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12화 (312/316)

312화 끝과 시작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마기가 응축되고 또 응축되며, 핵을 만들어 낸다. 그걸 만든 천화련주마저도 제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서는 순간, 담축성이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무슨 짓을…….”

고통이 전해진다.

그의 가슴팍에 암기가 꽂혀 있었다. 고작 암기로 담축성을 막았다고?

그러나 천화련주는 곧 알게 되었다.

그게 보통 암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운철이다.”

운철은 중원 어디든 보물 취급을 받는다. 가공되지 않은 것도 신병이기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데, 제대로 만들어진 운철석 병기는 설사 황제라도 가지고 싶다고 쉬이 손에 넣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황극린이 가진 운철석은…….

십만대산의 마경, 그 지하에 묻힌 지하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운철석은 황극린이 가지고 있던 금화종이나 전음석보다 훨씬 높은 순도를 지니고 있었다. 오랜 시간 마기에 침식되어 개조가 필요했지만, 황극린의 곁에는 초우가 있었다.

황극린은 운철석이 마기에 상극이라 하여 천화련주와 만나기 전부터 준비했다.

혈마교주에게는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순히 힘과 힘의 격돌로 천화련주의 담축성을 막으려 했다면, 무림맹 정도는 가볍게 날아갔으리라. 황극린도 마경의 마기를 끌어오고 있었고, 천화련주도 그러했으니까. 두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내력은 황극린이 대충 계산해도 수천 갑자는 넘어갔다.

그 힘이 폭발하면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또 있다.

‘마경은 마경끼리 연결되어 있다.’

과거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었지만, 마경이 상단전을 연 존재들의 심상과 비슷한 개념이라는 걸 알아챈 후에는 대략적으로나마 구조가 이해가 됐다. 정신의 연결. 황극린도 천화련주의 피의 촉수에 붙잡혔을 때,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고 그의 내력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하나의 마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다른 마경도 그 폭발에 휩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황극린이라도 연쇄적 폭발을 상상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우웨에에에엑!”

천화련주가 피를 토한다.

무리하게 담축성을 만들어 낸 대가이기도 하며, 중간에 끊긴 탓도 있었다. 거기다 마기와 상극이라는 운철석이 몸에 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황극린이 다가간다.

무릎 꿇은 천화련주 앞에 당당히 선 황극린.

“네가 원하는 건 이루어질 거다.”

“너… 는…….”

“마경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다. 다 없애 주도록 하지.”

“모른… 다…….”

천화련주의 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충혈되었으며, 사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황극린의 뇌혼에 담긴 권격도 재생하던 수준의 회복력은 사라졌다. 그의 육신은 죽어 가고 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천화련주의 눈동자가 번뜩 광채를 발현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할까?

“넌, 알지 못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마경이 존재하는지.”

황극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혼자서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것 같더냐? 아니, 넌 하지 못한다. 모든 천화련주가 왜 천화련이라는 조직을 내세웠는지 아느냐? 모르겠지. 네놈은 그 역사를 알지 못하니까.”

천화련주가 비웃듯이 말한다.

“네놈은, 결국, 실패할 거다.”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여긴 세상의 구원.

마경이라는 기상천외한 힘이 중원 곳곳에 존재한다. 거기에 담긴 힘은 일개 무인이 막지 못하는 힘을 담고 있다.

이제는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황극린조차도.

마경에 담긴 거대한 힘에는 혀를 내두룰 정도였으니까.

“날… 죽인 걸… 천화련을 쓰러트릴 걸…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것이… 다…….”

황극린은 어깨를 으쓱인다.

“나도 혼자가 아니다.”

“……?”

“그리고 천화련은 건재할 거다.”

“……!”

천화련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네놈, 설마……!”

“고생했으니 이만 죽어라.”

황극린은 혈마교주를 살려 줬던 것처럼 천화련주를 살려 주지 않았다. 비록 그가 죽어 가고 있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그는 황극린이 알지 못하는 비술이나 무공을 많이 알고 있으리라.

후환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

황극린이 전심전력을 담아 주먹을 쥐었다.

뇌혼.

천람광뇌(天嵐狂雷).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광채가 공간을 휘감는다. 파괴를 위한 뇌전은 목표를 찾아 헤맸으며, 사방에 모여 있던 빛은 하나의 표적을 향해 미친 듯이 나아갔다. 순수한 파괴. 황극린의 뇌전이 천화련주의 전신을 찢고 녹여 버렸다.

과아아아…….

역설적이게도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피곤하군.”

당장 쉬고 싶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지진이 멎었다.

맹주전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끝났군.”

죄책감이 든다.

천화련주에게 황극린과 협동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만, 그는 불가능하나 여겼다. 태양은 하나여야 한다고 했다. 두 개가 있다면 모두 타 죽고 말 것이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미래를 막기 위해서는.’

마경이라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곳에 담긴 살육과 파멸의 의지를 느꼈다. 그것이 중원을 넘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간 마경이 세상을 집어삼킨다고도 했다.

무림맹주는 맹주전으로 걸어갔다.

맹주전에 설치된 진들이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무림맹의 정예들이 맹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뚜벅, 뚜벅.

맹주실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왔소?”

“……!”

황극린이 있었다.

“어떻…….”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황극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화련주와의 전투가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무림맹 전체에 지진이 일어날 정도의 여파를 발생시켰다. 그런데 어찌 상처 하나 없다는 말인가?

무림맹주는 죽음을 직감했다.

* * *

“절 살려 주신다… 그런 말씀입니까?”

“기껏 무림맹주에 적응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는 황 대협을…….”

현실로 돌아오자 무림맹주는 치욕과 분노를 느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황극린의 자비에 당장이라도 자결하고픈 감정이 솟구친다.

“됐소. 천화련주에게 홀렸다고 죽일 거면 여기 무림맹의 장로들도 싹 다 죽여야 하지 않소?”

“……!”

황극린은 맹주의 반응에 작게 미소지었을 뿐이다.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다 죽일 순 없다.

‘빙궁주가 말했었지, 원한은 몇 세대를 걸쳐서 돌아올 수도 있다고.’

여유롭게 베푼 자비는 황극린에게 언제든 행운 보따리로 다가올 수 있다. 황극린은 고작 하루 이틀을 보고 사는 게 아니었다.

“천화련주의 사상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가 하려고 했던 건 이해하고 있소.”

“그 마경을… 보셨습니까?”

“그렇소.”

황극린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비록’이라 적힌 서책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격전 속에서도 타 버리거나 찢어지지 않았다. 약간 그을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건 또 처음 보는 질감이로군.’

뱀의 가죽 같기도, 비단같이 부드럽기도 하다. 혹시나 싶어 뇌전으로 지져 봤지만, 웬만한 내력에는 그을리지도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이게 천화련주의 본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튼튼했다.

‘아무튼.’

황극린은 천화련주가 무엇을 보고 움직였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그것에는 회생비록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 마경은 언젠간 세상을 파멸시킬 것이다.

이게 비록의 첫 구절이었다.

황극린은 무림맹주를 기다리며 비록을 전부 읽어 나갔다. 황극린에겐 상당히 생소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세상이 그토록 넓다는 말인가.’

중원 대륙과 새외.

그리고 세상의 끝에 있는 작은 나라들. 황극린이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비록에 따르면, 그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곳을 넘어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원 대륙. 그곳에도 마경이 가득하다고 한다.

“으음.”

황극린이 턱을 긁적인다.

‘역시 혼자서는 안 되겠군.’

황극린은 이번 싸움이 끝나면 그나마 평범하게(?) 살아가려 했다. 만뇌문 내에 머물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한 사람의 행운만을 바라지 않는다.

‘유득유실이라고 했던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다.

회생비록에도 쓰여 있다. 초월한 수준의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저주와 병으로 단명하는 이야기. 저주를 받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황극린은 스스로의 재능과 체질을 의심했던 적이 있다. 회생비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무슨 저주를 타고난 걸까?

오늘 황극린은 비록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 담긴 방대한 지식.

어쩌면 이것을 해결하라고 준 하늘에서 준 기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맹주.”

“예, 예엡…….”

“천화련 또한 현 지위를 유지할 것이오.”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계빈, 그 친구는 꽤 재능이 있소. 다음 세대의 천화련을 이끌기엔 충분하지 않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무림맹주, 그는 황극린의 담력에 깊이 감탄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천화련 자체를 지워 버리려 했을 것이다. 황극린은 이미 천화련의 악행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명분도 있고, 원한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천화련을 그냥 두겠다고 한다.

‘쓸 만한 놈이지. 잘 가르치면…….’

황극린 정도는 아니었지만, 황극린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 천하제일인을 논할 수준까지 성장했으리라. 절대적인 천하제일인이 가로막고 있으니 앞으로 천하제일이라 불릴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칠대고수 중에서 최상위권은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혈마교에서 사신이 올 것이오. 잘 교섭해 보시오.”

“예……?”

“마침 내 친우가 교주의 위에 올라서 말이오.”

친우가 혈마교주라고?

혈마교에 아직 그런 인재가 남아 있나? 눈앞의 황극린이 부교주와 교주까지 싹 쓸어버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그렇군요…….”

무림맹주는 아직 마령이 천흉을 등에 엎고 새로운 천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죄인 맹주는 황극린의 말을 고분고분 새겨들을 수밖에 없었다.

“만독문과 북해빙궁 그리고… 흑살문도 마찬가지요. 그들과 화합할 수 있도록 머리 좀 써 보시오.”

“흐, 흑살문도 말씀입니까?”

만독문과 북해빙궁은 약간 이해가 갔지만 흑살문은 왜?

그들은 지독한 살수들이다. 감정을 거세한 채 살인귀가 된 이들이다. 살려 둘 필요가 있나?

“그들은 살수라서… 평범하게 살아가긴 힘들 겁니다.”

황극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황극린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언제나 생존을 위해 남을 죽여 온 인간이다. 그가 죽는 순간에야 남궁운혜에게 미안하다며 사죄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지 않겠소?”

“…….”

무림맹주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황극린이 승리한 것을 보고, 새로운 피바람이 불 줄 알았다. 황극린을 곡해하는 게 아니라, 그가 여지껏 보여 온 행보가 그러했다.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처부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복수했다.

그러나 오늘 황극린은 달랐다.

아니, 원래 이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던 천화련주와는 달리.

그는…….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제껏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맹주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저 계립은 평생 황 대협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 주시면 수행하겠습니다.”

쿵!

무릎이 박살 나지 않았을까 심히 걱정되는 굉음이다.

맹주의 급격한 감정 변화에 황극린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흑살문을 살려 주겠다는 게 그리 감동적인 이야기였나? 황극린은 그냥 하급 살수들의 삶이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여 약간의 도움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도움의 손길을 뻗어도 부정적인 이들을 품을 생각까진 없었다.

“그럼 믿겠소.”

믿는다.

그 말이 정파 무림의 지존에게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죽은 천화련주는 맹주를 도구처럼 다루었을 뿐이다. 도구를 믿는 주인은 없다. 망가지면 새로운 것을 가져다 쓸 뿐.

“이걸 보시오. 그럼 이해가 꽤 될 거요.”

황극린이 비록을 내밀었다.

곁에서 천화련주를 모시던 맹주는 몇 번 련주가 그걸 꺼내던 걸 본 적이 있다. 대체 무슨 서책이길래 저리 보나 싶었지만, 감히 묻지 않았다.

황극린은 맹주에게 그것을 건넸다.

무림맹주 계립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으며 황극린이 건넨 비록을 받아 들었다. 황극린이 보여 준 믿음. 그것에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다.

“…….”

황극린의 입장에선 약간 황당했다.

‘부려 먹으려면 내용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보여 준 건데……. 뭐, 상관없나.’

황극린은 꾹꾹 울음을 참으며 비록을 읽어 나가는 중년 사내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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