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비밀
황극린과 천화련주의 눈이 마주한다.
“천화련주인가?”
“…….”
천화련주는 가만히 황극린을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대화를 하도록 하지.”
“그러지.”
무언가를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화련주는 대화를 제안했다. 황극린도 다짜고짜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만약 황극린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하려 했다면, 이런 방법은 택하지 않았으리라.
황극린이 천화련주에게 궁금한 게 있듯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옆에서 긴장하고 있던 무림맹주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천화련주의 뜻에 동조했지만, 사실 황극린과 싸우기를 원하진 않았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중원 무림에서 이루지 못할 것은 없을 테니까.
어쩌면 황극린이라면 천화련주의 뜻에 동참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무림맹주다.
“신기하군.”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천화련주가 말한다.
“어찌 그러한 힘을 손에 넣었지?”
“그런 힘?”
“네 하단전의 기운은 평범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섰다. 그리고 중단전에도 내력을 품고 있군. 혈풍뇌전신공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황극린은 희대의 영약을 취하며 지속적으로 체질을 바꿔 왔다. 그 과정에서 황극린의 육신은 점점 완벽해졌다. 또한, 어머니 한소연을 만난 뒤로 깨달음을 얻어 더욱 성장했다.
‘감각이 범상치 않군.’
황극린은 천화련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그와 마주한 감상으로는 혈황마제나 흑살문주 수준이라고 여겼다. 그것도 대단한 무위이긴 하지만, 황극린의 예상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황극린과 마주하고, 그의 단전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물론, 완벽하게 황극린의 수준을 파악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경계할 이유가 늘어난 것이다.
‘쉽지 않을 수도.’
그리 생각하며 황극린이 질문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두야랑에 대한 일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그렇지.”
천화련주가 여유롭게 차를 마신다.
“네가 나타나서 계획에 차질이 벌어졌다.”
“나 때문이라는 건가?”
“계빈, 그 아이는 언젠가 나를 대신할 아이였다. 하지만 너와 만난 이후로 인간적으로 변해 버렸지.”
계빈?
인간적으로 변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성격이 변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너는 저주를 해주 할 생각이 없나 보군.”
약간 도발이 섞인 말이었다.
혈마교주를 비롯하여 빙궁주까지. 마기를 다루는 이들은 선경을 애타게 찾아 헤맸다. 압도적인 무위로 버티고 있긴 했지만, 그들의 육신은 죽어 가고 있었다. 천화련주도 아닌 척하고 있지만, 불길한 냄새가 흐르고 있다. 그의 몸에도 마기가 가득하다는 말이다.
“저주라……. 모르는 자들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
저주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건 하늘의 계시라 할 수 있다.”
“계시라고?”
“너 또한 회생비록을 몇 권 보았을 테지.”
“그렇다.”
“그건 천화련의 선조가 쓴 것이다.”
“…….”
어쩌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게 말해 주니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천화련의 선조는 용황신가의 피를 이어받았지. 가장 진한 용황신가의 피를 말이다.”
“…너와 내가 같은 핏줄이라는 말인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천 년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같은 핏줄이라는 건 의미가 없게 된다. 다른 인간과 섞이고 섞여 변화하기 때문이지.”
천화련주는 모든 것을 술술 말해 주고 있었다.
황극린은 그 이질적인 행동의 이유를 찾아냈다.
“날 죽이려는 게로군.”
“피차 마찬가지 아니던가?”
“난 솔직히 널 죽일 생각은 없다. 내 주변인들은 건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천화련주가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무림맹주가 놀랄 만큼 흔한 미소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리 말하다니, 사고의 폭이 자유롭군.”
칭찬이라기보다는 감탄이다.
그리고 왜인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기로 하지.”
“뭐, 그러지.”
두 사람의 대화를 나누었다.
무림의 정세를 논하기도 했으며, 무공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했다. 천화련주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하여선 숨기지 않고 말해 주었다. 황극린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단전을 연다는 것은 하늘의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지.”
상단전은 어떤 무공서를 보더라도 상당히 경외하며 언급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상승의 무공들은 상단전을 우주와 소통하는 통로로 본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머리에 단전을 만들 수 있다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천화련도 용황신가도 없던 먼 옛날에는 상단전을 열었던 존재들이 꽤 있었다.”
“…….”
천화련주가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잘 믿기지 않았다.
지금의 황극린 또한 현 무인 중에서는 가장 지고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상단전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진 못했다. 먼 옛날에는 그런 존재가 많았다고?
“믿기지 않나 보군.”
“그런 경지에 올랐다면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정신을 가진 모든 것들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확언하는군.”
“유득유실(有得有失). 얻는 게 있으면 무조건 잃는 게 있다. 그건 상단전을 연 존재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인간으로 살아갈 때가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회한에 젖은 천화련주.
그는 상단전을 열었다는 말일까?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개념이 되었지. 아니, 그러려고 했었다.”
황극린의 눈이 가늘어진다.
왜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 또한 가능성이 있군. 솔직히 이야기만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다. 어찌 이 시점에 너 같은 아이가 생겨났는지 의문이었다. 비록엔 네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회생비록에 말인가?”
“그렇다. 그것엔 천화련주의 자리에 앉은 존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적혀 있지.”
혈마교주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회생비록 정본.
천화련주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저들은 회계산의 마경이 드러났을 당시 무인들을 보냈을까?
“회생비록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로군.”
“그렇다.”
이걸 또 순순히 인정했다.
천화련주에 대한 경계가 상승했다. 황극린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천화련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넌 안다는 말인가?”
“모를 수가 없지.”
- 까드득.
천화련주의 몸에서 기괴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뼈와 뼈가 맞물려서 나는 소리라고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친다.
“네게 보여 줄 게 있다.”
“무림맹 지하에 있는 마경인가?”
“호오, 거기까지 들은 건가.”
“마경이야 숱하게 봐 왔다.”
“지금 보는 건 조금 다를 거다, 마경 중에서도 특별한 공간이니.”
천화련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무림맹주는 마경이라는 말에 겁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을 뿐이다.
* * *
즈으으으으-
황극린은 왜 자신의 감각으로도 마경을 찾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수십 겹의 진.
진의 수준으로만 따지면 하나하나가 만뇌문의 진과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진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황극린의 솜털이 일어났다.
“마경의 기원에 대하여 궁금한 적이 없었나?”
“비정상적으로 기가 응축되어 생기는 게 아닌가?”
“호오.”
천화련주는 황극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틀리지 않다.”
맞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틀리지 않다는 건,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넌 마경이 왜 생기는지 알고 있는 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진을 하나씩 통과했다.
황극린은 거대한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응축되고 또 응축된 마기. 그것은 하나의 의지를 만들어 낸 듯했다. 마치 회계산에서 보았던 수만 개의 눈동자처럼 말이다.
- 까드드득! 까드득!
칠흑 같은 어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공간에 황극린이 진입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무언가가 망막에 맺히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보이지?”
“어둡군.”
“끝인가?”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다.”
“…….”
천화련주의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경이 왜 생겼느냐. 원론적으로는 네 말이 맞다. 기가 무한정 응축되어 공간 자체가 비틀려 버리지. 흔히 중원에서 활용하는 진법들도 마경이 만들어 내는 왜곡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지.”
그 말을 황극린은 이해했다.
“인간은 무공을 창안한 게 아니다.”
“…….”
“무림인이 말하는 영물. 요즘 시대엔 그것들은 내단 보따리 취급을 받고 있지.”
천화련주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극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나? 인간들은 무공으로 처음엔 짐승들의 움직임을 흉내 냈다고.”
“들어 본 적 있다.”
“사실이다.”
“…….”
황극린은 천화련주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걸 느끼고 있다.
“이곳은 영물의 상단전이 열린 다음 생겨난 마경이다.”
천화련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압력이 황극린을 덮쳐 왔다. 게걸스럽게 황극린을 먹어 치우려는 듯이 돌진하는 어둠. 항거할 수 없이 닥쳐 오는 압박감에 황극린이 뒤로 물러서고 만다.
“우리가 짐승이라 말하는 것들. 그것들은 과거 인간보다 더한 지혜를 품고 있었다.”
“영물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십만대산의 마경에는 바깥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영물이 있었다. 또한, 바다의 마경에서도 인간의 인지 범위 이상의 크기를 가진 마물 현무를 보았었다.
마경에서 그들이 탄생한 게 아니라면.
그들이 마경을 만든 것이라면?
“다음은 인간의 차례다.”
천화련주의 말에는 현기가 녹아 있었다.
“아니,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힘은 결국 이 대지 자체를 잡아먹을 것이다.”
환상.
과거 황극린은 자연 그 자체를 품고 울창한 수풀을 만든 와룡의 진에 들어간 적이 있다. 현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마경에서 보여 주는 환상은, 믿을 수 없게도 진실처럼 느껴졌다.
콰아앙!
용암이 터져 오른다.
하늘로 솟구친 용암은 불의 비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진다.
옆을 바라본다.
바로 앞에서는 용암이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 있었지만, 그곳에선 얼음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수십 장에 달하는 크기의 얼음덩이들이 거대한 힘에 휘말려 대지 위에서 그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네가 방금 본 것이 바로 미래다.”
“…….”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은 영물들. 그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들을 따라 어리석은 길을 똑같이 걷고 있지.”
“네가 말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누구지?”
“마기를 품은 존재들.”
모순이었다.
그랬다면 혈마교나 흑살문을 일찍 처단했어야 하지 않았나? 천화련주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음양오행이라 불리는 기운의 종착지는 결국 마경이다. 응축되고 또 응축되는 힘. 인간이 단전에 내공을 쌓는다는 것 자체가 핵(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마기에 대하여 오해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순수함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애초에 마기에서 음양오행이 탄생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선…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오는 힘이겠지만 말이다.”
“그걸 핵이라고 부르나?”
“응축된 하나의 힘. 너 또한 하단전에 품고 있지 않느냐?”
황극린이 고개를 젓는다.
“그런 위험을 품고 있다면, 너부터 죽어야 하지 않나?”
황극린의 의문은 타당했다.
오히려 저런 마경을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가장 큰 건 천화련주였으니까.
“오직 나만이 마경을 제어할 수 있다. 역대 천화련주는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아왔지. 그런 노력 덕분에 마경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경의 힘을 다루는 이들을 왜 그냥 두었지? 너라면 그들을 더 일찍 처단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하나고, 마경은 많다.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지. 그들의 존재를 억압하면 할수록 수면 아래로 숨어들겠지. 그리고 나조차도 쉬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겠지. 그러니 숨통은 열어 줘야 했다.”
“…….”
“너는 균형을 깨트렸다.”
까득, 까드드득.
“네 존재를 가상히 여겨 세상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라.”
천화련주가 자비를 베풀듯이 말한다.
피식.
“…….”
그러나 황극린은 어이없게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마기 자체를 소멸할 수 있다면.”
황극린은 천화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떡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