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인간
내공을 다룬다는 건, 기를 움직이는 심상이 움직인다는 것.
천화련주가 발현한 피의 촉수가 황극린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의 의지와 황극린의 의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황극린은 천화련주의 힘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혈마교주는 마기를 음양오행의 정점이라 했었지.’
황극린은 그 의미에 대하여 고민했었다. 정말 마기는 그런 힘일까?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극린은 그게 아니라 판단하게 되었다. 음양오행. 그것은 만물을 대표하는 힘. 마기가 음양오행의 정점과 같은 힘이라면… 황극린이 발산한 뇌전에 당할 리가 없다.
황극린의 뇌기가 특별한 면도 있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마기는 묘한 부분이 있었다.
천화련주의 말을 들으며 그것에 더욱 확신했다. 상단전을 개방하여 얻은 힘이 바로 마기였다. 대부분 그 마기에 침식되어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심지어 신수들이라 불리는 존재는 마경으로 변화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기는…….’
황극린의 머릿속에선 여태 고민했던 것들이 맞물리며 깨달음 일깨우고 있었다. 우주의 기운. 어쩌면 그 힘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힘이 아닐까? 다변화하고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개념의 힘이 아닐까?
그 가설을 일깨워 줄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심지어 혈마교주의 마기보다 더 순수한 마기가 황극린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내가 자면서 주변의 내력을 흡수했다고 했었지.’
무의식적으로 황극린은 이미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정확히는 그의 육신은 예전부터 특정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황극린은 특별한 성질이 깃든 영약과 영물의 내단을 취하며 그 효용을 직접 체감해 왔다.
“마기는 위험한 힘이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천화련주가 당황한다.
심상이 뒤틀리고, 몸에서 힘이 빠진다. 충만한 마기가 그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그 마기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그의 단전에서 내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놈!”
천화련주가 황급히 피의 촉수를 거둬들이려 했다. 하지만 황극린에게 딱 붙어 고정된 피의 촉수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분명 천화련주의 의지로 발현되어 구체화된 힘이다. 그런데도 제어력을 벗어났다.
천화련주의 마기가 황극린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운기행공은 들숨과 날숨으로 하는 법이지.”
황극린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의 몸에서 뇌전이 솟구치고 있다.
콰지지직-!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더군.”
그의 신체는 예전부터 달랐다.
그게 신수의 내단을 취해서인지, 인형혈삼을 취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내공심법을 익히기도 전에 유령의 무영심결을 익혀 왔기 때문인지.
여러 가설은 있었지만, 황극린은 들숨과 날숨으로 운기행공을 하지 않아도 됐다.
잠을 자면서도, 육신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고 했다. 심지어 북해빙궁주의 내공마저도 말이다.
그런데 깨어난 황극린은 단전에서 순수한 뇌기를 느꼈다.
“네놈만 마경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천화련주가 기함한다.
“그건 말이 되질 않는다.”
“이미 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나?”
콰직, 콰즈즈즈즈즉-!
뇌전이 점점 거세진다. 흔히 무림에서 마공으로 분류했던 마공 중에 흡성대법이라는 게 있다. 그건 배교도들이 창안한 무공이다. 인간의 생기를 흡수하여 정제되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을 내공으로 치환하는 무공이었다.
그들과 황극린의 차이는, 그들은 생명력을 흡수하면 정제하지 못하여 자신과 맞지 않는 힘을 쌓아 갔으며 황극린은 정확히 뇌전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황극린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찬란한 광채가 그의 손에서 뻗어 나왔다.
콰아아아-!
“……!”
천화련주가 복부를 내려다본다.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육신.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뇌화(雷花)에 살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마경의 힘을 빌려 새로운 육신을 가지게 된 천화련주였지만, 황극린의 뇌기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천화련주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힘을……?”
“갑자기가 아니다.”
조금 전까진 황극린이 확실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었길래 이렇게 바뀐 건가? 아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이리 이른 시간에 각성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황극린은 그런 상식을 모조리 깨부수고 있다.
“이젠 내공을 아낄 이유가 없어졌다.”
“……!”
“그것뿐이다.”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력으로 운기조식을 한 적이 없다. 왜인지 그렇게 하면 근처의 생명까지 앗아 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우우! 콰아아앙!
마치 격변이라도 일어나는 듯이 황극린의 아랫배가 크게 고동친다. 마치 기쁘게 포효하는 것 같았다.
3갑자에 달하는 단전.
물론, 무림인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많긴 하지만 여태 싸워 온 적들보단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북해빙궁주는 이미 5갑자에 달한다고 했던가? 황극린은 영약을 취하면 단전 내력의 한도치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체질이 바뀌었을 뿐이다.
억눌러 왔던 황극린의 단전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응하여 무림맹의 지하가 거칠게 흔들렸다.
“마기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처리할 테니.”
천화련주의 역린.
그 누구도 마기를 처리할 수 없다. 그걸 탐하는 자에겐 종말과 좌절만 있을 뿐이다. 천화련주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의 멸망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저리도 쉽게 마기를 정제하여 음양오행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건…….
“그렇게 둘 것 같은가.”
천화련주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가 마치 뱀의 그것처럼 길게 쭉 찢어졌다.
* * *
“대체 무슨 일이야?”
“으악! 전각이 무너지고 있어!”
“대피하라! 지진이다!”
정주는 그나마 지진이 잘 일어나지 않았던 지역이다. 처음 지진을 겪는 이들이 당황하고 있었지만, 무림맹주는 이변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맹원들을 지휘하여 혼란에서 벗어났다.
“넘어지기 쉬운 구조물에 접근하지 마라!”
“넓은 평지로 이동하거나 탁자 아래에 숨어라!”
무림맹의 무인들이 내공을 담아 소리치며 돌아다녔다. 점점 대지의 울림이 커지고 있었지만, 희생자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
무림맹주 본인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멈춰 맹주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팔뚝을 만져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무림맹주의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맹주전에서 뻗어 나오는 위험한 기운. 무림맹주는 거의 화경에 근접한 고수였다. 저토록 거대한 힘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변을 눈치챈 건, 무림맹주뿐만이 아니었다.
“맹주님, 맹주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설마 지진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림맹주가 겨우 답한다.
“곧 기다리면 끝날 겁니다.”
살아남는 건 당연히 천화련주일 것이다.
* * *
촤아아악!
“……!”
거의 무한정 내력을 끌어올 수 있다고 해도, 내력을 채우는 것보다는 소모하는 게 더 빨랐다. 그 과정은 순수한 육신의 힘으로 메꾼다.
무림의 고수는 내공만 잘 다룬다고 될 수 없다.
심기체의 조화가 중요한 이유였다.
황극린은 천화련주의 움직임이 정형화된 초식이 아니라는 걸 부딪치며 깨닫고 있었다.
촤악! 타악!
채찍처럼 휘감겨 들어오는 주먹. 아니, 주먹이 아니다. 권격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샌가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펼치고 있다. 검게 변한 그의 손톱은 황극린의 살점을 몇 번이나 뜯어 갔다.
당연하게도 황극린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권격은 물론이고 각법과 암기까지 활용하며 천화련주의 틈을 노렸다. 날것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쉽지 않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황극린이 유리해지고 있었다.
황극린의 내력은 계속해서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오오오오-!
가장 오래된 마경이라는 곳에서 황극린에게 알아서 힘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뇌기로 치환되었다.
콰지지지직-!
“큭.”
뇌혼이 담긴 권격을 맞은 천화련주가 대지를 뚫고 처박혔다.
‘대단하군.’
황극린은 솔직히 감탄했다.
천화련주의 육신은 뇌혼의 일격을 벌써 마흔 번도 넘게 정면으로 허용했다. 솔직히 마경의 힘을 끌어오는 순간, 황극린은 승리를 장담했지만…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천화련주가 순식간에 튀어 올라 황극린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황극린이 날것이라 생각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는 마치 짐승처럼 싸우고 있다. 그는 무림의 온갖 비기들을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찰나의 순간, 몇 번의 공방을 나누었다.
천화련주의 짐승 같은 공격으로 황극린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건 천화련주도 마찬가지다. 둘 다 상처를 입으면 금방 회복한다.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였지만, 점차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황극린의 뇌기에 당한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는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체내에 남아 움직이는 뇌전에 천화련주의 움직임이 아주 조금씩 둔해지고 있었다.
그 차이가 결과를 만든다.
황극린은 집요하게 그 부분을 공략했다.
왼쪽 다리가 작게 흔들리는 것을 본 황극린이 그의 허벅다리에 주먹을 다섯 번이나 꽂아 넣었다. 단순한 권격도 아니다. 뇌혼이 담긴 주먹이었다.
쿵! 쿠웅! 쿠우우웅!
거대한 바위가 쪼개지는 굉음이 수차례 들려왔다.
“…….”
천화련주는 뭉개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본다. 회복이 되고 있었지만, 확실히 느리다.
“대체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거지? 그리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뭐지?”
천화련주의 눈동자에 탐욕이 이글거리고 있다.
황극린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듯이 말이다.
“갑자기는 아닌 것 같군.”
“너는 분명 적혈강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었지.”
“한데, 어떻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원래 네 힘이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말인가?”
“말에 어폐가 있군. 원래는 아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인형혈삼부터 시작한 모든 것. 하지만 황극린은 어떤 것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 왔을 뿐이고, 순간순간 단계를 밟아 나가며 뭘 할 수 있는지 자세하게 확인했을 뿐이다.
솔직히 황극린은 천화련주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었다.
그는 지금 황극린처럼 되고 싶어 질문하는 것이다.
“넌 내가 될 수 없다.”
천화련주의 눈동자가 치욕으로 거칠게 떨린다.
세상을 구원하고, 그만이 마기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이자 전대 천화련주였던 계당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았으며, 혈마교주나 북해빙궁주 그리고 무림맹의 주인들까지도 발아래로 보고 살아왔다.
그가 살아 있는 무림의 역사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황극린이라는 존재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진정한 마기를 보여 주마.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게 될 것인지… 직접 보여 주마.”
각오를 다진 듯한 천화련주.
여태 믿어 왔던 신념이 흔들렸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멀리하고 경계했던 힘을 폭주시키기로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며.
황극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인간이로군.”
“…….”
“상황이 달라지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어. 혈마교주가 말하는 네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천화련주는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파멸을 향한 의지. 이성적으로 억눌러 왔던 그 욕구를 해방한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모두 파괴하는 마기의 힘이 그의 손에 맺힌다. 단순히 손을 뻗은 것에 불과했지만, 왜인지 혈마교주가 사용하던 담축성과 비슷한 구체가 맺혔다.
그것이 점점 작아진다.
역설적이게도 작아질수록 힘이 강해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마경에서 무언가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다.
콰아아아아-!
천화련주의 주변으로 폭풍이 몰아친다. 그가 만들어 낸 구체에 주변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건가.’
혈마교주는 자신의 담축성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그걸 활용하는 자는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사용하다 보니 완벽해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천화련주는 자신마저 버리고 모든 것을 파멸하려 하고 있다.
마기가 세상을 위협한다며, 황극린에게 훈계하듯 말하던 천화련주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황극린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천화련주는 숭고한 사명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행보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이것이 마기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라고 경고했던, 그 마기의 정점이다.”
마치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듯.
황극린에게 막아 보라는 듯.
손을 뻗었다.
황극린은 더 이상 시간을 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사악.
황극린이 출수한 묵색의 무언가가 담축성에 꽂혔다.
그리고, 담축성이 무너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