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07화 (307/316)

307화 명분

“부산물이라니?”

“천화련주,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가 그런 것에 혹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분개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어허, 천화련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뭐가 그리 급하시오?”

재빨리 머리를 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천화련주는 그들을 보며 무심하게 말한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평안한 무림을 이끌어 갈 영웅이 될 수 있다.”

“……!”

“모두 무공서를 받도록.”

천화련주의 말에 무림맹주가 움직였다. 그가 장로들에게 하나씩 무공서를 건네주었다.

“읽어 보아라.”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무공서를 뒤적이던 장로들.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들 또한 명문거파의 출신으로서 꽤 높은 수준에 이른 무인들이다. 그렇기에 무림맹주가 배포한 무공서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건 설마… 소요원양신공(逍遙元陽神功)이 아닙니까?”

무당의 장로가 말했다.

“소요원양신공?”

“그건 모산파의 절전된 비급이 아니외까?”

“어찌 이것이…….”

“천화련은 무림의 절기들을 모아 왔다. 이러한 무공이 사특한 이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지코자 함이었지. 하나,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무림의 평화를 이루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천화련주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지금 나가도 좋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다.”

무당의 장로가 되묻는다.

“이렇게 해서 련주께서는 어떠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오?”

“악의 궤멸.”

“궤멸이라뇨?”

“언젠가 무림은 붕괴한다. 무림뿐만이 아니지. 세상 자체가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혈마교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아니, 진정한 악은 혈마교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없앨 수 있는 악이었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새롭게 태어날 악이다. 예상을 뛰어넘으며,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악.”

“…….”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악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곧 알게 될 것이다.”

천화련주의 의뭉스러운 말에도 무림맹주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의 말이 맞다는 듯이 말이다.

* * *

“난리가 났군요. 만독문의 여식과 천화련주의 혼인이라니…….”

“정면 돌파를 선택했소.”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구해 낼 생각이오.”

팽여해가 잠시 침묵한다. 무림맹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반발의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천화련주가 손을 쓴 걸까?

“제가 대표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팽여해가 소리쳤지만, 황극린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오.”

“위험하다니요? 천화련주께서 설마 반대했다고 저를…….”

“죽일 수도 있소.”

“…….”

팽여해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죽일 수도 있다니?

“계빈, 천화련의 소련주. 그가 직위를 박탈당했다고 하오. 지금은 뇌옥에 갇혀 있다는군.”

“예에?”

계빈의 서신이 만뇌문에 도착했다고 했다.

무문이 만든 황악반점은 무림맹이 있는 정주에도 있다. 황극린은 그곳에서 오늘 계빈의 서신을 읽을 수 있었다.

“설마 혼인을 하는 이유가 새로운 후계를 보기 위해서라는 겁니까? 지금 천화련주님의 나이가 몇인데…….”

“그는 반로환동의 고수. 잘하면 팽 소협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소.”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황극린은 의문이었다.

분명 천화련주도 마기를 다룬다. 마기라는 건, 쉬이 다룰 힘이 아니다. 혈마교주나 흑살문주도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힘에 조금씩 먹히고 있었다. 최소한 황극린이 보기에 그러했다.

어떻게 천화련주는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은 걸까?

여러 의문이 남아 있다.

“일단 두야랑을 구출하겠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림맹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경계가 가장 삼엄한 장소. 그곳을 찾으려 했다. 그곳에 두야랑이 있으리라.

* * *

어두운 방.

그곳에서 두야랑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기회를 엿보았지만, 만독문주에게선 틈이 보이지 않았다. 탈출할 수 있을까?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황극린이 도와주러 올 수도 있었지만, 그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에겐 두야랑을 돕지 않는 게 이익일 수 있다. 천화련주가 혼인의 이유를 공개했다. 그것을 방해한다면, 천화련주의 뜻에 반한다는 말이다. 무림맹주조차 천화련 출신이라 들었다. 무림맹은 천화련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제 막 힘겨운 싸움을 끝내고 평안을 찾은 만뇌문이었다.

‘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씁쓸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솔직히 두 사람은 친우였지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 탈출해야 해. 언젠가 기회는 와.’

그렇게 생각한 두야랑이다.

‘혼인하게 되면 같은 방을 쓰게 되겠지. 그때 천화련주를 죽인다면……?’

독살.

독을 사용하는 무인들은 살수와 비슷한 훈련을 받는다. 인간이 가장 취약할 때는 잠이 들었을 때다. 아무리 고절한 경지에 오른 고수라도 잘 때 반탄지기를 두르진 않을 게 아닌가?

그렇게 두야랑이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

- 조심해라.

전음이 들려왔다.

두야랑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두야랑을 찾아내서 구출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크윽!”

만독문주의 신음이 들려온다.

황극린은 이미 사대마제들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최근 만독문주가 천화련주의 도움으로 상당히 무위가 상승했지만, 황극린과의 정면 대결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거기다 황극린은 살수의 방식으로 만독문주를 암습했다.

“네놈……!”

만독문주가 소리친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독공을 마구 펼치지 못했다. 황극린의 뇌기가 세맥을 뒤흔들고 있다. 목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다. 황극린이 마음만 먹었다면, 만독문주는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말이다.

만독문주는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이런 고수가…….’

두야랑의 얼굴을 살핀다.

그녀의 눈동자엔 감격의 감정이 떠올랐다. 분명히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만독문주는 사내의 정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황극린!”

“너도 마기를 품고 있군.”

“네놈……!”

황극린은 어깨를 으쓱하고 두야랑에게 다가갔다.

“가자.”

두야랑은 황극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 * *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

“왜 막지 않았소?”

무림맹주와 만독문주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실 천화련주는 황극린이 올 것을 예상했다. 확률은 반반이었지만 말이다.

“내 딸과 혼인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왜 막지 않은 거요? 그가 올 가능성을 생각했으면서 말이오!”

“명분이다.”

“명분?”

“소림과 화산의 일을 들었다. 그는 품 안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하더군.”

“내 딸과 그런 사이라는 말이오?”

“네 딸이 서신을 보낸 적이 있지. 그걸 왜 막지 않은 줄 알고 있지 않나?”

“결국, 황극린을 낚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로군. 내 딸이 미끼가 되어서 말이오.”

“너는 원하는 것을 얻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만독문주는 입을 다물었다.

천화련주의 멈춘 심장이 다시 뛰게 되었을 때, 유령이라는 놈이 천화련주에게 무참히 패배하던 장면을 보았었다. 그 경이롭고 압도적인 힘에 매료당했다. 그리고 만독문주는 천화련주가 무언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처럼 되고 싶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조차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힘을 부리는 무인.

그에게 많은 것을 약조받았다.

돕는 대가로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오?”

“맹주, 사건을 공표해라.”

“예.”

“천하의 천화련주가 황극린을 무림공적으로 몰겠다는 말이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천화련주의 힘이라면 홀로 황극린을 처리할 수 있지 않나?

천화련주는 명분을 중요시했다. 그는 과거 마교와 혈교를 멸문할 수도 있었으며, 최초로 중원 무림을 일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화련을 세운 시조께서는 천년대계(千年大計)를 구상했었다.”

“천년?”

일국의 황제나 할 법한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가 필요할 때이다.”

“황극린이 그 과정에서 필요하단 말이오?”

“비록의 예언이 빗나갔다. 새로이 써 내려야 할 때라는 말이지.”

“회생비록인가 그걸 말하는 것이오?”

이미 회생비록의 존재는 무림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 대부분 그것을 무림 비급서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천화련주와 연을 맺은 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너 또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라.”

“…그래서 난 뭘 하면 되오?”

“만독문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십만대산을 쳐라. 만독문은 새로운 혈마교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네 무공은 완성될 것이다.”

두야랑은 결국 황극린을 꾀어낼 미끼에 불과했다.

솔직히 아비로서, 만독문의 문주로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만독문이 키워 낸 최고의 기재였으니까.

그렇다고.

천화련주의 말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넌 사흑련주가 될 것이다.”

“……!”

사흑련은 네 개의 사파 문파가 만든 조직이었다. 하지만 무림맹과는 약간 다르다. 무림맹은 맹주라는 수장이 있었지만, 사흑련은 각자 따로 논다는 느낌이랄까?

만독문주는 사흑련의 수장이 될 것이다.

천화련주가 있다면 가능하다.

그렇게 만독문주가 떠나가고, 무림맹주가 묻는다.

“련주님, 사파가 꼭 필요한 겁니까?”

“적당한 선과 악의 대립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싸워야 할 적이 있으면 함부로 눈을 돌리지 못하겠지.”

“그렇군요…….”

천화련주가 말하는 만년지대계.

맹주는 그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마경에 진입하고, 천화련주가 보여 준 미래를 보았다.

“황극린은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두야랑을 납치했다고 알려라, 그게 진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모두가 나가자 천화련주의 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곧 볼 수 있겠군.”

긴장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 * *

“왜, 입맛이 없나?”

“아니, 그게 아니라…….”

두야랑은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황극린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이 이후가 막막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그녀를 찾을 테고, 천화련주와 황극린은 대립할 것이다. 두야랑은 처음 황극린을 보았을 때부터 그를 따라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황극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우란 동등해야 하지 않는가? 도움을 받았지만, 갚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걱정하지 마라,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이미 두야랑이 납치됐다는 이야기는 무림맹 전체에 퍼졌다.

천화련주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명분을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군.’

솔직히 혈마교주 혈황마제나 유령은 이해라도 됐다.

하지만 천화련주가 저리 움직이는 이유는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일을 벌이는가?

‘나를 잡기 위해?’

정확히는 황극린의 명성을 끌어내리기 위함이리라.

황극린이 팽여해의 전각을 나섰다. 그가 저리 당당하게 나온다면, 숨어 있는 건 하책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악소문이 생겨날 것이다.

“다녀오지.”

* * *

황극린이 정문을 통해 무림맹으로 들어섰다.

무림맹은 공식적으로 그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뭐, 뒷말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 황극린은 강호의 영웅이다. 혈마교주와 흑살문주를 처단했으니까.

젊은 무인들이 황극린에게 호감과 존경을 표했다.

간혹 황극린과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피하는 이들도 있다. 천화련주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황 대협, 맹주께서 맹주전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고맙소.”

귀빈각에서 머물던 황극린.

한 시진 만에 무림맹주의 부름을 받았다.

“오랜만이오, 맹주.”

“황 대협.”

맹주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했다.

황극린은 대뜸 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련주님의 뜻입니다.”

“당신은 천화련의 사상을 거부하던 것 아니었소?”

황극린이 정곡을 찔렀다.

사실 그가 천화련을 나서 무림맹에 온 것은 천화련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납치하여 피를 뽑는다. 그것만으로 천화련의 명성은 바닥을 칠 것이다.

“그건…….”

그가 대답하려 한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지.”

“…….”

암전된 공간.

어둠을 몰고 나타난 사내의 눈만이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천화련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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