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근본 (1)
황극린이 비록을 읽고 향한 곳은 천화련이었다. 그곳에 아직 그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천화련을 새롭게 이끌어 갈 존재가 필요했다. 천화련주는 죽었지만, 천화련의 힘은 아직 건재했으니까.
천화련의 군사 계몽령.
그는 황극린이 천화련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을 흘렸다.
“정녕…….”
천화련은 배후에서 무림을 지배해 왔다.
그런 역사가 깨졌다는 말이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황극린이라는 어린 사내가 해낸 것이다. 그것이 무림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황극린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황극린이 안내를 받아 천화련의 심층부로 들어왔다.
“당신이 현 천화련의 책임자인가?”
“그렇소. 천화련의 군사 계몽령이오.”
계몽령은 눈이 먼 대신 감각이 몹시 뛰어났다. 후각과 청각이 특히 발달했는데, 황극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어떤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천화련주는 죽었소.”
“…….”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천화련주의 죽음은 역시나 믿을 수가 없다. 어쩌면 마경에 몸을 숨기고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천화련주가 황극린을 그냥 보내 줬을 리가 없었다. 일단 천화련주가 패배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황극린은 계몽령의 표정을 읽고, 비록을 꺼냈다. 그것을 확인한 계몽령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그건……!”
“비록에 적힌 것들을 읽어 보았소. 솔직히 놀라운 이야기가 많더군.”
“…….”
“내게 해 줄 이야기가 있소?”
계몽령은 당장이라도 졸도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 냈다.
그는 오랫동안 천화련주를 모시고, 천화련을 이끌어 왔던 군사였다. 그에겐 책임이 있다. 천화련을 지켜야 할 책임이 말이다.
“…제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한다면 천화련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모두 솔직하게 말한다면 천화련은 더 이상 건들지 않겠소.”
“예?”
무언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천화련을 건들지 않는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나 계몽령의 판단은 빨랐다.
천화련주는 그야말로 괴물이다. 천하칠대고수 전부가 한 번에 달려들어도 그에게 승리를 가져가리란 보장이 없었다. 거기다 그의 ‘마지막 수’를 알고 있는 계몽령으로선, 천화련주를 이긴 황극린에게 대항할 수단조차 없었다.
이럴 때는 괜히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적의 자비에 무릎 꿇어야 한다.
평생 강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계몽령이었기에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제가 아는 것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은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과거 무림.
아니, 무림이라 불리기도 전, 중원은 영물… 아니 신수들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그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경우도 있었고, 대부분 인간보다 강했다고 한다. 애초에 인간은 약하게 태어났다. 도구를 쓰지 않고 같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사냥당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인간의 힘은 강해졌다.
인간들은 신수들의 자비로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체계화된 내공심법은 아니었고 ‘숨 쉬는 방법’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런데도 신수라 불리는 존재들을 인간이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보다 열 배의 수명을 가지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신수들은 그를 초월하는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인간은 언제나 그들을 숭배했다고 한다. 그것이 생존의 길이었으니까.
하나, 신수들의 절대적인 무력 앞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균형이 무너진 건, 천황(天皇)의 죽음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의 멸망이었다.
“사실 이 시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실 삼황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중원인들의 시초라 불리고 있다. 고대 서적에나 짤막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이다.
“천황의 죽음 이후엔… 대지에 끝을 알 수 없는 추위가 닥쳐왔다고 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추위 말이오?”
“예, 북해의 폭풍과는 비교도 안 될 규모의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고 합니다. 신수라는 존재들이 쌓아 온 역사는 그 시절에 모두 부서지고 사라졌다고 하지요.”
황극린도 흑살문에서 신화나 역사를 배운 적이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리고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 지나 추위가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세상이 거대한 신수들이 지배하는 시대였다면… 이제는 인간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성장하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성장이라.”
“예, 인간은 무리를 짓게 되었고 건물을 짓게 되었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연의 기를 다룬다는 무공이 탄생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빙하 폭풍이 닥쳐오던 세월에 남겨졌던 과거 인간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지요.”
이게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그럴듯한 것은 사실이었다.
신수라는 존재.
황극린 또한 마경에서 발견된 거대한 생명체에게 흔히 인간들이 숭배하는 사신수 중 하나인 ‘현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사실 그런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엔 그런 괴물과 같은 것들이 존재했었다.
그런 강맹한 존재들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을까?
천황이라는 존재가 상단전을 열어 마경이 되었다면… 그들을 싹 쓸어버릴 재앙이 도래하지 않았을까? 천화련주가 마지막에 하려던 짓이 떠올랐다.
이야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의외로 과거 인간들이 남긴 내공의 ‘원리’가 담긴 서책들은 꽤 많이 발견되었고, 그것들은 현 구파일련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소림의 사조인 달마조사나 무당의 개파조사인 현현자(玄玄子) 장삼봉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미 황극린의 먼 조상인 용황신가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용황신가의 장로들의 손으로 직접 말이다.
황극린은 용황신가를 마기를 쫓는 재능을 가진 핏줄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용황신가는 정확히 말하면… 신수와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찬란한 핏줄이자… 저주받은 핏줄입니다.”
“용황신가가 저주를 타고난 것이다?”
“예, 사람마다 발현되는 정도가 달랐지만 어떤 아이들은 신수의 피를 이기지도 못하고 한 달 만에 죽기도 했다더군요.”
황극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황신가가 왜 망해 버렸을까? 황극린은 용황신가의 재능을 제대로 타고나지 못한 황보휘에게서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제대로 용황신가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어떤 부작용을 품고 있었을까?
“용황신가가 무너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저주가 세상 전체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용황신가의 위세를 강제로 꺾은 것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반발이 있었겠군.”
황극린의 예상이 맞았다.
군사 계몽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황신가는 갈라졌겠지요. 장로들의 뜻에 따라 혈육을 직접 참수하는 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에 반하여 싸우거나 도주한 이들도 있었을 테지요.”
“그럼 황씨 가문은 무엇이오?”
“련주님께 듣기로 가장 핏줄의 힘을 타고나지 못한 이들이었다고 하더군요. 방계 중의 방계라 했습니다.”
그랬던가.
그래서 황씨 가문은 용황신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중원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핏줄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내 듣기로 천화련주는 용황신가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다고 했소.”
“련주님께 들으신 겁니까?”
조금 놀란 표정의 계몽령.
“그렇소.”
“맞습니다. 솔직히 초대 천화련주께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시지 않으셨지만… 아마 초대 련주께서는 용황신가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쪽의 세력에 몸담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아한 결론이다.
반대 세력에 속해 있었다면 이해가 된다. 혈육을 죽이는 자들에 반하여 싸우고, 혈육을 지키기 위해서 천화련을 세웠다. 그렇게 보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용황신가의 저주보다 더 위험한 게 있었다면?
그렇다면 용황신가의 핏줄들을 학살하는 걸 멈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마경이로군.”
“예, 맞습니다.”
비록을 보았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마경의 존재. 그것은 어느 순간 드러났다고 했다. 얼음에 묻혀 있던 과거 인간들이 남긴 유물들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처럼.
“마경은… 그 자체로 저주를 타고납니다. 그곳에서 자란 존재들은 가볍게는 구토와 무력감을 호소했습니다. 심한 경우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극악의 병세를 경험했지요. 그러나 마경의 힘에 적응한 인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무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능을 품게 되었고, 그들은 또 다른… 용황신가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혈교와 북해빙궁이오?”
“과거엔 훨씬 더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림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천화련.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들은 중원을 구원하려 했던 구세주였다. 물론, 그 과정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마경의 힘. 신수가 남긴 잔해를 탐한 이들은 저마다의 저주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경을 모두 폐쇄하지 않았지? 천화련주가 진심으로 임했다면 중원의 마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마경이 한번 폭주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비록에 나와 있었다.
한없이 무한한 힘을 저장하는 듯해 보이는 마경에도 응당 한계가 존재한다.
그 순간이 되면 마경은 폭주한다.
“그들을 이용한 것이군.”
“예, 인간의 탐욕은… 파멸로 이끄는 힘이라도 탐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요.”
순간, 천화련주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분명 그는 겉으로 보기엔 중원의 대의를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마주한 순간의 그의 눈동자에는 인간의 세속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마기를 많이 흡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월이 지나 그의 뜻이 흐려진 걸까?
황극린이 말한다.
“회생비록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끔 만들어 놓은 도구였던 것이었군.”
“사실… 그런 셈이지요.”
처음 혈마교주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황극린이 보았던 대부분의 회생비록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유득유실의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처럼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그런 회생비록을 보고 희망을 품었다. 저주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존재라면, 그걸 온전히 해결할 방법을 남겨 놓았으리라 여긴 것이다.
혈마교도 그리고 북해빙궁도.
천화련의 의도에 놀아났을 뿐이다.
뭐,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천화련주 본인이 죽은 마당에 모든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만 되어도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군사 계몽령이 침을 삼킨 후, 용기를 내서 황극린에게 말한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모든 것을 알려 드렸습니다. 저는 책임을 지고 자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화련의 모두를 참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황극린의 시선이 계몽령을 마주한다.
“마경을 없애고 싶소?”
“예, 제가 살아가던 이유였으니까요.”
그럼 됐다.
황극린은 계몽령을 포섭하기로 했다.
“난 중원의 모든 마경을 없앨 것이오.”
“……?”
계몽령은 이제 세상을 구하는 것 따위는 포기했다.
후대에 ‘마기’를 물려줄 천화련주는 죽음을 맞이했다. 천화련주의 직계인 계빈과 계지향은 ‘힘’을 잃었다. 이젠 마경의 폭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련주께서 돌아가셨다면 희망은 모두 사라진 겁니다.”
“천화련도 모든 걸 다 알지 못하나 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배교는 마경의 힘을 뽑아내어 그들의 힘으로 사용했소. 묵철로 마기를 제어하는 것 같더군.”
“…….”
그러고 보면 배교주 이영(二影)과 천화련주가 엮인 사연은 듣지 못했다.
용황신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알 것도 같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배교는 천화련과 다른 방식으로 마경을 제어하려 했다.
황극린의 말을 들은 계몽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과격한 방식이로군요.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사실 천화련이 ‘위험’ 수준에 도달한 마경을 관리한 방법도 그런 종류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방식이 낫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기라는 건, 역병과 비슷하니까요. 자칫 잘못하다간…….”
명석한 두뇌의 계몽령은 금방 황극린의 말을 이해하고, 허점을 찾아냈다.
“영물들이 인간보다 마기에 더 잘 적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결국, 모두 실패했습니다.”
황극린은 마경에서 보았던 기괴한 생명체들을 떠올렸다.
“내가 키우는 영물이 있소. 난 그 녀석을 신수로 만들어 볼 생각이오.”
“예……?”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중원의 마경을 모두 없앨 수 있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곧 직접 보여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마경이라는 게 ‘상단전’을 개방하여 생기는 문제라면 근본적인 해결법이 필요하다. 또, 중원의 마경이 전부가 아니기에 황극린이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마기가 당최 어떤 힘인지.
다른 이들도 그걸 없앨 힘을 가질 순 없는 것인지.
황극린은 그것을 연구하고자 했다. 흑주의 신수화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오늘부터 무림맹주의 참모요.”
“계립, 그 아이의 참모 말입니까?”
“그렇소. 맹주도 내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소. 그리고 계빈과 계지향 남매를 풀어 주시오.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계빈이 천화련을 이끌도록 하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처음 보는 사내의 명령이었지만, 계몽령은 그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왜인지 그에게선 젊을 적, 숭고한 사명을 품었던 천화련주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