 싸준 보따리를 풀었다.
책 두 권!
사부의 집어따기 수법이 도해(圖解)로 기록된 책과 자신이 훔친 혈마록이다.
먼저 사부가 준 책을 집어 들었다.
- 원충노인(元沖老人) 장원(長愿) 팔십일수(八十一手).
제목이 참 이상하다.
원충노인이 만든 팔십일수라는 뜻인데, 가운데 장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염원, 숙원, 희망, 바람이라는 말이다.
‘이게 뭐야? 앞뒤가 안 맞잖아. 원충노인의 오랜 염원 팔십일수?’
호발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펼쳤다.
책은 무척 오래전에 저술되었다. 책장을 넘기자 곰팡내가 풀풀 풍긴다.
그는 고서를 꼼꼼히 살폈다.
도해 대부분은 이미 익힌 것들이다. 팔십일 수 중 삼십 수 정도는 알고 있다. 나머지 오십 수 정도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수련하는 것인지 알겠다.
호발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팔십일수를 외우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반복해서 외웠다.
지금 비급을 터득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외운다.
원충노인 장원 팔십일수는 익숙해서인지 어렵지 않게 외웠다.
‘이건 끝났고……’
외운 책은 미련 없이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화르륵!
기름기 먹은 책에 불이 옮아붙었다. 불길이 확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재만 남기도 모두 태웠다.
원충노인 장원 팔십일수가 태워졌다.
외운 것을 잊어버리면 어쩌나, 잘못 외우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은 털어버린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외워보았지만, 모두 기억하고 있다. 기억력 하나만큼은 천재 소리를 들어도 부족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 이점은 자신이 인정하고 남도 인정한다.
일단 머릿속에 틀어박힌 일들은 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들은 외우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지만, 그는 너무 기억한 것이 잊히지 않아서 오히려 불편하다.
그만한 기억력이 있기에 책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혈마록, 비급 열 권을 쳐다봤다.
이 비급들은 자신과 무관하다. 어쩌다가 눈앞에 봇짐이 떨어져 있어서 손댄 것이 이 지경까지 왔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책이다.
혈마록에는 제목 대신 숫자가 적혀 있다.
비급마다 숫자가 적혀 있어서 일 권부터 십 권까지 순서를 정할 수 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 권을 집어 들었다.
각 책에는 맛이 있다. 책도 사람 얼굴처럼 모양이 각기 다르다. 정말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냄새도 다르고, 서체도 다르고, 책을 잡는 느낌도 다르다.
이런 것들은 기억하면 내용을 외우는 데 도움이 된다.
일 권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그걸로 됐다. 이미 비급의 생김새를 외워버렸다.
이제는 일 권은 고서 수백 권 속에 섞어놔도 찾을 수 있다.
착!
첫 장을 넘겼다.
예상했던 대로 외우기가 쉽지 않다. 고어를 모르기 때문에 잘 외웠는지 확인하지도 못한다.
‘외우기만 하면 되잖아!’
글이 아니라 그림이라도 생각한다. 사실 읽지 못하는 글이니 그림이나 다름없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듯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휘어진 그림이다.
그림을 외우듯이 고어의 모양을 꼼꼼히 살피고 기억한다.
글자와 그림은 완전히 다르다. 그림은 보자마자 전체적인 느낌이 확 기억된다. 글씨는 외우기가 어렵다. 획 하나만 삐뚤어져도 전혀 다른 뜻이 된다.
호발귀는 자신이 외운 것을 직접 그려봤다. 그리고 비급에 적힌 글씨와 비교했다.
거의 맞는다. 한두 자 정도 틀리지만, 그 정도는 글을 아는 자가 외워도 틀린다.
호발귀는 다시 외웠다.
혈마록이 어떤 책인가!
동패의 목숨과 맞바꾼 책이다. 왕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왕소도 죽었다. 동패를 저렇게 만든 인간들이 왕소인들 살려뒀겠는가.
그들의 목숨이, 한이 서린 비급이다.
글자 한 자도 틀리면 안 된다.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라!
사생결단(死生決斷)의 결기(決氣)로 비급을 외운다.
땅에 글씨를 그려보고, 비급과 대조해봤다.
그림을 그리는데, 손은 글씨를 쓰려고 한다. 자꾸 어떤 글자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그럴 때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생각을 털어낸다. 깊은 호흡과 함께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글과 거의 맞는다.
거의? 아직 멀었다. 완벽하게 들어맞아야 한다. 한두 자 정도 틀린다고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또, 또, 또…… 호발귀는 계속 외웠다.
화르륵! 타탁! 화르르르륵!
불길이 혈마록 일 권을 집어삼켰다.
혈천방 무인들, 천살단 무인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이미 불 속에 들어가버렸다.
호발귀는 불타는 책을 쳐다봤다.
혈마록을 태우는 불길 속에 귀무살 다섯 명의 얼굴이 겹쳤다.
앞으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생김새를 기억한다. 키와 덩치를 기억한다. 걷는 모습도, 음성도 기억한다.
망각을 모르는 기억력이 놈들을 단단히 붙잡아 놨다.
책을 기억한 것처럼, 그들 또한 어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알아낼 수 있다.
나그네처럼 방갓을 써도 무방하다. 복면을 써도 상관없다. 흑의가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도 괜찮다.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어도 찾아낸다.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
‘너희는 내 손에 죽어!’
왕소와 동패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나.
이번 배수 짓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사부는 많이 염려된다. 저들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살수가 사부에게도 미쳤을 것 같다.
‘워낙 눈치 빠른 분이니 잘 피하셨을 거야.’
사조(師祖) 노야는 무사할 것이다.
호발귀는 머리를 휘둘러서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다. 사부를 생각한다 한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혈마록 이 권을 집어 들었다.
잘못된 물건…… 없앤다!
사부는 혈마록으로 협상해서 목숨을 구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부도 동패가 죽는 모습을 봤어야 한다.
저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저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쪽을 택하겠다.
너희들, 이제 물건을 회수하기는 틀렸어!
그는 이권에 적힌 고어를 머릿속에 각인시켜나갔다.
조각가가 석판에 글씨를 새기듯 한 자, 한 자 차곡차곡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