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0화 (10/500)

第二章 죽음이 더해지니(5)

산신각은 조용하다.

구타나 비명, 고함, 절규…… 하다못해 자잘한 잡담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비명이 조금이라도 들렸다면 즉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조용하다.

‘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나?’

호발귀는 끈질기게 산신각을 주시했다.

지금 나가면 꼼짝없이 동패와 얽힌다. 동패와 한패가 된다. 그러면 동패가 살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다.

배수는 손이 빨라야 하지만, 손 못지않게 눈과 귀도 밝아야 한다.

일견(一見)에 돈 있는 곳을 찾아내고, 일청(一聽)에 전낭의 금액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날수수는 이런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아교로 눈꺼풀을 붙인 채 흡혈박쥐가 사는 동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흡혈박쥐는 묘한 놈이다.

놈은 날카로운 이빨로 피부를 뚫고 피를 빨아먹는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피를 빨린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다.

흡혈박쥐에게 피를 빨리지 않으려면 달려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가 즉시 피해야 한다.

귀를 훈련하는 방법은 더 혹독하다.

날수수는 그를 물소리가 굉렬한 폭포 앞에 앉혀놓고, 뒤에서 독나비를 풀었다.

독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며 달려든다. 목 뒤에 발라놓은 화분(花粉)을 노린다.

화분쯤이야 얼마든지 빼앗겨도 무방하다. 문제는 독나비가 흘린 독분이다.

독분이 목에 묻으면 지독하게 가려워서 살점을 뜯어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독분 묻은 손으로 눈이나 사타구니를 만지면 그때는 정말 지옥 구경을 하는 것이고.

그러니 독나비가 날아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폭포가 일으키는 소리를 제압하고, 아주 미세한 날갯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눈과 귀를 얻었다.

지금은 모든 신경을 총동원해서 산신각을 쳐다본다.

동패를 가장 안전하게 빼낼 방법이 무엇인지 마련한다. 뾰족한 대책도 없지만.

‘처음부터 실수였어. 봇짐에 책이 들은 것을 알았다면 손도 대지 않았는데.’

평상시 같으면 즉시 알았다. 절대로 모를 리 없다.

봇짐에 책을 넣은 것과 다른 묵직한 물체를 넣은 것은 확연히 구분된다.

배수란 놈이 책이 들은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하기는 어느 미친놈이 책을 열 권이나 짊어지고 다닐 것으로 생각했겠나.

누구를 탓하나. 물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덥석 손부터 내민 자신 탓이지.

‘왜 그런 실수를 했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다.

동패는 어떻게 될까?

조용한 걸 보니 크게 닦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몇 대 얻어맞기는 하겠지만 큰 위험은 없을 것 같다. 또 지금은 얻어맞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너무 조용하니까 더 불안하다.

‘별일이야 없겠지.’

호발귀는 불안한 마음을 꾹 억누르며 산신각을 쳐다봤다.

동패가 풀려나면 바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다.

귀무살에게 혈마록을 주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목숨을 맡긴다.

그나마 왕소가 나타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왕소까지 나타났다면 동패는 둘러댈 변명도 없다. 꼼짝없이 호발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넌 제발 나타나지 마라. 어디서 술 한 잔 먹고 쭉 뻗어 자. 제발 오지 마.’

덜컹!

산신각 문이 열렸다.

‘드디어 나오네. 그럼 그렇지. 겨우 배수 짓을 한 놈한테 무슨 짓이야 하겠어.’

호발귀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니, 얼어붙었다.

휘청! 휘청!

누군가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동패? 체격, 옷…… 동패가 틀림없는데, 동패가 아니다.

머리카락이 없다. 머리 가죽이 벗겨져서 붉은 살점이 환히 드러나 있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팔은 관절이 끊어져서 너덜거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의 팔처럼 흔들거린다.

‘동…… 패!’

그는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동패의 뒤로 흑의 무인이 걸어 나왔다.

“나와라.”

아주 편안하게 말했다. 한데 음성이 순식간에 증폭되더니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린다.

“근처에 있는 거, 알고 있다. 나와라!”

- 근처에 있는 거, 알고 있다. 나와라!

산언덕을 치고, 골짜기를 치고, 나무들을 치고…… 회향(回響)이 온 산을 울린다.

촥! 촤아악!

흑의 무인이 손을 번뜩였다.

순간, 동패의 오른팔이 싹둑 잘리더니 하늘 높이 솟구쳤다.

잘린 팔에서 피가 흩뿌려진다. 푸른 산과 바위를 붉은 피로 물들인다.

동패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육신이 마비된 듯, 팔이 잘린 것도 알지 못했다. 팔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잠시 꿈틀거리더니 비틀거리며 계속 걷는다.

동패의 본능이 앞으로 걸으라고 시킨다.

이들 손에 있으면 죽는다. 그러니 벗어나야 한다. 무조건 벗어나야 한다.

동패는 자신이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은 없고 본능만 남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실 걸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무조건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동패……’

호발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면 자신도 동패 꼴이 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서 동패를 살리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저런 상태라면 동패는 이곳을 벗어나도 죽는다.

호발귀는 움직이는 대신 눈을 부릅뜨고, 핏빛이 된 눈으로 동패와 흑의 무인을 지켜봤다.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시 죽인다!’

이 순간, 호발귀는 아직도 사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당장 나갔을 것이다.

동패의 처절한 모습을 보자 오직 복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죽인다!’

귀무살을 쳐다보는 눈길에 화염이 솟구쳤다. 증오와 원한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몸은 정반대로 냉철해졌다.

상황을 정확하게 읽고, 얼음처럼 차게 판단했다.

저들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없다.

자신이 눈과 귀를 수련했기 때문에 안다. 십 장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다람쥐의 움직임까지 지켜볼 수 있다. 자신이 그럴 수 있는데 저들이야 오죽하겠나.

- 병주기식(屏住氣息). 망기호흡(忘記呼吸). 몽(夢), 몽중몽(夢中夢). 일층우일층적몽경(一層又一層的夢境). 허실교체지간(虛實交替之間),유인미실료(有人迷失了).

숨을 죽여라. 호흡을 잊어라.

꿈, 꿈속의 꿈.

한층 한층, 꿈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꿈과 현실이 뒤바뀔 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수 짓을 하는 데도 무리(武理)가 있다.

손을 쓰기 전, 마음은 극고의 평안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 오직 상대와 나만 존재한다.

그 속에서 가장 평안한 마음으로 손을 뻗어낸다.

무인은 살기를 눈치챈다. 움직임도 알아챈다. 손끝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까지도 감지한다.

손놀림 속에 편안함, 안온함, 그윽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런 손을 얻으려고 들로 나갔다.

잠자리를 잡아라. 파리를 잡아라.모기를 잡아라. 개구리를 잡아라.물고기를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손에 편안함을 담으면 어떤 곤충도 잡을 수 있다.

잠자리, 파리, 모기 등등 모두 잡을 수 있다. 날쌘 손길로 잡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평안함을 담은 손길로 잡아야 한다. 그러면 태연히 손을 뻗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이런 편안함은 배수 짓에만 쓰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숨을 죽일 때도 쓰인다. 누군가에게 쫓길 때, 이런 평안함을 유지한 채 고요히 머물면 십중십(十中十) 찾아내지 못한다.

상상재몽(常常在夢)!

항상 꿈속에 머문다.

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홍수에 떠밀려가기도 하고, 칼에 찔리기도 하고, 돼지들과 함께 어울려서 노래 부르고 춤도 춘다. 용을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어떤 때는 그게 꿈임을 알면서도 깨지 않고 즐긴다.

그러나 눈을 뜨면 모두 꿈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평안해진다.

몽중몽(夢中夢)!

꿈속에서 꿈을 꾼다.

그는 나무 위에서 누에 꼬치처럼 몸을 돌돌 말았다. 육신의 기능을 죽이고, 꿈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잠을 잘 수도 있고, 고민거리를 생각할 수도 있는 깊은 휴식 상태가 되었다.

* * *

“없어.”

“이쪽도 없어.”

“오지 않은 것 같은데?”

“골치 아픈 놈이군. 쉽게 끝날 줄 알았더니.”

“일이 꼬이는 거 같지 않아?”

“그래봤자 황수는 못 건너가.”

“이놈은 태워버려야겠어.”

동패는 죽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어이 이리 끈질긴고.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팔까지 잘렸으면서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

흑의 무인이 동패를 질질 끌고 가서 산신각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화르륵! 화악!

산신각에 불이 붙는다.

- 으음……!

옅은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동패가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소리다.

목청껏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미약한 신음만 흘린 채 생명이 끊어졌다.

“여기 없는 거 확실하지?”

“확실해. 기척이 안 잡혀.”

“나도 마찬가지. 잡히지 않아.”

“가자.”

쉬익! 쉬익! 쉬이잇!

귀무살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 * *

화락! 툭! 툭! 화락! 툭!

맹렬하게 일어났던 불이 잦아들었다.

폐각이었지만 그래도 형태가 멀쩡했던 산신각이 새카맣게 타서 재만 남았다.

큰불은 사라졌고, 작은 불씨만 남아서 검게 그을린 나무를 태운다.

‘이놈들!’

호발귀는 분노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사람을 이런 식으로 죽일 수 있나!

혈마록이 천고절금의 보물이라고 해도 사람 목숨을 이렇게 끊을 수는 없다.

산 사람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 그런 상태로 걷게 했다. 그리고 장난이라도 치듯이 팔을 잘랐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너희가 누구이건…… 용서하지 않는다!’

호발귀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상에만 젖어있지도 않았다.

호발귀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복수는 나중 문제다. 우선은 탈출부터 해야 한다.

‘황수는 건너가지 못해.’

황수로 갈 것을 예측한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안에서 숨어야 한다.

저들이 훑고 지나간 곳, 바로 이곳이다. 동패가 죽은 자리가 가장 안전한 피신처다.

호발귀는 아직도 작은 불길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산신각으로 걸어갔다.

동패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불에 타서 재만 남았다. 잘 찾아보면 타다남은 뼈가 있을 것이다. 재를 치우고 나면 뼛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복수는 꼭 해줄 생각인데, 솔직히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너무 강한 놈들이라서 기가 질리네. 잘 가라.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 미안.’

호발귀는 불길 소리가 꼭 동패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놈들이 어떤 짓을 했기에 그토록 처참한 몰골이 되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을까. 산신각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런 고통을 받고 있었다니.

‘혈천방 귀무살! 너흰 내 손에 죽는다!’

호발귀의 눈에 살광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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