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죽음이 더해지니(4)
동패는 강하를 빠져나와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아저씨가 저렇게 다급한 걸 보면 잘못 건드린 건 확실한데, 도대체 물건이 뭐야?’
호발귀가 훔친 게 무엇일까?
웬만큼 값나가는 보물이라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도주하지는 않는다. 한두 달 정도 숨어있으면 어느새 잊힌다. 손님은 강하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날수수는 잡히면 죽는다고 했다.
그건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지경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왕소가 죽었다.
그는 경사가 급한 산길을 쳐다보았다.
다른 때 같으면 이 길을 타고 걸어간다. 하지만 지금은 왕소까지 죽었다. 조금 멀더라도 반대쪽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가 정상 쪽에서 접근하는 게 좋겠다.
‘그래 오늘은 조금 돌아가자.’
* * *
슈웃! 슛! 슈우우우웃!
사람들이 날다람쥐처럼 민첩하게 움직인다.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건너뛰는 몸놀림이 무척 아름답다. 빠르고, 정확하고, 우아하다. 이렇게 빠른 신법을 본 적이 없다. 너무나 완벽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
호발귀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면서도 감탄을 쏟아냈다.
저들이 펼친 무공은 정말 놀랍다.자신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배수는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은신술과 신법만큼은 부지런히 수련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어떤 자에게도 들키지 않고 숨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저들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이다.
사부가 왜 저들을 만나면 죽는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비밀 은거지, 산신각에 낯선 무인들이 나타났다. 이건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
저들이 산신각을 찾아온 것은 놀랍지 않다. 강하 배수 놈 중에는 산신각을 아는 놈들이 몇 놈 있다. 그놈들이 쫑알거렸다면 은신처는 쉽게 드러난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저들이 왜 이곳에 왔냐는 거다.
저들이 산신각에 오기까지는 몇 가지 단계가 있어야 한다.
강하 배수를 추궁해서 산신각을 알아냈다. 왜? 자신을 찾기 위해서다. 왜 자신을 찾나? 찾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귀무살이 어떤 이유로 찾나? 혈마록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왜 혈마록을 자신에게서 찾나? 네가 훔쳐 갔잖아!
그렇다. 제일 먼저 호발귀라는 자가 혈마록을 가로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한다.
‘어떻게 들켰지?’
감쪽같이 봇짐을 낚아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날수수는 만난 다음에는 왕소나 동패도 만나지 않고 곧장 산신각으로 왔다.
봇짐을 낚아챈 순간부터 산신각에 오기까지 만난 사람이라고는 사부밖에 없다.
도무지 발각될 상황이 아닌데 발각되었다.
‘독림에서 천살단 비자를 죽인 놈들이야. 도끼! 맞아! 그놈들이야. 제길! 더럽게 빨리 왔네. 발각되더라도 몇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거 정말 죽을 운명인가?’
귀무살이 거침없이 산신각 안으로 들어갔다.
산신각을 노리고 온 것이 틀림없다. 노리는 대상은 틀림없이 자신이다.
산신각은 호굴이 되었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냥 빠져나갈 수는 없다.왕소와 동패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항상 그랬으니까.
‘일단, 산에서 내려가자!’
길목, 으슥한 곳에 숨어있다가 두 놈이 오면 즉시 낚아챈다. 그리고 저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은밀히 도주한다.
살 방법은 이것뿐이다.
‘앗!’
호발귀는 불현듯 봇짐 속에 집게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귀무살이 어떻게 알았는지 고민하다 보니 불현듯 살모사 머리를 짓눌러 놓은 집게가 떠올랐다.
옛날에는 자주 썼지만, 요즘은 쓰지 않는 도구다.
집게는 필요 없어서 버리려다가 독충 집는데 딱 좋아서 독림갈 때만 챙겨서 다녔다.
집게가 봇짐 속에 들어있었다.
세상에 집게는 많지만, 배수들이 사용하는 집게는 가늘고 길며, 끝부분이 넓적하다.
조금 특이한 모습이라서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런 실수를! 아!’
호발귀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독림에 나타났던 개의 주인은 죽었다.
개는 천살단에서 기르던 것이다. 죽은 자가 자신의 봇짐을 개에게 매줬다. 그러니 찾아왔어도 귀무살이 아니라 천살단 비자가 찾아왔어야 한다.
귀무살이 찾아왔다는 것은 개 주인도 귀무살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뜻이다.
봇짐이 귀무살에게 넘겨졌다.
귀무살은 봇짐에서 왕지네며, 전갈이며 온갖 독충들을 보다가 집게를 봤을 터이다.
집게를 발견하고 수소문했다. 그러자 배수 짓인 게 드러났다. 집게 주인이 누군지도 알아버렸다. 그래서 바로 쫓아왔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나? 두 가지로 생각해 보자.
혈마록을 두 손으로 받치고 용서를 빌면 어떨까?
혈마록은 당연히 가져갈 것이고, 자신은?
‘죽인다!’
생각할 것도 없다. 천살단 비자 같으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귀무살은 즉시 죽인다.
그러면 이대로 도주하면 어떻게 되나?
저들은 산신각에 잠시 머물다가 곧 사방팔방으로 찾아 나설 것이다.
아니, 조금 있으면 왕소와 동패가 온다. 그러면 그놈들부터 닦달할 것이다. 죽일 것이다. 사부를 찾아가서 제자를 내놓으라고 추궁할 것이다. 그리고 또 죽인다.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사부가 무조건 도주하라는 말을 했을 때, ‘그럴 필요까지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표정을 굳히고 혈마록에 대해서 말할 때도 사태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다. 큰일에 휘말렸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죽기까지야 하겠냐는 생각이 컸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흥분되었다.
사부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이것이 꿈인가 싶기도 했다.
강하는 너무 심심하다. 너무 좁다.
혈마록 때문에 진짜 고수가 나타난다면 신명 나게 놀아볼 생각이다.
사부는 오래 도망 다닐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추격자쯤은 얼마든지 따돌린다. 그런데 왜 도망가? 같이 놀아도 되는데?
마지막에 사부는 집어따기 수법들이 적힌 책을 주었다.
그렇게 가르쳐 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몽둥이만 들던 사람이 확 변해서 책을 주었다.
공공문(空空門)의 진공(眞功)인 공공비수(空空秘手)!
오직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만 후인에게 전수되는 일인비전(一人祕傳), 비공(秘功)!
사부는 죽음을 생각한다.
그때에서 이건 정말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무살의 무공을 보니 기가 죽는다.
이들은 차원이 다른 무공을 구사한다. 자신 따위가 이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일 것이다.
사부가 옳았다.
“후후!”
호발귀는 허탈하게 웃었다.
저들은 피하지 못한다. 혈천방은 중원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혈천방을 피하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 중 누가 혈천방도인지 모른다.
‘결국은 잡힌다는 거지. 아는 사람을 모두 죽인 끝에.’
방법이 없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물건 훔친 놈이 뒷정리도 해야 한다.
호발귀는 몸을 돌렸다.
관도까지 내려가서 왕소와 동패를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바로 산에 올라가련다. 귀무살에게 혈마록을 주고, 목숨까지 맡긴다. 죽인다면 죽는 것이고.
뚜벅! 뚜벅!
그는 빠르게 달려내려 왔던 산길을 다시 올라갔다.
* * *
“휴우!”
숨이 턱에까지 차서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이 쏟아졌다.
드디어 산 정상에 올라왔다.
그는 산 중턱에 있는 산신각(山神閣)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배수 짓은 특성상 언젠가는 일이 터진다.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가만히 있겠나. 난리굿을 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배수 짓이 걸리지는 않는다.
강하에는 손님에게 동조하는 사람도 없다. 소리를 지를수록 손님만 바보가 된다.
하지만 간혹, 아주 가끔 지금처럼 일이 급해질 때가 있다.
손님이 배수 짓을 알게 되면, 연관된 놈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달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잠시 몸을 피할 곳이 필요하다. 저곳 산신각이 그런 장소다.
강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깊은 산에 있어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 오랫동안 버려둔 상태라서 거의 폐각(廢閣)이나 다름없다.
호발귀는 저곳에 와있을 것이다.
날수수가 호발귀를 도주시켰다고 했을 때, 당장 산신각이 생각났다.
호발귀는 언제든 혼자 도주하는 법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항상 이곳에 먼저와 있는다. 자신에게 일이 터져도 이곳에 와있고, 왕소나 동패에게 일이 생겨도 이곳으로 온다.
‘도대체 뭘 훔친 거야. 왕소 목숨값이다, 이놈아! 쓸데없는 거면 넌 죽을 줄 알아!’
동패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산신각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 * *
‘엇! 안 돼!’
호발귀는 신음을 흘렸다.
동패가 나타났다. 한데 평소에 다니던 길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산 정상에서 내려온다.
제 딴에는 은밀히 움직인다고 길도 바꾼 것 같다.
“이런 바보!”
호발귀는 즉시 맹렬하게 달려 올라갔다.
귀무살 눈에 띄면 누구든 죽는다.
자신은 혈마록을 손댔으니 죽는다지만, 동패는 아무 짓도 안 했다. 죽을 이유가 털끝만치도 없다.하지만 인간 백정 귀무살이 동패를 살려줄 리 없다.
호발귀는 고함도 지르지 못했다.
고함을 지르면 동패보다 귀무살이 먼저 듣는다.
그들은 호발귀와 동패를 동시에 쳐다본다. 그리고 양쪽으로 쫓을 것이다.
동패가 산 밑에서 달려 올라가는 자신을 봐야만 한다.
그런데 동패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오직 산신각만 보고 달렸다.
동패는 눈치가 무척 빠르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치가 없다.
‘저런 바보!’
동패는 호발귀가 일으킨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안 돼! 바보야, 내려오지 마!’
호발귀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제발 내려오지 마. 멈춰! 차라리 산신각을 지나쳐서 계속 내려와. 절대 들어가지 마!
동패는 그의 말 없는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산길을 내려왔다.
애가 탄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귀무살, 저들은 진짜다. 어설프게 어깨에 힘만 들어간 무인이 아니다. 냉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진짜 살귀다.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독림에서 똑똑히 봤다.
슷!
산신각을 향해 내려오던 동패 뒤로 흑의 무인이 내려섰다.
‘아!’
호발귀는 탄식했다.
동패가 걸려들었다. 귀무살이 뒤를 잡았다.
동패는 그런 줄도 모르고 냅다 내려오기만 한다. 아마도 산신각에 자신이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 바보! 안 된다니까!’
동패는 호발귀의 간절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동패가 산신각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핀다.
이미 늦었다. 저런 행동을 하면 당장 의심받는다.
타타타타탁! 타타탁!
호발귀는 산신각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동패라도 구해야 한다. 자신이 나타나서 책을 주고 사정을 해볼 생각이다. 그래도 동패가 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늦었다.
덜컹!
산신각 문이 안에서 열렸다.
동패를 낚아챈 사람은 등 뒤로 내려선 귀무살이다. 그가 동패를 떠밀어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덜컹!
산신각 문이 다시 닫혔다.
호발귀는 두 발이 얼어붙었다.
“어! 어!”
입에서는 연신 신음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