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무협, 작가 : 설봉
第一章 잘못된 물건(1)
여인은 부지런히 방을 쓸고 닦았다.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 낮잠 자는 사람이 많다. 지금 시간은 할 일도 별로 없고, 사람도 오가지 않아서 신경 쓸 일이 없다.
스읏!
여인은 재빨리 움직였다.
철궤(鐵櫃)는 침상 밑에 숨겨져 있다.
항상 자물쇠로 잠겨 있지만, 이미 두 달 전부터 열쇠를 복제해 놓았다.
그녀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 다시 한번 주위를 훑어봤다.
아무도 없다.
‘지금 해야 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혈천방(血天幫) 금일지(禁一地)에 시녀로 잠입한 지 일 년이다. 그동안 움직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늘 망설이다가 놓치곤 했다. 그래서 오늘은 처음부터 작심하고 움직였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기회는 한 번뿐이야.’
철궤 자물쇠는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다. 누군가가 열면 당장 표가 난다.
철컥!
그녀는 자물통에 자물쇠를 집어넣었다.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움직여야 한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급하게 철궤를 열었다. 순간!
슈웃!
철궤에서 무엇인가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단박에 그녀의 목을 꽉 깨물었다.
“악!”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목을 문 물체는 바닥으로 뚝 떨어지더니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독사!’
그녀를 문 검은 뱀은 이미 방안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으!”
신음이 저절로 쏟아져나왔다.
독이 지독하다. 물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손발이 덜덜 떨리고 숨이 콱콱 막혔다.
그녀는 급히 공명환(空明丸)을 꺼내서 입에 넣었다.
비상 해독용으로 가지고 다니기는 하는데, 근본적으로 해독시켜 주지는 않는다. 임시방편으로 독성을 억눌러서 발작을 늦추는 역할만 해준다.
공명환은 삼키자 향긋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혀에서 달콤한 맛도 묻어났다.
독사에게 물린 이상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그녀는 무인이 아니다. 무인이 금일지 장서고(藏書庫)에 접근하면 신분 여하,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살해된다. 그래서 무공을 배우지 않은 그녀가 잠입한 것이다.
무인이라면 진기로 독을 누르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급히 철궤 안을 들여다봤다.
‘아! 다행!’
철궤 안에는 비급(祕笈)이 무려 십여 권이나 쌓여 있었다.
비급이 없으면 어쩌나 매우 불안했는데, 있으니 다행이다. 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제 빠져나간다.
그녀는 철궤에 들어있는 비급을 모두 꺼내서 보자기로 둘둘 말았다. 그리고 다시 철궤에 자물통을 잠그고, 침상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스읏!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발각되지 않았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일 년이나 수발을 들면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종종걸음을 걸었다.
‘침착해야 해. 다급해 보이면 안 돼. 침착!’
“하아!”
여인은 힘들게 숨을 쉬었다.
한눈에 봐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침상에 축 늘어져서 눈을 살며시 감고 있다.
“지금 떠나야 합니다.”
사내가 하기 힘든 말을 했다.
여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데려가지 못합니다.”
여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데려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탁할 말이 있으면……”
“후우!”
여인이 힘들게 숨을 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천살단(天殺團)을 떠날 때, 만일에 대비해서 유서를 남겨놓았다. 그러니 천살단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그 유서가 진짜 유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내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럼.”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여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목뼈를 분질렀다.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자, 여인이 머리를 베개 속에 파묻었다.
여인이 비급을 훔친 일은 곧 발각된다.
철궤에 이상이 발견되면, 제일 먼저 장서고를 출입할 수 있는 사람부터 조사받는다.
말이 조사지 고문이다.
여인은 독에 중독되어서 곧 숨이 끊어진다. 남은 것은 고통뿐. 그 고통이라도 덜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고생했습니다.”
그는 여인의 손을 다독거렸다.
여인이 누군지 모른다. 천살단에서 보내온 간자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비급을 탈취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했을 뿐, 서로 잘 알지도 못한다.
여인이 천살단 어느 소속인지 모르지만, 임무는 충실히 수행했다.
쉬익!
그는 날다람쥐처럼 재빨리 움직였다.
억제해놨던 혈을 모두 풀어서인지 몸이 무척 가볍다. 무공 없는 하인으로 일 년가량을 살아보니, 무공이라는 것이 이토록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치민다.
타타탁! 타탁!
지붕을 박차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다. 사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붕을 밟을 때마다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했다.
‘해지기 전에 발각된다!’
일단 죽은 여인이 발견될 것이고, 여인의 상태를 보고 즉시 장서고를 살필 것이다.
천살단은 지금까지 혈마록(血魔錄) 탈취 시도를 네 번이나 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탈취에 참여했던 간자는 살이 발리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래서 탈출로를 아주 세심하게 살폈다.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점검했다.
해지기 전에 음한곡(陰寒谷)까지 가야 한다.
음한곡은 장사곡(長蛇谷)이다. 긴 뱀이 기어가듯이 협곡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양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절곡에는 깊은 물이 흐른다.
깊은 물을 헤치면서 나아간다. 그래야 맹견 추격을 피할 수 있다. 물길을 따라서 십 리 정도 나아가면 절곡 위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만난다.
거기까지만 하면 일단 몸을 숨길 수 있다.
타타탁! 타타타탁!
그는 매우 빠르게, 그리고 지극히 은밀하게 지붕을 밟으며 뛰어갔다.
컹! 컹컹! 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사내의 눈이 암울하게 젖었다.
생각보다 빨리 발각되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한 시진 정도 남았는데, 벌써 파악했다. 그렇다면 음한곡까지 가지 못한다. 이미 음한곡 주변에 경비가 깔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어. 숨거나 머뭇거리거나 모두 최악. 뚫는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무공으로 음한곡 경비 무인들을 뚫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쒜에에엑!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치달렸다.
은밀함을 포기한다. 위치가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 최상의 속도로 치달린다.
펑! 펑! 펑펑!
음한곡 쪽에서 폭죽이 솟구쳤다.
‘제길!’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경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음한곡으로 통하는 입구는 경비가 두 배로 늘었다.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음한곡은 지형이 워낙 험해서 겨우 두 배만 증원한다. 다른 곳은 경계 무인이 세 배, 네 배로 불어난다.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실 탈출 계획을 짤 때, 지금 같은 경우도 예상했다. 그래서 다른 탈출로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었다. 무조건 음한곡을 향해서 달려가야 한다.
경계망 안에 갇혔다면 죽는다.
아니, 지금도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아쉬울 게 없다. 이판사판으로 부딪쳐보는 거다.
쉬이이익!
그는 전력을 다해서 질주했다.
아! 다행이다! 아직 경계망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음한곡의 물은 무척 차다. 얼음물이다. 여름에도 물속에서 한 시진만 있으면 동상에 걸릴 정도다.
음한곡에는 물고기는 물론이고 곤충이나 벌레도 살지 않는다. 이끼도 피지 않는다. 좌우로는 발 디딜 곳도 없다. 음한곡 냉기가 절벽을 얼려서 빙벽이 되어 버렸다.
음한곡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래서일까? 폭죽이 터졌는데도 경비가 느슨하다. 무인들 간의 거리가 십여 장이나 벌어져 있다. 이 정도 간격이라면 굳이 싸우지 않아도 빠져나갈 수 있겠다.
그는 은신술, 은형비사(隱形飛蛇)를 펼쳤다.
스으으읏!
그는 구렁이처럼 부드럽게 땅을 기어갔다.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위나 나무 같은 엄폐물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에이씨! 오늘 저녁 반찬이 소고기지? 이게 뭔 지랄이야.”
“소고기는 지랄! 주먹밥이나 제때 가져다줬으면 좋겠다.”
음한곡을 지키는 경비는 태만하기까지 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음한곡으로 탈출한 간자가 없다는 사실이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다.
스으으읏!
그는 경비 무인들의 틈을 비집고 빠져나갔다.
* * *
“음한곡으로 탈출했습니다.”
차분한 음성이다.
음성만 차가운 것이 아니다. 모습도 차갑다.
낡아서 색깔이 빠진 검은색 무복을 입었고, 머리에는 헝겊을 질끈 묶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거칠게 길렀고, 머리는 다듬지 않아서 거칠게 삐져나와 있다.
용모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검만 생각한다.
사내를 보면 차갑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그다음은 무정함, 무심함이다.
모든 언행에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전혀 섞여 있지 않다.
차분함을 넘어서 냉정하다. 검을 쓸 때도 무정할 게 뻔하다. 인정이라고는 한 올도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을 찢어버릴 듯이 노려보는 두 눈에는 오직 살기만 일렁거린다.
“도망간 놈이야 잡겠지만…… 어떻게 된 거야? 천살단 간자라며? 우리 혈천방이 시장 놀이터도 아니고, 어떻게 금일지까지 들어오도록 몰랐던 거야?”
머리가 하얀 노인이 말했다.
노인? 노인이 맞나? 아니다. 머리는 하얀 백발이지만, 피부는 탱탱하다. 중년인이다. 먼저 말한 사내보다 대략 열 살 정도 많은 것 같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 정도 되는 중년인이다.
눈과 입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온화해 보인다.
먼저 말한 사내가 검객이라면, 그는 문인(文人)이다. 무공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검객이 말했다.
“신원이 확실했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금일지에 들어왔겠지.”
“……”
검객은 침묵했다.
신원조회에 구멍이 뚫렸다.
천살단 간자가 침입했다면 혈천방 문도 중 누군가가 작심하고 도와주었다는 말이 된다.
고정 간자가 있다. 지금부터 그자를 찾아야 한다. 시비와 장과(長課)라고 불리던 하인이 누구 손을 거쳐서 들어왔는지, 어떻게 해서 금일지까지 들어섰는지 하나하나 조사해나갈 것이다.
중년인이 말했다.
“음한곡으로 갔다고?”
“네.”
“음한곡은 사람이 들어갈 곳이 아닌데, 어지간히 급했군. 어쨌든 잡아 와야지?”
“귀무살(鬼霧殺)을 보냈습니다. 잡아 오겠습니다.”
“쯧! 잘 좀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중년인이 핀잔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