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잘못된 물건(2)
사내들이 걸어왔다.
검은색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푸른 풀밭을 거침없이 걸어서 절곡에 이르렀다.
그들이 입은 무복은 윤기 흐르는 비단으로 짜였다.
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이라서 실전용 옷이 아니라 예식용 옷처럼 보인다. 찢어지거나 긁히는 것도 염려스러워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각기 다른 병기를 지녔다.
검을 패용한 자가 두 명, 큰 도끼 두 자루를 걸머멘 자가 한 명, 기다란 언월도를 든 자가 한 명,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병기를 휴대하지 않았다.
모두 다섯 명이다.
그들은 눈 아래로 펼쳐진 협곡을 보았다.
급류가 보인다. 하얀 물살이 물거품을 일으키면서 긴 뱀처럼 꾸불꾸불 흐른다.
“후후!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고 발을 들여놓은 건가?”
사내 중 한 명이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한결같이 차가운 눈으로 급류를 쳐다볼 뿐이다.
그들 옆으로는 지평(地坪)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음한곡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은 딱 두 군데다.
한 군데는 바로 사내들이 서 있는 곳이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와 지평 땅을 밟으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음한곡 물줄기를 따라서 지하 암동(巖洞)으로 쓸려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음한곡의 물길은 폭포와 만나는 지점에서 지하 암동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계속 지하를 따라서 흐르다가 황수(黃水)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중간에 빠져나올 구멍은 없다.
일단 암동으로 빨려들면 황수에 이를 때까지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한다.
한 곳은 생로(生路), 다른 한 곳은 사로(死路)다.
사로는 막을 필요가 없고, 생로는 그들이 먼저 와서 막았다.
간자? 어디로 나갈래?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찌어찌 음한곡을 벗어났어도, 그들에게 잡힌다.
병기를 휴대하지 않은 자가 말했다.
“옛날 생각나는군. 여기서 참 고생했는데.”
“며칠?”
언월도를 들고 있는 자가 협곡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보름.”
“보름? 꽤 버텼는데? 아! 그 대가가 그거였군.”
언월도를 든 자가 맨몸 사내의 왼손을 쳐다봤다.
사내는 손가락이 없다. 왼손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잘려 나가서 뭉툭하다.
“미련하게 버텼지.”
사내가 자신의 왼손을 슬쩍 쳐다봤다.
“발가락 동상이 아니라 손가락 동상. 음한곡 빙수를 손으로 받아들였군. 이제야 빙권(氷拳)이 이해돼. 어디서 저런 권법을 수련했나 궁금했지.”
언월도를 든 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귀무살 무인들은 음한곡에서 현빙공(玄氷功)을 수련한다.
현빙공은 얼음물에서 수련하는 기공이다. 이가 덜덜 떨리는 한기를 몸 안에 가두고, 뼈와 살을 단련한다. 뼛속에 얼음을 채워 넣는다. 살 속에 한기를 집어넣는다.
열 명이 수련하면 한 명밖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죽음의 수련법이다.
음한곡의 한기는 뼈를 에인다.
멋모르고 물속에서 몸을 담그면 한 시진도 못 되어서 꽁꽁 얼어붙은 동태가 된다.
지평은 휴식처다. 음한곡에서 얼었던 몸을 잠시 녹인다.
지평을 벗어나면 흑림(黑林)이 나온다.
음한곡에서 인간 세상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숲인데, 숲이 무려 이십 리에 이른다. 굵고 큰 나무가 많고, 살인적인 가시넝쿨이 많아서 사람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흑림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원시림이다.
더욱이 흑림에는 독초(毒草)가 난무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독초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폐부를 침식한다. 살을 할퀴고, 피를 팔팔 끓어오르게 만든다.
흑림이 아니라 독림(毒林)이라는 편이 맞다.
하지만 독림이라는 말보다 흑림이라는 말이 먼저 생겼다. 큰 나무가 햇볕을 가려서 숲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횃불을 들어야 할 정도로 어둡다.
여기까지가 귀무살의 놀이터다.
흑림을 지나면 그래도 조금 인간적인 숲이 나온다.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약초도 캐고, 사냥도 한다. 또 사람을 죽이는 처형장소로도 이용한다.
숲을 나서면 비로소 사람 사는 마을이 나타난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황수 사이에 형성된 마을들이다. 모두 열다섯 촌락에 인구수는 사천여 명에 이르고, 서로 유기적인 연락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평범한 마을은 아니다.
그렇다. 악행을 저질러서 쫓겨오거나, 아니면 적을 피해서 숨어든 질 나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다.
외부에서 흘러든 천여 명이 원래 토착민 삼천여 명을 인질로 삼고 살아간다. 정도인이나 관군, 토벌꾼이 황수를 넘으면 가차 없이 인질을 죽이겠다고 선포한 채.
하지만 그들조차도 흑림 너머에 혈천방이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다.
검을 패용한 자가 말했다.
“저놈, 저기서 기어 나오면 다리가 얼어붙을 거야. 어찌어찌 폭포를 기어올라도 여기는 벗어나지 못해. 하! 이런 일에 귀무살 다섯 명이라. 너무 많이 온 거 아냐?”
병기 없는 사내가 그 말을 바로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위아래는 있어야지? 난 십구(十九).”
“십구? 하! 어디서 뭘 하다 왔기에 십구야? 네가 왕(王). 우린 모두 구면. 난 십팔(十八). 이름은 잔살(殘殺).”
검을 패용한 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쪽은 섬전(閃電). 십이(十二). 언월도를 든 놈은 월도(月刀). 귀무살에서 언월도를 쓰는 놈이 저놈밖에 없거든. 십사(十四). 도끼를 든 놈은 쌍부(雙斧). 십삼(十三). 전에는 내가 왕이었는데, 넘겨줘야겠군. 큭큭!”
잔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무살은 대부분 초면이다. 지금처럼 임무가 떨어지면 모였다가 흩어진다.
그들은 임무 수행 숫자로 상하를 정한다.
지금 같은 경우, 임무를 십구 회 성공한 맨손 사내가 최상위 관리자다.
“난 무지(無指). 방금 봤다시피 손가락이 없어서. 좋아, 그럼 명령하지. 여기서 두 명만 치자. 죽이지는 말고 팔 하나 잘라내고 몸뚱이에 칼자국 좀 새겨놔.”
“잡지 않겠다는 거야?”
잔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도 음한곡은 함부로 들어서지 못해. 그런데 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을? 그럼 살지 못하지. 죽겠다는 소리잖아. 놈은 죽을 각오로 이곳을 선택한 거야. 그럼 훔친 것을 받아줄 놈이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놈까지 잡아야지.”
“아! 거기까지 읽은 거야? 대단하네.”
잔살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무지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놈을 도울 놈은 흑림에 있어. 여기는 잔살과 월도. 흑림은 쌍부와 섬전. 나는 만일에 대비해서 예비. 어떤 놈이 흑림에 기어들었는지 모르지만, 놓치기도 어려울 거야.”
“후후! 좋아. 이의 없어. 모두 다른 의견 없지? 그럼 우린 흑림으로 가자고.”
등에 도끼 두 자루를 맨 자, 쌍부가 섬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파앗! 파파팟!
검이 빛살보다 빠르게 날아들었다. 뜨거운 햇살보다도 검에서 터져 나온 검광이 더 눈부셨다.
‘귀무살!’
상대를 느낄 틈도 없었다.
파앗! 퍽!
왼쪽 팔에서 팔팔 끓는 쇳물이 부어진 듯 말로 표현하지 못할 뜨거움이 느껴졌다.
“아악!”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퍽퍽! 퍽!
월도가 전신을 그어댔다.
등, 다리, 어깨, 전갱이…… 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어댄다.
그는 즉시 연막탄을 꺼내 발밑에 던졌다.
쉿! 퍼억!
연막탄이 터지자, 주변이 순식간에 희뿌연 연기로 가려졌다.
그는 데굴데굴 굴렀다. 최대한 연기에 몸을 가린 채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다.
귀무살이 나타날 줄 알았다.
제일대 혈천방주의 유물로 추정되는 혈마록이 탈취당했으니, 귀무살이 투입되는 것은 당연하다.
귀무살은 음한곡, 지평, 흑림을 지배한다.
날개 달린 새가 아니라면 인간을 살육하는 귀신, 귀무살에게 잡힐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멀리 가지는 못한다.
음한곡 빙수가 지독한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지독한 정도가 아니다. 물이 곧 지옥이다. 저승에 있다는 팔한지옥(八寒地獄)도 음한곡 냉수보다 차갑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두 발이 얼어붙었다.
이런 몸으로는 흑림을 벗어나지 못한다. 흑림에 사는 독충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이익!”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엉금엉금 기어갔다.
* * *
사람이 죽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빛 한 점 들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고 죽었다.
위잉! 위잉! 위이이잉!
파리 떼가 그를 급습했다. 죽음의 냄새를 어떻게 맡았는지 파리들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몸에 달라붙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몸 주위를 맴돌 뿐이다.
죽은 자는 등에 봇짐을 메고 있다.
‘이거 뭐지?’
호발귀(扈魃晷)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안 좋은 시간에 안 좋은 장소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흑림에서는 일 년 열두 달을 묵 새겨도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이 나타나더니 죽었다. 또 기분이 싸한 게,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슬쩍 손을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먹잇감이 있는데 놓칠 수는 없지 않나. 아니다. 배수본능(扒手本能:소매치기 본능)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머리는 꼼짝하지 마, 움직이지 마, 허튼짓하지 마! 등등 온갖 충고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놈의 손이 저절로 스르륵 움직이더니 봇짐 끈을 잘라냈다.
전승수(剪繩手:끈 자르기)라는 수수법(掱手法:소매치기 수법)이다.
‘아이고! 이놈의 손모가지!’
호발귀는 전승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매고 있던 봇짐을 슬쩍 시신 손에 쥐여주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거 왜 이러지? 그래도 나름대로는 알아주는 배수인데, 왜 첫 손질 할 때처럼 심장이 뛰지?
호발귀는 숨은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느낌이 정말 안 좋다. 꼭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을 찝쩍거렸다는 느낌이 든다.
* * *
츠으으읏!
나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 은은하게 퍼져나온 연기라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도 모를 정도다.
흑연무(黑煙霧)!
간자들이 깊은 밤에 종종 사용하는 연막탄의 일종이다.
죽은 자가 연기 속에 감춰졌다. 나무도, 풀도, 시신 주위를 앵앵거리면서 날아다니는 파리 떼도 사라졌다. 대신 검은 연기만 더욱 깊게 피어났다.
스읏!
시신이 메고 있던 봇짐이 누군가에게 옮겨졌다. 순간!
쉬잇! 퍼억!
흑무를 뚫고 도끼 두 자루가 내리쳐졌다.
퍽! 우지끈!
커다란 고목이 도끼를 맞고 단숨에 잘려 나갔다. 하지만 죽은 자는 없다.
“쥐새끼 같은 놈!”
쌍부가 분한 듯 중얼거렸다.
잘린 고목 밑에 새로 만들어진 핏자국이 흥건하다. 죽은 자의 팔에서 쏟아진 피가 아니다. 이제 막 흘린 피라서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것 같다.
“멀리 가지는 못했어! 쫓아!”
쌍부가 버럭 고함질렀다.
도끼는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록 스쳤다고는 하지만 살점이 뭉텅 쓸려나가서 피가 제법 많이 흐른다.
흑연무를 사용했고, 위장포를 뒤집어쓴 상태인데 용케도 찾아냈다.
귀무살을 일컬어 지옥에서 뛰쳐나온 귀신들이라고 하는데, 딱 맞는 말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발각된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이들을 물리치거나 따돌릴 방법이 없다.
비급을 취했으니, 인내의 싸움으로 돌입한다.
땅에 흘린 핏자국은 지웠다. 눈으로 추격할 수 있는 단서는 모두 끊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귀무살은 맹견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탓인데…… 움직이는 사람은 쫓을 수 있겠지만, 죽은 사람은 쫓지 못한다.
‘후우우우웁’
그는 가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신체 기능을 점점 떨어트렸다.
죽은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