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각자의 선택
충격적인 패배와 죽어 가는 육신으로 혈마교주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확히는 확신을 품고 달려간 길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과연 황극린이 선경이었다고 하더라도 혈마교주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모르겠군.’
혈마교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될 줄 알았건만, 막상 선경이라 추정되는 황극린과 마주하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던 건가.’
천화련주를 따라잡기 위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눈앞의 황극린에게 패배했다. 그는 마기를 다루지 않았다. 절대적이라 믿고 있는 가치가 부서진 것이다.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면 달라졌을까?’
혈마교주는 끊임없이 고뇌했다.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었지만, 그의 상념은 멈추지 않았다.
* * *
“천화련주가 무림맹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만뇌문의 정보 문파 무문의 문주 교특범이 보고를 올린다. 천화련주가 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듣고, 무문은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천화련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다행이라고 할 점은 천화련주를 제외한 다른 무인들은 천화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천화련주가 만뇌문을 적대시할까요?”
“아마 그럴 것이다.”
혈마교주가 죽는 순간에도 거짓으로 농락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천화련주. 황극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가 천화련주를 이겨 주길 바랐다.
“왜 굳이…….”
교특범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평화롭게 살아가면 안 되는 건가? 말은 안 했지만, 교특범은 매일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 혈마교와 흑살문 그리고 북해빙궁이 만뇌문을 노렸다. 평범한 문파였다면, 그들 중 하나만 적대시해도 멸문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런 난관을 뚫고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지만, 이젠 천화련주가 황극린을 적대시할 수도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처음엔 혈마교주가 거짓을 고했으리라 판단했다. 정파의 내전을 바라고 죽기 전에 꼼수를 부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황극린이 혈마교주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특범도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뭘 원하는 것일까요?”
“만나 보면 알겠지.”
“직접 만나실 생각입니까?”
“기회가 된다면.”
황극린 또한 문파와 문파끼리의 싸움으로 번지길 원하지 않는다.
만뇌문이 아무리 정파 내에서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도, 천화련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오래전 무림을 구한 영웅. 천화련은 구파일련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했다. 거기다 천화련 출신이 무림맹주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사파와의 싸움에서 정파인들은 만뇌문의 편에 설 것이다.
그렇지만 천화련과 만뇌문이 대립한다면?
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황극린은 사실 정파니 사파니 구분 짓지 않는다. 결국, 생존을 위해 제각기 판단을 내릴 뿐이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내력을 다 회복하지 못했다.’
황극린은 사대마제 중 두 명, 유령과 맞붙으며 내력 대부분을 소진했다. 이처럼 많은 내력을 한 번에 소모한 적은 없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언제나 꽉꽉 차 있었던 황극린의 단전.
막상 비워 내고 나니 그 단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소우주(小宇宙).’
경험이란 인간을 달라지게 만든다. 이것이 황극린의 첫 번째 삶이었다면, 그의 깨달음의 한계가 존재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떠올리기조차 힘든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무공의 끝이 무엇일까?’
여기서 단전을 더 넓히다 보면 끝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
보통 그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면 멈추거나 뒤를 되돌아보기 마련이었지만, 황극린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것은 아직도 수없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즐거웠다. 오히려 천화련주와의 싸움이 기대된다.
혈마교주와의 싸움에서.
유령과의 전투에서.
흑살문주와의 대립에서.
그는 또 배운 게 있었다.
“연공실에 있겠다. 다른 소식이 있다면 전해 다오.”
“예, 장로님!”
황극린은 즐거운 얼굴로 연공실로 들어섰다.
거기다 홀로 명상만 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 현재 만뇌문 내에는 사대마제 중 하나인 빙궁주와 소림의 무학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뇌불도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흑주가 존재했다.
‘세 마인의 마기를 취한 흑주.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그것도 황극린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 * *
“나는 곧 한계에 도달한다.”
“한계라고 하심은…….”
“전대 련주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이지.”
전대 련주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일정 수준에 오른 무인들의 수명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길다. 환골탈태와 반로환동. 과거엔 무공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길이라 여기는 이도 있었다. 그렇기에 무신이라 불렸던 역대 천화련주들의 죽음은 충격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다.
늙어서 죽는 것도 아니다.
대체 왜 죽는 걸까?
“하나, 지금 당장은 죽을 수 없다.”
“예?”
의문스러운 말이었다.
무림맹주 계립은 천화련주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에겐 탐욕이나 욕망 따위는 없었다. 무언가를 달관한 듯한 얼굴이랄까. 득도한 고승들의 표정이 저렇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무신의 경지에 오른 천화련주들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눈앞에 있는 천화련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것일까?
왜?
의문이 떠올랐다.
“다시 후계를 봐야 한다.”
“예?”
이것도 의아했다.
“네가 할 일이 많다.”
지금 천화련주는 아내나 첩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여인을 구하라는 말인가? 물론, 천화련주의 외모가 어딜 가서 빠지진 않지만… 지금 나이에 새장가를 간다면 무림인들이 손가락질할 것이다. 사실 무림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천화련주는 모든 무인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으니까.
“제가 주선하라는 말입니까?”
“혈통이 뛰어난 이들로. 명단이다.”
“…….”
맹주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후계라면 천재라 불리는 소련주 계빈이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만약 천화련주가 전대 천화련주와 같은 길을 간다면 슬퍼할 수도 있었다. 그가 직접 나서 사파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걸 인정하니까. 그러나 지금 그가 하는 선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화련주는 맹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게 보여 주마, 세상의 미래를.”
천화련주의 말에는 절대적인 위엄이 깃들어 있다. 무림맹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걷게 되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무림맹주조차 알지 못하는, 무림맹의 지하였다.
* * *
“본녀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다.”
황극린이 묘한 얼굴로 빙궁주를 마주한다.
“아이야, 이제껏 미안했구나.”
미친년처럼 발광하던 과거. 사위로 맞이하겠다며 날뛰던 빙궁주는 눈앞에 없었다. 어느샌가 눈가의 주름도 늘어났다.
“어머니처럼 치료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빙궁주는 고개를 젓는다.
“본녀의 염원은 그게 아니란다.”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부궁주 한소연이 죽어 가던 것처럼, 빙궁주도 마찬가지였다. 마기라는 것은 사용자를 죽이는 힘이다. 일정 형태로 변환된 죽음은 그들의 자식에게마저 이어진다. 빙궁에서의 저주는 사내가 절대 태어나지 못하는 것. 그걸 깬 존재가 황극린이다.
“본녀는… 아니, 나는 많은 죄를 지었지.”
“…….”
“내가 살아 있음으로, 네게 폐가 될 것이다. 정파인들이 지금 네 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트집을 잡을 거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 원한이 쌓이고 쌓여… 네가 이룬 것들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겠지.”
“절 위해 죽겠다는 겁니까?”
“날 위해서이기도 하단다.”
모순된 말이었지만, 황극린은 빙궁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젠 좀 쉬고 싶구나.”
처음 빙궁주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희대의 광기를 보았다. 어느 한 것에 집착하여, 그것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녀가 왜 그렇게 살아왔을까? 황극린이 보았던 회생비록 중에서는 북해빙궁과 관련되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다른 빙궁도들은 제가 치료해 보겠습니다.”
빙궁주가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구나.”
그렇게 떠나가려는 빙궁주.
황극린이 묻는다.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북팽가주… 전대 맹주는 왜 죽인 겁니까?”
단순히 무림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유가 있으리라.
“무림맹의 지하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경이 존재한단다.”
또 마경인가.
“놈이 그것을 탐했다고 들었었지. 어쩌면 놈에게 해결책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빙궁주가 말하는 해결책이란, 저주의 해주를 말하리라.
“결국,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빙궁의 신물은 소연이에게 맡겼단다. 난 중원을 떠돌 생각이다.”
황극린의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그녀는 결국 죽는다.
결국, 죽기 전 세상을 돌아보겠다는 말이었다.
“만약 천화련주가 천화련을 동원한다면 몰래 나서도록 하마.”
“괜찮습니다. 아마 그러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음흉한 그놈이라면 그럴 테지.”
황극린이 허리를 숙인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고맙구나.”
빙궁주는 가벼운 걸음으로 만뇌문을 떠났다.
그녀는 만뇌문에 있으면서 황극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었다.
‘고달픈 삶이었겠구나.’
어머니 한소연은 어릴 때 떠나갔으며, 아버지 또한 죽었다. 어린 황극린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핏줄로 엮인 황씨 가문이었다. 거기서 황극린은 노예처럼 살았다고 했다. 북해빙궁 전체의 비극과 비교하면 작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운명이었으리라.
빙궁주는 그래서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언젠가, 간악한 인간들이 만뇌문을 노릴 수도 있다. 지금이야 천하제일의 문파로 꼽히고 있지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구해 주도록 하마.’
왜 그녀라고 하나밖에 없는 손주의 곁에 있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결국 만뇌문에 피해가 가게 된다.
‘언젠가 그 아이들은 네게 힘이 될 것이다.’
무엇을 예견한 것일까?
아니, 기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빙궁주는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 * *
“천화련주가 혼인한다고 합니다.”
“혼인?”
“예…….”
나이가 나이다 보니 천화련주의 혼인 소식에 무림은 난리가 났다. 당장이라도 사파를 쓸어버리자는 목소리는 천화련주의 발표에 쏙 들어갔다. 마치 의도적으로 여론을 잠재우려는 듯한 움직임이다.
왜 굳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군.”
“현 천하제일인으로 추정되는 존재와 사돈지간을 맺으려는 이들은 많으니까요.”
“축하해 줘야겠군.”
“초청에 응할 생각입니까?”
황극린의 손에는 무림맹주가 보낸 초청장이 있다. 천화련주의 혼인은 뒷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겉으로는 대부분 축하하고 있다. 황극린도 그럴 생각이다. 그와 만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을 해소할 생각이었다.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갈 것이다.”
교특범은 황극린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만뇌문도들은 짐이 될 뿐이다. 만뇌문의 문도들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확실히 다른 경계에 걸쳐 있었다.
그들을 보호하려다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거다.
오히려 황극린이 홀로 움직이는 게 더 편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랑 혼인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혼인하는 존재가 누군지 초청장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건가?
“알아보겠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라는 것만 알려진 상황입니다.”
“알겠다.”
혼인은 석 달 뒤.
갑작스러운 발표에도 불구하고 정파 무림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작게 연회를 연다고 하지만 그 혼인식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참석하는 이들은 인맥을 쌓을 수 있으리라.
황극린은 그때까지 혈마교주와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들을 정리했다. 그는 무학을 익히면 익힐수록 끝이 없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무공이란 참으로 기묘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만뇌문에 전서구가 도착했다.
- 극린, 나 탈출하는 것 좀 도와줘!
본 적이 있는 필체였다.
“두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