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잘못된 물건(4)
“킥킥! 한 건 했냐?”
호발귀가 낯선 봇짐을 들고 들어서자, 날수수가 입을 쩍 벌리면서 좋아했다.
노인은 이름 대신 날수수(捋掱手)라고 불린다.
날수수라는 말 그대로 집어따기 수법만은 그야말로 신의 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들바람이 살갗을 스치듯 부드럽게 스쳐 간다.
그것으로 끝! 어느새 다른 사람 품에 있던 전낭이 노인 품속으로 옮겨져 있다.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실패한 적이 없다는 말은 허풍이겠지만, 정말로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갈 솜씨다.
“별 것 없어. 책이야.”
호발귀는 봇짐을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책? 끌끌! 봇짐이 묵직해 보여서 금부처라도 가져온 줄 알았지. 책을 어디다 팔아먹냐?”
날수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오지 마.”
“왜, 인마!”
“왜? 왜라고 말하면 안 되지. 도둑놈이 다가오는데 그럼 오지 말라고 하지 오라고 해?”
“뭐, 뭐! 노오오옴? 너 방금 놈이라고 했냐?”
“아! 놈은 빼고. 그냥 도둑.”
“이놈아! 내가 왜 도둑이야! 수수지! 내 평생 도둑질은 한 번도 안 해 봤다!”
“아, 네네네네.”
호발귀는 봇짐을 얼른 등 뒤로 감췄다.
날수수가 다가오면 한두 권 사라지는 것은 기본이다. 어떤 때는 양심도 없이 절반 넘게 슬쩍 해간다.
“걱정하지 마라, 인마! 그까짓 종이 뭉치, 줘도 안 갖는다.”
날수수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앉았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봇짐에 붙박여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상담할 게 있는데.”
“그렇지!”
날수수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짝 다가와 앉았다.
“아무래도 이거, 상한 물건 같아.”
“상한…… 물건? 책이?”
“응. 책이.”
“네 놈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뭘. 언제 뭐 하나 똑 부러지게 한 게 있어야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날수수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호발귀는 독림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죽은 자에게서 봇짐을 가로챘고, 봇짐에 개에 묶여서 숲을 빠져나갔고, 누군가가 사람을 때려죽이고 등등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말했다.
“너 거기 들어가지 말랬는데 또 들어갔냐? 이게 독림에서 흘러나온 물건이야?”
날수수가 일어서서 봇짐을 향해 다가왔다.
호발귀도 막지 않았다. 원래 막지 않는다.
사부와 제자 사이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나. 늘 그렇듯이 장난 좀 쳤다.
날수수가 봇짐을 열고 책을 살펴봤다.
사실, 호발귀도 독림을 벗어나자마자 봇짐을 슬쩍 열어봤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사람을 죽이나 싶어서.
호발귀는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책에 적힌 것은 한문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글자가 아니라 지렁이가 꾸물거리는 듯한 이상한 글자다. 고어(古語)도 아니고, 파사국(波斯國) 쪽에서 사용하는 글자 같다.
촤락! 촤락!
날수수가 책을 펼쳐서 내용을 봤다. 순간,
‘응?’
호발귀는 눈빛을 반짝 빛냈다.
날수수가 떨고 있다.
책을 넘기는 손길이 파르르 떨린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떨리는 모습을 모두 감추지는 못했다.
‘이거 정말 잘못된 것 같은데.’
호발귀는 괜히 긴장했다.
지금까지 상한 물건을 몇 번 가져온 적이 있지만, 날수수가 떠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음 행동은 더 수상하다.
날수수가 급히 창가로 가더니 바깥 동정을 살폈다. 슬쩍 훑어본 게 아니라 예민하게 구석구석을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날수수가 이토록 긴장할 정도라면 확실히 일이 틀어졌다. 독림에서 죽은 사람들, 괜히 죽은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든 자신에게 몰아칠 수 있다.
‘도대체 저 책이 뭐야?’
호발귀는 곤혹스러움과 궁금함을 같이 느꼈다.
글을 꽤 많이 아는 편인데, 훔친 책에 적힌 글자를 읽지 못한다.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는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종이다. 책이 누렇게 바래서 상당히 오래됐다는 것도 알겠다.
낯선 글을 접하는 게 이렇게 곤혹스러운 거구나.
가만! 떨어? 그러면 날수수는 저 글자를 알아본다는 말이잖아? 무슨 책인지 아니까 떠는 거지. 이 세상에 날수수를 떨게 만드는 책도 있었나?
생각이 복잡해져서 두서를 잡을 수 없을 때, 날수수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어왔다.
“너 이거 갖고 온 거 또 누가 알아?”
날수수가 책을 코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아무도……”
“애들한테는 말 안 했어?”
“누구한테 말해! 독림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리 왔구먼. 사람이 죽는데 정신이 있어야지.”
그러자 날수수가 책을 다시 봇짐 속에 넣었다. 그리고 봇짐을 묶지도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던져주며 말했다.
“넌 이 길로 몸을 빼.”
“몸을 빼? 강하(江下)를 떠나라는 말이야?”
“그래. 당장!”
“쳇! 뭔가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고나 튀자고. 도대체 뭔데 그래!”
그는 책 보따리를 탁자 위에 다시 놓았다.
날수수가 보따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뭔지 알아?”
“알면 내가 묻겠냐고! 이거 어디 글자야? 처음 보는 글자구먼. 낙서 아냐?”
“하!”
날수수가 기가 막힌 듯 호발귀를 쳐다봤다.
“야 이놈아! 배수는 손을 쓰기 전에 눈깔부터 잘 닦아야 해. 손 쓰는 것은 나중이고, 눈깔이 먼저야. 무턱대고 손만 쓸래! 돈 되는 걸 낚아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호발귀는 과거를 봤다면 급제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
고지력(古紙曆), 옛날 종이를 연구한 책이다.
전천(錢天), ‘동전의 세상’이라고 제목은 거창하지만, 별거 없다. 돈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그가 읽은 책은 모두 이런 종류다.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할 수 있어야 하고, 얼마나 귀한 것인지 판단해야 하고, 가짜를 진짜처럼 속이는 방법 등등 물건을 감정할 때 필요한 지식이 총망라되었다.
그 정도로 안목을 넓혔다면 본인 스스로 책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나름대로는 판단했다.
책 표지가 낙타 가죽이다. 글씨는 범어(梵語)로 추정된다.
웬만한 범어는 호발귀도 안다. 하지만 책에 쓰인 범어는 너무 오래되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낙타 가죽과 범어……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낙타는 서방이나 북방에서 기르는데, 범어는 남방이다. 천축 사람이 서방이나 북방으로 여행 가서 만들었나?
판단 자료는 또 있다.
글씨에 사용된 먹이 종이에 찰싹 감겼다. 단단하게 달라붙은 게 아니라 휘영청 감겼다.
옛날 먹이다.
보통 먹은 소나무를 태워서 얻은 그을음과 민어 부레에서 나온 아교를 섞어서 만드는데, 책에 사용한 먹은 동갈민어의 아교를 사용했다. 그래서 무르다.
당먹[唐墨]이다.
책은 최소한 육칠백 년 전에 작성된 고서(古書)다.
현재 가치만 따져도 상당히 귀한 물건이다. 하지만 책에 적힌 글씨를 해독하면, 그래서 불경 초기본이라고 판정되면 값어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있다.
호발귀가 알아낸 것은 이게 전부다.
날수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책 아무래도 혈마록 같다.”
“혈마록? 혈마록이 뭔데?”
“혈마도 몰라, 이놈아! 혈마!”
“아! 그 혈마! 그 혈마가 왜? 어! 어어!”
혈마를 생각하자 갑자기 생각이 쫘악 비약된다.
날수수가 방금 ‘혈마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백 년 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살인마, 지옥에서 온 악마, 혈마를 거론했다.
그럼 이 책들이? 혈마가 남긴 유물?
[이백 년 전, 혈마는 중원 칠 할을 피로 물들였다. 중원 땅 칠 할을 정복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공비급은 얼마나 많이 수집했겠으며, 보물은 또 얼마나 많이 약탈했겠나.
그러면 혈마록은 혈마의 무공이 담긴 책일 수 있다. 무공비급!
혈마록은 혈마의 재산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는 지도일 수 있다. 장보도(藏寶圖)!
혈마록은 지옥의 악귀들을 끌어내는 방법이…… 아니, 이건 아니지.
날수수가 말했다.
“혈천방에서 혈마록을 찾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서 나타난 거야, 재수 없게. 이제 알겠냐? 이 책이 사람 눈에 띄면 네 목숨은 끝난 거야. 알았어?”
“이젠 나도 알겠어! 하! 이게 되게 겁나네. 그런데 이게 혈천방 물건인 건 확실해?”
“인마! 혈마가 혈천방 사조(師祖)야! 혈천방을 만든 사람이라고! 왜? 이제야 뒈졌다는 게 실감이 나냐? 아무거나 겁 없이 손댈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호발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중원 사람이 어떻게 혈천방을 모를까. 혈천방 눈 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데.
호발귀가 급히 말했다.
“그럼 혈천방 놈들에게 죽은 놈들은 누군지 짐작돼?”
“천살단에 십육비자라고 있어. 은신술이 뛰어나서 침투나 정보수집에 동원되는 자들인데, 아마도 걔들인 것 같아. 혈마록을 훔치려면 걔들 정도는 움직여야지.”
“하아!”
호발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예상보다 훨씬 크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살인집단이다. 무공 수련이 목적이 아니라 살인이 목적이다. 혈천방은 천살단을, 천살단을 혈천방을 없애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혈천방이 천하를 피로 물들였고, 천살단은 혈천방을 막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지만, 지금은 그저 서로를 죽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이번에는 정말로 칼날을 꽉 잡고 말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칼이 손을 찢고, 살을 벨 것이다.
“그래서? 그럼 이게 뭐야? 비급이야, 장보도야?”
“그걸 난들 아냐!”
날수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거 혈마록이라며? 혈마가 남긴 거!”
“혈마록도 맞고, 혈천방이 사조 물건을 찾은 건 맞는데, 이게 뭔지는 아무도 몰라.”
“에이, 혈천방도 모를까.”
“인마! 알면 그냥 내버려 뒀겠냐! 이 글자는 고대 범어라서 해독이 거의 불가능해.”
그건 호발귀도 인정한다.
글자가 고대 범어라는 것도 대충 짐작했다.
혈마는 [이백여 년 전 사람이다. 그 당시의 글로 써도 [옛글에 속한다. 한데 혈마는 당시의 글로도 쓰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이미 사라진 고대 범어로 썼다. [아니, 이미 멸망해버린 미지의 섬 쵸파 섬 원주님 문자로 추정된다.
아예 읽지 말라는 거다.
그럼 책은 왜 남겨? 읽지 못할 글로 책을 남겨놓고 누구 복창 터트리려고 했나?
날수수가 말했다.
“이걸 해독할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지.”
“이굉(李宏)?”
호발귀는 학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석내각대학사(首席內閣大學士)의 이름을 거론했다.
온 세상 사람이 이굉을 안다. 승상(丞相)은 몰라도 대학사 중 으뜸인 이굉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굉은 머릿속에 똥만 들었고. 글만 잘 외워서 뭐 해? 써먹을 줄 알아야지.”
“그럼 누가 해독할 수 있는데?”
“등여산(鄧茹珊).”
“등여산? 등여산이 누구야?”
호발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등여산이라는 사람은 처음 듣는다. 정말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천살단 책사(策士).”
“처, 천살단. 책사? 아! 제기…… 이젠 난 어떡하냐?”
호발귀가 한숨을 토해냈다.
천살단에서 혈마록을 해독할 수 있다면, 천살단 역시 혈천방 못지않게 그를 쫓아올 것이다.
“무조건 숨어. 아주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숨어. 그렇다고 오래 숨어있을 생각은 하지 마라. 혈천방 놈들 이거 찾으려고 온 세상을 뒤질 거야.”
“이건 어떡할까?”
호발귀는 책들을 가리켰다.
“잘 숨겨놔. 그걸 잘 이용하면 목숨만은 구할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태워버리는 게 어때? 태워버리고 시치미 뚝 떼면 누가 알아? 본 사람도 없는데.”
“이놈이 대가리에 똥만 들었나! 넌 아직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지? 그러니까 멍청한 거야. 이것들, 절대 없애지 마라. 숨겨놓기만 해. 뭔가 협상 거리가 있어야 타협이라도 하지. 이게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제길! 겁 되게 주네. 너무 겁주지 마. 별 것도 아니면서.”
“별 것 아냐? 이놈이 그래도! 혈마록 같은 요물이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만, 넌 이제 태풍의 핵이야. 많이 걸려야 보름? 그쯤이면 누군가가 네 목에 칼을 들이댈 거다.”
“아무래도 난 지금 없애는 게……”
“멍청한 놈. 절대 없애지 말라고 했잖아! 사람 말을 코로 듣냐, 귀로 듣냐! 이게 협상 거리라고!”
날수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건……”
날수수가 책 한 권과 전낭 하나를 건넸다.
“이건 네놈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하던 집어따기 수법들이다. 필요 없겠지만, 후딱 보고 태워버려! 그리고 이건 그동안 모아둔 건데…… 편히 먹고 자라고 주는 거 아냐! 탈출하는 데 써. 너 도망자 노릇을 하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 줄 알아? 돈 없으면 도망도 못 친다. 이제 줄 거 없어. 가!”
날수수가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