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혼인식
천화련주의 혼인식.
상대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굳이 혼인식을 치르는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정당한 후계자를 내세우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천화련은 알게 모르게 전통을 신경 쓴다. 개방을 밀어내고 구파일방이 아닌 구파일련으로 세력 구도를 재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설마 두야랑인가.’
그녀의 출신은 만독문.
사흑련 중 하나의 축을 담당하는 문파였다. 다른 사대마제들이 황극린을 노리고 움직였지만, 그들만은 가만히 중립을 유지했다. 그게 두야랑의 입김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천화련과 만독문이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면?
만독문이 움직이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팽팽하게 대립을 이루던 정사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렇다면 만독문이 사흑련의 가장 높은 자리를 노리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만약 천화련과 손을 잡는다면, 그들은 분명 사파의 패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런 균형 따위는 솔직히 황극린의 관심 밖이었지만, 친우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과거 만년화리의 내단을 선뜻 내어 줄 정도로 황극린을 도와줬다. 천기피독신주라는 희대의 기물을 두야랑에게 빌려주긴 했었지만, 빌려준 것과 그냥 준 것은 다르다.
두야랑은 몇 번이고 만뇌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었다.
거기다 천화련주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황극린이 만뇌문을 나섰다.
* * *
황극린은 혼인식 날보다 앞서 무림맹에 도착했다.
연회 준비로 몹시 바빠 보였다.
‘굳이 왜 무림맹일까?’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무림맹의 지하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경이 존재한다고. 황극린은 무림맹에 여러 번 들렀지만, 마경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오래된 마경일수록 더 거대한 힘을 품고 있어야 한다. 마기라는 건,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극린의 감각에 감지되지 않았다는 건, 무언가 다르다는 걸 뜻한다.
그가 죽립을 푹 눌러쓴 채로 무림맹 안으로 진입했다. 굳이 정문으로 들어가서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이오.”
“헙!”
거한의 사내가 펄쩍 뛰어올랐다.
“누구냐!”
황극린이 죽립을 벗었다.
얼굴을 확인한 거한 사내가 감탄을 터트린다.
“황 장로님!?”
“오랜만이오, 팽 소협.”
황극린이 찾아간 건 팽여해였다.
그가 무림맹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와 그리 친분이 깊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림맹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맥 중 하나다. 팽여해가 황극린을 보고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린다.
“황 장로님의 위업은 멀리서나마 들었습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간악한 마두들을 손짓 몇 번에 쓰러트리셨다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 우상이십니다!”
면전에서 저리 말하니 부담스럽긴 했다.
거기다 손짓 몇 번이라니? 소문이 부풀려진 감이 있었다.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제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성대하게…….”
“내가 무림맹에 온 것은 비밀로 해야 하오.”
팽여해는 목소리가 워낙 커서 무식해 보이기도 했지만, 머리 회전이 느린 편이 아니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다고 판단했다. 황극린 정도의 절대고수가 무림맹에 정체를 숨기고 들어왔다? 그리고 팽여해를 찾아왔다고?
‘가, 감격이다!’
팽여해는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황극린을 안내했다.
현재 황극린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그 천화련주마저도 황극린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팽여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황극린은 먼저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말할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북해빙궁주가…….”
“그렇소.”
비밀.
처음엔 굳이 밝혀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황극린은 떳떳하게 무림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말이다.
언젠간 밝혀질 수도 있는 비밀이다. 거짓말을 하다 보면,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 낸다. 미리 밝혀 두는 게 훗날을 위해서 옳은 길이라 판단했다.
“미안하게 됐소.”
잠시 고뇌하던 팽여해였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부궁주께서 절 살려 줬던 것이군요.”
“어머니가 당신 이야기를 하더군. 든든한 친우를 뒀다고 말이오.”
“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소.”
부궁주는 팽여해가 황극린의 친우라 생각했다.
“크으으음……!”
잠시 어색한 미소를 짓던 팽여해가 진중한 얼굴로 말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빙궁주에 대한 원한은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나…….”
팽여해는 이제 하북팽가를 책임져야 한다.
“의미 없는 복수에 매달리고 싶진 않습니다. 빙궁주가 빙궁을 버리고 떠난 마당에 굳이 빙궁과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예, 부궁주님 덕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빙궁도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었겠지요. 솔직히 말하면… 하북팽가가 아무리 애써도 빙궁을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하하.”
빙궁주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빙궁의 힘은 아직 건재하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아닙니다.”
팽여해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팽여해는 황극린이 비밀리에 무림맹에 찾아온 목적이 궁금했다. 오늘 하지 못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으리라.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맹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화련주의 부인이 될 사람을 본 적이 있소?”
“아.”
요즘 말들이 많았다.
대체 천화련이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여인이 누구일까?
“맹주전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있습니다만… 소문일 뿐입니다. 혹, 황 장로께서는 그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대충은 알고 있소.”
“그렇습니까?”
설마 황극린과 관련된 여인일까?
그래서 이렇게 비밀리에 무림맹에 찾아온 건가? 설마 한 여인을 두고 천화련주와 황극린이 싸운다?
‘허허, 이거 내가 무슨 생각을…….’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 여인을 빼내려 하오.”
“예에!?”
팽여해가 깜짝 놀란다.
발칙한 상상이 정말이었다는 건가? 천화련주는 황극린에게 대놓고 보여 주기 위해 거창하에 혼인식을 치르고, 황극린은 무림맹에 몰래 찾아와서 여인을 빼내려고 한다니!
‘이것이 강호인가…….’
외부로 알려진다면 큰 파란이 일 게 분명하다. 황극린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미 혼인식 날이 정해진 상태에서 황극린이 부인을 납치하는 걸 누가 좋게 보겠는가? 물론, 무림맹 내에서도 천화련주의 혼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림맹주가 천화련 출신이니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전 황 장로님을 돕겠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뭔들 못 하겠습니까? 가문끼리 정한 혼약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라고 봅니다! 암, 그게 진짜 사랑이지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여인과 난 그런 사이가 아니오.”
“예? 그럼 왜…….”
“그녀에게서 온 서신이오.”
황극린이 팽여해에게 서신을 보여 준다.
“설마 천화련주께서 여인을 납치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확실한 건 이번 혼인은 그녀의 뜻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오.”
“그것대로 문제가 되겠군요.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곳에서 머물 수 있게 해 주시오.”
팽여해의 도움이 없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았다.
“그리고 소문 하나만 퍼트려 주시오.”
“소문 말입니까?”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출신이 사파일 수도 있다고 말이오.”
“그런 소문이야 금세 퍼트릴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답하던 팽여해.
그가 황극린의 말을 이해하고 깜짝 놀란다.
“사파 말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대체 천화련주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나도 그게 궁금하오.”
천화련주.
혈마교주에게 들어서 대충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다 늙어서 혼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후계자는 정해진 게 아닌가?
소문이 퍼진다면 천화련주도 대응을 할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으리라.
* * *
“아빠!”
“왜 그러느냐?”
만독문주 독수마제(毒手魔佛)가 두야랑의 시선에도 무심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두야랑은 그런 아버지의 표정에 더 열이 받았는지 욕을 마구 내뱉었다.
“진짜 미쳤어? 왜 내가 그딴 놈한테 시집을 가야 해? 노망이라도 난 거야? 독이라도 잘못 먹었어?”
“…….”
만독문주는 가만히 두야랑의 말을 들어 주다가 답한다.
“네게는 좋은 기회다.”
“조, 좋은 기회라고?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상대는 정파의…….”
“정파와 사파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천화련주는 나만 한 자식들도 있다고!”
“그들은 후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거다.”
두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털썩 주저앉는다.
몇 번이나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독수마제가 저리 지키고 있으니 빠져나갈 수가 없다. 거기다 바깥에서는 무림맹의 무인들이 엄중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
“그런 늙은이한테 만독문의 후계자를 팔아넘겨?”
“네가 못 봐서 그렇지, 천화련주는 너보다 젊어 보인다.”
“그니까!”
그게 더 짜증 난다.
명문가의 자제들은 보통 사랑 때문보다는 가문끼리 정하여 정략혼인을 한다. 그건 사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형제자매들도 유력 사파 문파의 자제들과 혼인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천화련주와 혼인하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혼인 통보를 받고, 두야랑은 한 번도 천화련주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난 만독문의 후계자라고!”
“만독문이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 위해서다. 너도 언젠간 이해할 것이다.”
“미치겠네.”
두야랑은 말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틈을 노렸다.
만독문주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독공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만독문주의 실력은 화경에 도달해 있었으며, 최근 더 강해진 상태였다.
두야랑의 실력으로는 탈출할 수가 없다.
몇 합에 제압당한 두야랑이 구석에 박혀 독이 바짝 오른 고양이처럼 만독문주를 노려보고 있다.
“너는 왜 그리 혼인하길 싫어하느냐?”
두야랑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 왔다.
이렇게 거부감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상대가 천화련주라서?
두야랑은 애초에 정파와 사파를 구분 짓지 않는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정파 무림에서 강호행을 한 경험도 있었다.
“난…….”
“설마 연모하는 사내라도 있다는 것이더냐?”
“있어! 나도 나이가 몇인데!”
“그럼 접도록 해라, 그 사내에겐 불행이 될 것이니. 천화련주는 무림 역사상 최고의 무인이다. 그리고 너는 다음 세대의 무림을 호령할 아이를 낳을 기회를 얻게 되는 거지.”
두야랑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로 만족하라는 건가?
‘아버지는 뭔가 바뀌었어.’
정사대전이 벌어지고.
천하에서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만독문주는 변하였다. 천화련주와의 만남이 그에게 무엇을 느끼게 한 것일까?
‘그냥 이대로 혼인을 해야 하는 건가…….’
두야랑은 솔직히 황극린이 도와주러 올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와 절친한 친우라 생각했지만, 천화련주와 적대할 만큼 친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어쩌면 친우에게 폐를 끼치는 것일 수도 있다.
“제기랄!”
“천천히 생각해라. 아비가 말하는 게 언제 틀린 적이 있었는지 말이다. 너도 언젠간 아비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야랑은 아버지를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 * *
소문이 퍼졌다.
천화련주가 혼인한다는 여인이 사파 출신이라는 소문.
당연히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천화련주가 이 나이가 되어서 무림맹에서 혼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림맹주가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정확히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무림맹의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
“요즘 무림맹 내에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헛소리를 내뱉는 자들이 있더군요. 제대로 단속하겠습니다.”
“허어, 맹주님의 귀에도 그런 발칙한 소문이 들어가다니…….”
“그건 사실이오.”
“……?”
놀라기보단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선 천화련주께서 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헉! 처, 천화련주님!”
어느샌가 무림맹주의 옆에 천화련주가 앉아 있었다.
무림맹의 장로들도 어디 가서 꿇리는 이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옆에 앉는 순간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기묘한 보법인가?
“나와 혼인할 여인은 두야랑.”
“두야랑?”
“만독문의 후계자다.”
“……!”
모두가 경악한다.
만독문이라니?
무림맹주는 장로들의 경악을 이해했다. 그 또한 처음 명단을 받고 충격에 빠졌기 때문에. 더 큰 문제는 천화련주의 혼인이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거다. 뭐, 모든 게 무림의 평화를 위한 길이었으니…….
맹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파와의 맹목적인 전쟁은… 당장 우리가 승리할 수는 있어도 백 년이 지난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적이 없는 정파에선 타락한 변절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겠지요.”
천화련주가 맹주의 말을 이어받는다.
“내가 원하는 건 세상의 공존과 균형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들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취해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