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체질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천화련주는 태연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황극린이 안쓰럽다는 목소리였다.
“자만이 자신감이라 생각할 때가 있지.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천화련주는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재주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 뜻밖이었어. 혈마교주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진 못했는데 말이야.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지기엔…….”
천화련주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황극린의 뒤에서 들려왔다.
“아직 이르다.”
“……!”
소름이 끼치는 감각.
황극린은 마치 마경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천화련주의 기척에 황급히 중단전의 힘을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증폭된 감각으로 천화련주의 공격을 피해 낸다.
살의가 전혀 담기지 않은 일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확실히 제법이군. 마경 안에서도 그리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말이야.”
“너는 여기가 익숙한가 보군.”
“아니. 나도 여기선 익숙해질 수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상단전을 개방했다는 영물… 아니, 신수(神獸)라 추앙받던 존재들도 마기의 혼돈에는 삼켜졌다고 말이다.”
사아아아아…….
황극린에게 환상을 보여 줬던 마경의 분위기가 돌변하고 있다. 중앙의 거대한 눈이 황극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의식할 때마다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네가 무엇을 가졌는지 말하라. 그럼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다.”
참으로 역겨운 배려였다.
천화련주는 황극린을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와 대화를 나눈 후, 힘만 빼앗는다면 살려 둘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정확히 말하면, 오만했던 그가 진실을 마주하고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했을 뿐이다.
“네가 이긴다면 말해 주지.”
“쓸데없는 자존심이다.”
황극린이 육신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사방에서 옥죄는 거대한 시선. 마경 자체에는 사실 눈이 없다. 하지만 기의 흐름이 한 올 한 올 뭉쳐 끈적하게 황극린을 감싸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지며, 의식이 흐릿해진다.
‘상단전이라.’
보통 무공서에선 상단전이 우주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말한다.
세상은 넓다. 당연하게도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수없이 많은 별까지. 삼라만상의 본질을 꿰뚫었다고 했던 무인들 또한 사실은 그것들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인간에겐 감히 허용되지 않은 지식.
어쩌면 그것이 상단전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식을 갈망하는 것 자체가 혼돈을 만든다.
상단전은 열고, 마기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황극린은 갑자기 미소를 머금었다.
규모가 워낙 큰 마경이다 보니 자연스레 공포가 만들어진다. 어쩌면 무림맹주는 이곳의 환상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조금 달랐다.
그는 누구도 겪지 못한 경험을 했다.
죽음.
그리고 새로운 삶.
알게 모르게 황극린은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고찰했다.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도 고찰해 보았다. 솔직히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감히 허락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그 본질에 덜컥 겁을 먹기보다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나가는 게 정답이라고.
황극린은 초연하게 마경의 압박을 받아들였다.
‘뇌혼.’
황극린의 몸이 뇌광으로 휩싸였다.
작은 불빛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마경에서 처음으로 빛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내가 왜 마기를 버린 줄 아나?”
“……!”
여유롭게 황극린을 지켜보던 천화련주.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마경이 주는 거대한 압박에도 황극린은 순식간에 천화련주의 앞에 섰다.
“그것보다 더 강한 게 있어서다.”
비움으로써 얻는다.
황극린은 자신의 피가 저주를 해주 할 막대한 힘을 품고 있다고 직시한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피를 흘리는 걸 아꼈다. 그의 피가 있다면 저주를 해주 할 수 있었던 이들도 많았지만, 모두 구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황극린은 어머니 한소연의 마기를 없애기 위해 막대한 양의 피를 뽑아냈다.
거기에서 깨달은 게 있었다.
황극린은 혈마교주와 같이 암천성휘를 발현할 수 있었다. 분명 마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내 피는 마기였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원리처럼 황극린의 피는 다른 마기를 압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결국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천화련의 무공 적혈강.
그것은 정확히 따지자면 인간의 피를 마기처럼 변질시키는 무공이었다.
황극린은 비워 냄으로써 새로운 것을 채워 넣었다.
마기를 압살하는 마기. 그리고 적혈강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황극린의 피. 황극린은 그 누구보다 빛나는 광채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뇌전.
그의 뇌전은 마기를 찢을 힘을 품게 된 것이다.
콰지지직-!
황극린의 뇌전이 터져 나올 때마다 천화련주의 얼굴이 구겨진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위대한 마경의 힘. 인간이라면, 아니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이라면 누구도 앙복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였다. 우주의 아득하고 위대한 힘 앞에서 당연히 황극린이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그런데.
황극린은 가장 오래된 마경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어둠이 강렬한 빛에 밀려 뒤로 물러서고 있다. 사방을 옥죄는 시선이 점점 멀어진다.
“말도 안 된다.”
천화련주가 분노를 터트린다.
마경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재앙이다. 인간을 파멸로 몰아갈 힘이다. 그런데 어찌 한낱 인간의 무공에 의해서 뒤로 물러설 수 있다는 말인가?
천화련주의 몸이 흐릿해졌다.
사악!
천화련주의 검이 공간을 벤다.
유성검흔(流星劒痕).
인지할 수 없는 속도의 검이 빈 공간을 베었지만, 순간 황극린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기를 몰아낼 수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로군.”
사아아아!
사아아!
공간을 베어 낼 때마다 황극린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참으로 기묘한 기의 제어였다. 물질적인 힘이 아니라 심상과 소름 돋게 정교한 내력의 운용에서 나오는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혈마교주를 비롯한 사대마제들이 왜 천화련주에게 밀렸던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마기(魔氣)만을 믿고 자만심이 가득하던 혈마교주와는 달랐다.
“네 힘은 분명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받아 주도록 하마.”
사아악!
또다시 황극린의 몸을 베어 내려던 천화련주의 심상검.
하지만 이번에는 베어 내지 못했다.
까드드득-!
공간을 베어 내던 심상이 무언가에 붙잡혔다. 뇌혼이 만들어 낸 뇌전이 그의 심상검을 속박한 것이다. 수십 가닥의 뇌전의 줄기가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고정되어 있다.
“잡았다.”
황극린이 말을 내뱉는 순간, 천화련주는 의아함을 느꼈다.
무엇을 잡았다는…….
“큭!”
순간 터져 나오는 뇌광. 그건 눈 앞에 펼쳐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뇌광이 흩날리고 있었다. 뇌가 타오르는 고통과 함께 천화련주가 비명을 내질렀다.
“끄으윽!”
“마경이 널 보호하듯 움직이더군. 그 흐름 속에서 틈을 찾아내는 건 꽤 어렵더군.
“너…….”
“혹시 이곳은 네가 만든 마경이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천화련주가 사라졌다.
아니, 고정된 뇌전을 끊어 내고자 마경에서 탈출해 버린 것이다. 과거 황극린이 회계산의 마경에서 어디로든 빠져나가고 진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마경은…….’
황극린은 작은 가설을 떠올렸지만, 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천화련주를 쫓는 것이다.
뇌전의 실이 그와 연결되어 있다. 황극린은 빠르게 마경을 빠져나갔다.
* * *
‘대체 어떻게.’
천화련주는 달려가며 생각했다.
그에게 마경을 보여 준 이유는 하나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계빈의 몸에 있던 마기를 정화한 것인가?
‘황보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
황보휘를 데려간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서. 천화련주는 후대가 필요했다. 마기를 품지 못하는 존재는 후대로서 가치가 없다. 용황신가의 핏줄이 마기를 정화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마기를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천화련주는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런데 황보휘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그는 결국 피를 뽑아내는 가축으로 쓰기로 했다. 다음은 황극린이었다.
‘놈은 어떻게.’
마기를 소멸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용황신가이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
‘뇌불이라는 놈의 무공? 중단전을 다루어서 특이하다고는 생각했다.’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설마 마기의 존재를 이해할 심득을 얻었다?’
천화련주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정확히는 역대 천화련주가 모두 바랐던 것이지만, 이해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마기라는 존재에 대해 공포감만 커졌을 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천화련주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의 머릿속엔 얇은 실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심상 자체를 내공으로 구현하는 경지. 황극린이 이것을 타고 따라오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다.
그의 몸에서 까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촤아악!
피로 만들어진 하나의 칼날이 마경에서 빠져나온 황극린을 강타했다.
“큭.”
황극린은 놀랍게도 왼쪽 손을 잃었다.
* * *
‘예상외로군.’
뇌혼으로 만들어진 반탄지기.
그것이라면 기습을 방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방금 천화련주가 만들어 낸 심상의 칼날은 무언가 달랐다.
황극린의 뇌혼을 뚫어 내고 그의 손을 절단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당한 것은 황극린 뿐만이 아니었다.
“으윽.”
그 짧은 순간. 황극린은 반응하여 반격했다.
뇌탄에 직격당한 천화련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극린의 뇌기가 천화련주의 몸을 시시각각 태워 버리고 있다.
황극린이 잘린 팔을 들어 올렸다.
“혈풍뇌전신공이 아니로군.”
천화련주가 몸을 일으킨다.
상당히 빠르게 내부를 잠식하는 뇌기를 소멸시켰다.
‘확실히 대단하구나.’
만약 황극린이 검은 뇌전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에게 패배했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강했다. 황극린은 솔직히 천화련주의 무위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런다고 잘린 팔이…….”
붙었다.
황극린이 잘렸던 왼팔을 붙였다.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다.
“넌… 뭐지?”
천화련주의 눈동자에 깃든 불신과 경악.
“혈마교주와 비슷한 질문을 하는군.”
황극린은 수없이 많은 체질 개선을 이루었다.
특히 가장 유용했던 건, 수없이 많은 독에 내성을 가지게 된 것과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는 체질이었다.
적혈강으로 마기를 모두 뽑아낸 이후, 황극린의 체질은 또 다른 수준에 올라섰다.
물론, 내공을 소모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상처 부위가 깔끔하지 못하면 이렇게 쉽게 붙지 못한다.
천화련주의 예리한 의지.
황극린에겐 다행이게도 완벽하게 잘려 버렸기에 오히려 쉽게 붙일 수 있었다.
“너도 선경이라는 걸 알고 있나?”
“그런 건 없다.”
천화련주는 선경을 믿지 않는 듯했다.
당연했다. 그가 알고 있는 마경이라면 선경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에게 마경이란 우주와 연결된 통로가 아닌가?
“혈마교주는 나보고 선경이라고 하더군.”
“아니. 네놈은 그런 게 아니다.”
천화련주가 확신하듯 말한다.
“신수의 내단을 취했나?”
“…….”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겪더라도 ‘인간’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린 꼬리를 재생하는 도마뱀의 재생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수의 내단이라는 걸 취하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네놈은… 인간이 아니로군.”
천화련주의 말에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인간이라는 걸 정의하기도 힘들다. 솔직히 황극린은 남들과는 다르긴 했다. 영약을 취하면 그 힘을 모두 ‘체질’로 흡수했으니까. 그런 인간이 또 있을까?
“네놈은 위험하다, 균형 자체가 의미 없게 만들 정도로.”
천화련주는 이제껏 황극린에게 살의를 표출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이 무심하게 황극린을 노렸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천화련주의 전신에서 뿜어져 오는 살의는 황극린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지독한 살의였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던 마경의 시선이 살의를 품게 되는 것 같달까.
까드드득-!
천화련주의 전신이 검게 물들었다. 마치 그 자체가 마경이 된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