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죽음이 더해지니(3)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했다.
호발귀와 연관 있는 자들을 강하에서 모두 빼내야 한다. 혈마록을 탈취한 것이 발각될지, 아니면 슬그머니 묻힐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자중하는 게 좋다.
동패, 왕소, 와주(窩主:장물아비)!
그들 모두 위험하다.
그래서 즉시 달려왔다.
제일 먼저 장선루부터 달려왔다.
호발귀가 왕소, 동패를 이끌고 장선루에서 수작질 부리는 것을 알고 있다.
호발귀가 없어도 왕소, 동패는 장선루를 배회한다.
날수수는 장선루 안으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경고를 해주기에 앞서서 현재 어떤 상태인지 상황부터 살폈다.
왕소가 담벼락을 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미친놈이! 지금이 어느 판국인데 배수 짓을 하려고!’
날수수는 즉시 뛰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웃!”
날수수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까지 토해졌다.
지붕 위에 흑의 무복을 입은 무인 다섯 명이 나타났다.
그들 신법이 무척 매끄럽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표범처럼 빠르다. 신형이 안개처럼 흐릿하기도 하고, 유령처럼 흔들리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으면서도 번개처럼 빠르다.
“가, 가만! 저건 유혼보(幽魂步)!”
날수수는 정말 놀랐다.
혈천방에는 마맥(魔脈)을 보호하는 수호 귀신들이 있다.
혈천방도는 수호 귀신을 족령(族靈)이라고 부르지만, 중원 무림은 귀무살이라고 부른다.
혈천방은 전쟁터나 전염병이 만연한 지역에서 고아가 된 동자(童子), 동녀(童女)를 구한다.
백 명이 한 집단으로 묶여서 이십 년간 수련한다.
이십 년째 되는 해에는 사망대장정(死亡大長征), ‘죽음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오천리 살육전을 치른다.
몽골 사막에서 북해(北海)에 이르는 죽음의 길!
장장 오천리에 이르는 먼길을 다녀오면서 같이 수련했던 동료들을 죽인다.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이 죽고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아야 한다. 대장정이 끝나기 전에 다른 자를 모두 죽였다고 해도 북해는 다녀와야 한다.
북해가 주는 극한의 추위를 견뎌내야만 한다.
이로써 이십 년간 인연을 맺었던 모든 벗이 사라진다. 혈천방에서도 수뇌 몇 명만 아는, 하지만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귀신이 탄생한다.
귀무살 다섯 명이 나타났다는 말은 사백구십오 명을 죽인 자들이 나타났다는 말이 된다.
이들은 혈천방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목숨? 목숨을 내놓는 것은 우습다. 부모·형제를 죽이라고 해도 가차 없이 죽인다.
혈마가 난리를 피울 때, 혈마가 주는 공포도 대단했지만, 귀무살이 펼친 살겁도 만만치 않았다.
‘유혼보! 귀무살의 독문신법!’
날수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장담하건대 강하에서 귀무살을 당해낼 사람은 없다.
강하에는 살인, 강간, 방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마들이 득실거린다. 한결같이 죽음을 우습게 아는 놈들이다. 하지만 귀무살에게는 어림도 없다.
‘이럴 줄 알았어. 혈마록이 나타났으니 귀무살이 나타나는 건 당연하지. 아!’
날수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직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경고를 해주려고 달려왔는데, 너무 늦었다. 왕소가 담을 따라간다는 것은 배수 짓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왕소는 모르겠지만, 이미 혈겁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발귀 같으면 저런 꼴 보고 못 참는다.
당장 달려가서 왕소를 낚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서 도주했겠지.
호발귀의 신법은 상당한 수준이다.
답설무흔(踏雪無痕),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초상비(草上飛), 풀을 밟고 건너뛸 만큼 몸이 가볍다. 쾌마가신(快馬加身), 명마처럼 빠르다.
놈이 무인들을 겁내지 않고 배수 짓을 하는 것도 그런 보법이 있기 때문이다.
날수수는 그러지 못한다.
뒷무릎 음곡혈(陰谷穴)과 종아리 축빈혈(築賓穴)을 다쳐서 신법이 매우 둔하다.
설혹, 다리가 멀쩡해도 지금은 너무 늦었다.
‘하! 그놈의 자식! 독약도 아주 상독약에 손을 댔어. 이제 어쩌냐? 너 어떡해, 이놈아.’
왕소가 귀무살에게 잡혀서 끌려들어 갔다.
당연한 결과다. 귀무살이 지켜보는 앞에서 배수 짓을 했는데, 잡히지 않으면 기적이지.
그리고 잠시 후, 전각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매캐한 냄새 속에는 인(燐) 냄새도 섞여 나왔다.
시신을 아예 잿더미로 만들 생각이다. 뼈 한 조각 남지 않고 새카맣게 타버릴 것이다.
스읏! 슷!
귀무살이 속속 불붙은 전각에서 나왔다. 하지만 투숙객과 왕소는 나오지 못했다.
날수수는 미간을 깊이 찡그린 채 펴지 못했다.
‘귀무살에게 걸렸으니…… 휴우! 심성은 착한 놈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흘렀다면 이제 비급을 돌려준다고 해도 좋게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혈마록에 간여한 사람은 누가 되었든 죽일 생각이다.
이번 일에 관여한 사람들 모두 죽는다.
왕소가 첫 번째 희생자다.
날수수는 왕소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기를 바랐다. 그래야 빨리 죽는다.
하지만 미련한 왕소는 입을 꾹 다물었을 것이다.
호발귀 패거리는 그렇다.
세상에 버림받은 떨거지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와서인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다.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음 사람은 누군가?
저들이 강하 제일의 배수를 노린다면 다음 목표는 당연히 호발귀다. 왕소가 입을 다물고 죽었다면 배수를 의심하지 않겠지만, 거짓말을 했다면 더욱 의심이 짙어진다.
호발귀 다음으로 노릴 사람은 동패와 장물아비인 노야(老爺), 그리고 호발귀의 사부인 자신이다.
모두 죽는다. 잘못된 물건을 훔친 대가가 아주 처절하다.
‘미련한 놈. 잘 보고 쌔비랬더니, 뭘 본 거야!’
깡마른 노인, 날수수는 어둠 속에서 불타는 전각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느닷없이 날수수가 나타났다.
“어! 아저씨?”
동패가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날수수는 성격이 괴팍하고 사납다. 하지만 호발귀 사부다. 또 숨은 정이 많다.
날수수는 무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 강하 같은 곳으로 왔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무인이 강하로 흘러들었을 때는 뻔하지 않나. 용서받지 못할 살인 같은 것을 저질렀겠지.
날수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지금 즉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빠져나가.”
“네?”
“호발귀 그놈이 독약을 먹었다. 내 그놈은 멀리 쫓아버렸고, 혹시나 해서 네놈들도 자중시키려고 왔는데, 벌써 왕소가 죽었다.”
“와, 왕소가 죽어요? 그럼 그…… 그놈들이!”
“그놈들, 네놈들은 상종하지 못할 저승사자야. 까불지 말고 빨리 달아나!”
동패는 왕소가 죽었다는 말에 파랗게 질렸다.
호발귀가 독약을 먹었고, 왕소가 죽어? 날수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도망가라고 말해?
이게 무슨 일이야? 겨우 은자 몇 푼 훔쳤다고 왕소가 죽어? 아니, 호발귀가 독약을 먹어? 뭘 손댄 거야? 그러고 보니 그놈 왜 안 보이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온갖 의문이 한꺼번에 확 터져 나왔다.
“이건 여비!”
날수수가 전낭을 던져주었다.
동패는 날아온 전낭을 열어보지도 않고 품에 찔러 넣었다.
“아저씨, 왕소패가 죽었다니 무슨 말이에요? 왕소가 왜 죽어요?”
동패는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날수수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놈아, 오늘 죽을 놈들 많아! 뒈지기 싫으면 빨리 튀어! 난 먼저 간다!”
쉬이잇!
날수수가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신법을 사용해서 사라져갔다.
동패도 즉시 움직였다.
‘호발귀가 상한 물건을 건드린 것 같은데…… 뭘 건드린 거야? 왕소가 죽어?’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면 무인에게 뒷목을 잡혀서 개 끌리듯 끌려들어 간 것이 왕소의 마지막 모습이었나?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놈인데.
* * *
강하는 작은 촌락이 아니다. 도망자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기 때문에 촌락이라고 부를 뿐, 사실은 인구가 사천 명이 넘는 제법 큰 도읍이다.
“귀찮게 생겼군.”
쌍부가 중얼거렸다.
사천 명 중의 한 명을 찾는 일이 되었다. 더욱이 놈은 배수다. 쥐새끼처럼 약은 놈이다. 눈썰미가 예리하고, 손이 빠르며, 상황판단이 기민하다.
“낙안교 밑에 움막이 있기는 한데, 텅 비었어.”
섬전이 말했다.
왕소가 낙안교라는 말을 흘렸을 때, 섬전은 벌써 낙안교를 다녀왔다.
예상대로 배수 놈은 없었다.
배수가 거주한다는 움막은 비워놓은 지 오래된 듯 먼지가 푸석하게 쌓여 있었다.
“이게 배수 놈들이 사용하는 게 맞는다면, 쉽게 찾을 수 있어. 강하에 배수 놈이 몇 명이나 된다고.”
무지가 집게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한두 시진 안에 집게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목적은 찾는 게 아니다. 비급을 회수해야 한다. 배수 같은 놈들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놈이 비급의 가치를 알아보고 은밀한 데 숨겨놓는 게 문제다.
배수가 독림까지 들어와서 천살단 비자로부터 비급을 탈취해간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담한 놈이다.
어쩌면 무공을 수련한 무인일 수도 있다.
무지가 말했다.
“십삼비자, 죽을 때 표정이 편했어. 우리와 마주쳤는데도 당황하지 않았고. 물론 기척을 흘려서 그런 것이지만. 아무래도 강하에 들어온 비자가 또 있는 것 같아.”
“우선 배수 놈부터 찾지. 하! 이번 일은 의외로 질기네.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질질 끄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아.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후후후!”
그들은 웃었다.
배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서라고는 집게밖에 없지만, 이거면 충분히 찾는다.
배수들은 집게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
손은 두툼하다. 얇은 옷 속으로 손을 넣으면 들키기 쉽다. 그럴 경우, 집게만 살짝 밀어 넣으면 들키지 않고 품에 있는 물건을 빼낼 수 있다.
집게는 전낭 같은 무거운 물건보다는 밀서나 전표(錢票)를 빼내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배수들이라면 집게 사용을 익히려고 애쓴다.
집게보다 면도(緬刀)가 편하다는 사람도 있는데, 집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빼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잘 봐라.”
무인이 집게를 내밀었다.
주루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배수 두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집게를 받아들었다.
“아, 이거 호발귀거네. 이것 봐, 여기가 반질반질하잖아. 이쪽으로 집게를 잡는 놈은 호발귀밖에 없어. 맞지?”
배수가 다른 자에게 집게를 넘겨주었다.
“맞아. 이거 호발귀거야. 맞습니다. 이거 호발귀겁니다. 그런데 이게 왜?”
“호발귀?”
“네. 호발귀라고, 강하에서는 알아주는 배수입죠. 한동안 집게따기를 하다가 맨손따기에 맛 들인 후에는 집게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게 왜 나리께?”
“호발귀는 어디 있나?”
“창로(昌路) 입구에서 날수수라는 놈과 함께 살고 있죠.”
“날수수. 또 다른 놈은?”
무인은 은 한 덩이를 꺼내서 술상 위에 올려놨다.
배수들의 눈가에 탐욕이 이글거렸다.
그들은 호발귀에 대해서 아는 것을 모두 말했다.
배수에게는 느낌이라는 게 있다. 호발귀가 좋지 않은 물건에 손댔다는 직감이 와락 밀려왔다.
이럴 경우, 즉각 선택해야 한다.
호발귀를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내줄 것인가. 내주면 당연히 죽을 것이고.
강하에는 호발귀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배수는 종종 시기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배수 두 명은 호발귀를 내주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모두 토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