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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11화 (11/500)

第三章 탈출할 수 없다면(1)

노야(老爺)!

사람들은 그를 노야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시장에서 놋그릇 장사를 하는 장사꾼에 불과하지만,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농부가 그를 찾아온다. 살인자도 찾아온다. 마을 하나를 휘어잡은 두목도 찾아온다. 각양 각층에서 수많은 사람이 놋그릇을 사기 위해서 그의 점방(店房)을 들락거린다.

어떤 사람은 돈을 빌리러 온다.

노야는 돈이 많다.

쌓아놓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죽은 어머니도 모른다고 할 정도다. 노야 본인도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소문도 나돈다.

황수 이북 제일 갑부!

간단히 말해서 악인들이 세운 열다섯 개 마을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이다. 그래봤자 황수를 건너가면 천석지기, 만석지기에 불과한 졸부지만.

어쨌든 강하에서 노야를 장사꾼 대하듯이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노야의 돈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모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귀무살, 무지가 놋그릇 가게로 들어섰다.

점원처럼 앉아서 놋그릇을 닦고 있던 노인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피비린내. 무슨 놈의 피 냄새가…… 에잇! 오늘 저녁 먹기는 틀렸군.”

노인은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해서 나이를 추측할 수 없다.

“노야, 맞나!”

무지가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그가 말을 할 때, 잔살과 섬전은 입구를 봉쇄했다.

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막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람을 막는다.

스릉!

그들은 검을 뽑았다.

검날이 시퍼렇게 서있다. 살짝 대기만 해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노야, 맞나!”

얼음장 같은 음성이 계속해서 노인을 핍박했다.

“살귀들은 지옥에 있어야지, 이 궁벽한 곳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왔을꼬?”

노야는 살을 에는 듯한 무지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았다.

“노야. 호발귀를 찾는데.”

“호발귀? 아! 그 도둑놈! 도둑놈을 찾으려면 도둑놈 집으로 가야지, 여긴 왜 와? 여긴 도둑놈 사는 데 아냐? 물건을 가끔 사주긴 하지만 별 것 없어.”

“별 거 없다? 네 뒷조사를 했다. 후후! 돈은 많은데 뚜렷한 재원(財源)이 없더군. 수상하다는 말이지.”

“이제는 살귀들이 남 돈 버는 것까지 간섭하냐?”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까짓 놋그릇 몇 개 팔아서는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없고.”

“……”

노인은 실눈을 뜨고 무지를 쳐다봤다.

노인이 눈으로 묻는다. 더 할 말은?

“와주! 돈 많은 놈은 아까운 것도 많지. 호발귀만 말하면 목숨은 놓아준다.”

“클클클!”

노야가 앞니 빠진 입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이놈아, 내 목숨을 왜 네놈이 놓고 말고를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노인은 살기등등한 무인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랫사람 다루듯 말했다.

“옜다, 이놈아!”

노야가 책상에서 오래된 서신을 꺼내더니 냅다 던졌다.

무지가 날아오는 전서를 받았다.

“이게 뭐냐?”

“어린놈이 늙은이에게 꼬박꼬박 반말은…… 좌우지간 피맛 들린 놈들이란. 잔말 말고 펴보기나 해. 읽고 난 다음에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지.”

무지가 서신을 펼쳤다.

“음……!”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그가 침음성을 터트렸다.

“할 말 있냐?”

노야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내일…… 다시 오지.”

무지가 서신을 와락 구겨버린 후, 돌아섰다.

순간, 노야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져 버린 눈빛이다.

‘귀무살. 귀무살이 세상에 나오면 항상 피바람이 불었어. 무림에 피바람이 몰아치는구나.’

귀무살이 물러간 후, 안쪽 방에서 한 사람이 쩔룩거리며 걸어 나왔다. 날수수다.

“이 서신에 뭐가 적혔는데……”

그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구깃구깃 구겨진 서신은 일종의 감사 편지다.

막대한 지원에 감사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 꼭 연락해라.

누군가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에 받은 감사 서신이다.

날수수가 보기에는 전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살심을 품고 달려온 놈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섰는데. 이 서신이 뭐기에?’

한 가지 단서라면, 구겨진 서신에 찍힌 인장이다.

오희지(吳嬉智)!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여자 이름 같은데,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노야가 감사 서신을 받을 정도로 막대한 은자를 제공했다면, 최소한 이름쯤은 알려져 있어야 하는데,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서신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

서신을 읽어보면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는 말이 기재되어 있다. 오희지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종이를 받으려고 얼마를 쓰신 겁니까?”

“눈물이 쏙 나올 만큼 많이 줬다. 언젠가 한 번 쓸 일이 있겠거니 했는데…… 클클클! 어쩌다가 마물을 손대가지고는. 그래, 그놈이 훔쳤다는 혈마록이 진품은 맞고?”

“맞습니다.”

날수수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노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혈마록 표지에 투골지(透骨指)가 찍혀 있었어요. 투골지는 워낙 특이해서 속일 수도 없잖아요. 척 보고 알았습니다.”

“허! 허허! 허! 어찌 이런 일이…… 그게 어떻게 그놈 손에 들어가. 이 빌어먹을 놈이 뭐에 손을 댄 거야? 넌 그놈 단속도 못 하고 뭐한 거야!”

“그놈이 어디 제 말을 듣나요?”

“쯧! 사부란 것이.”

노야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노야, 제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날수수가 노야를 쳐다봤다.

그는 노야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노인이 노인에게 경어를 썼다. 노야는 날수수를 편하게 대한다. 마치 아랫사람에게 말하듯이 말을 턱 놓았다.

“뭐? 뭔 할 말?”

“혈마록은 혈천방 보물인데, 이게 독림에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혈천방이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인데.”

“궁금하냐?”

“흑림 너머가 혈천방입니까?”

날수수가 노야를 빤히 쳐다봤다.

흑림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

우연히든, 실수든, 일부러 들어갔든 일단 들어가면 모든 소식이 뚝 끊어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흑림은 황수 이북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금지인 셈이다. 일부러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호발귀만 들락거렸다.

호발귀는 장물을 노야에게 넘겼고, 노야는 그때마다 돈과 함께 피독환을 넘겼다. 독림에 쌓인 독기를 깔끔하게 해소할 수 있는 강력한 피독환이다.

노야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괜히 이곳에 왔겠냐? 혈천방이 바싹 붙어 있으니까 도망 다니지 않고 편히 살 수 있겠다 싶었지. 그동안은 돈줄 역할 해주면서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제 덜컥 마물을 건드려버렸으니 어쩌냐? 혈마록이라면 사정 봐주지 않을 텐데.”

“이것 가지고도 귀무살을 막을 수 없나요?”

날수수가 인장 찍힌 서신을 들어 보였다.

“어림도 없지. 그건 잠시 눈속임일 뿐이야. 거기 적힌 오희지가 혈천방 총령(總領)이거든. 그러니까 ‘이게 뭐지?’하고 물러선 것뿐이야. 곧 다시 올 거다. 클클클!”

노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랬군요. 뭔가 있다 싶기는 했는데.”

날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 무림은 이상하게도 강하에 대해서 관대하다. 어떤 살인자도 황수만 넘으면 추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단지 토착민을 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추격할 것 같으면 황수를 몰래 넘어와서 암살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무림은 황수를 건너오지 않았다.

황수가 경계선이다.

독림 너머에 혈천방이 있다면 모든 궁금증이 확연히 풀린다.

대문파는 이곳에 혈천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충돌을 피한다. 작은 문파나 무인들은 대문파가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모든 사실이 명확해졌다.

날수수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무살이 왕소와 비자를 죽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발귀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후, 본격적으로 배수를 찾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호발귀 그놈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저놈들이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동패도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다행히 호발귀 이놈은 아직 잡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혈천방이나 천살단은 거대한 공룡이다. 거기에 비하면 황수 이북에 사는 사람은 피라미다. 피라미가 공룡 싸움에 꼈으니 아작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모두 어떻게 되나? 이렇게 속절없이 죽어야 하나? 호발귀, 그놈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노야가 말했다.

“왜? 발귀 그놈이 못 빠져나갈까 봐 걱정이냐?”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요.”

“뭘 그런 걸 걱정해.”

“저라도 걱정해야죠.”

“네가 걱정하면 뭐가 달라지고? 어차피 모두 다 결국은 뒈져서 북망산천에 눕힐 텐데, 괜한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죽을 땐 죽더라도 발악은 할 수 있지.”

“네?”

“쯧! 저런 머리를 가졌으니 투심문(偸心門)이 이 모양 이 꼴이지. 이래서 제자를 잘 거둬야 하는 건데. 손가락 빠른 것만 봤지, 대가리를 보지 않았어. 쯧!”

“머리라면 사부님도 별로……”

“저놈 저놈 말하는 것 본 봐라. 이젠 아예 내놓고 대들기까지 하네.”

“하하하! 잘못했습니다.”

날수수의 얼굴은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 죽는다는 것은 예상했는데, 발악은 할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귀무살을 상대로 최대한 발악하면 한두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되나? 귀무살을 전부 묶어놓지 않는 한, 호발귀는 잡힐 것이다.

노야가 그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놈아, 귀 후비고 잘 들어. 이번에는 내가 죽고, 다음에는 네가 죽어.”

“죽는 거야……”

“끝까지 들어. 최대한 천천히. 기왕이면 고문도 당하고. 우리가 고문당할 짓을 뭐 했나? 안 했지. 그래도 할 수 있으면 당해봐. 무조건 당하는 거지. 그놈한테 보여줘야 해.”

“네.”

“지금 이 판에서 살아날 놈 있어?”

“없죠.”

“없으니까 죽자는 거야. 하지만 곱게 죽지 말고 최대한 발악하다가 죽어. 알았냐? 처참하게 뒈지는 모습을 발귀 그놈에게 보여주란 말이야.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발악이야.”

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우리 투심문이 숨는 것 하나는 잘하잖냐. 싸우는 거라면 몰라도 숨는 거라면 기가 막히지. 우리가 죽지 않으면 발귀 그놈…… 스스로 나타날 거야.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그놈도 숨어. 처참하게 죽을수록 최대한 꼭꼭 숨을 거다.”

“……”

날수수는 침묵했다.

사부의 뜻을 알았다.

투심문은 배수 문파다. 세상 사람 중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인문(一人門)이다. 한 대에 한 명만 존재한다. 그러니 문파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대를 끊기는 싫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호발귀만이라도 살릴 생각이다.

혈마록은 호발귀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

혈마록에 혈마의 무공이 기재되어 있든, 돈이 묻힌 장소를 알려주는 장보고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무려 [이백 년, 혈마록이 가끔 나왔지만 고문을 풀어낸 사람이 없다.

호발귀는 정말 쓸데없는 물건을 훔쳤다.

노야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까 괜찮은데, 넌 아직 살날이 많잖아. 괜찮겠냐?”

“어휴! 사부님, 제 나이도 만만치 않아요. 내일모레면 일흔입니다.”

“그러니까 살날이 많지 이놈아! 겨우 일혼 가지고 뭘 나이를 들먹여! 그래도 아흔 정도는 돼야 노인입네 하는 거야!”

“그런가요?”

“클클! 그래. 그런 거야. 좀 웃어라, 이놈아.”

“웃어야죠. 이따 가면서 웃겠습니다.”

“발귀놈을 찾으면 비급부터 태우라고 해. 어차피 상한 물건이니까. 협상거리? 킥킥! 에라! 귀신하고 농담 따먹기 하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날수수는 거듭된 핀잔에도 얼굴을 구기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야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일 배 그리고 또 일 배, 합이 이 배.

“절 잘 받았다. 옜다, 절값이다.”

노야가 조그만 동패 하나를 던졌다.

날수수는 동패를 받아들었다.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럼…… 편안히 가십시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곧 따라와, 이놈아.”

노야가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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