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04화 (304/316)

304화 이유

어두운 방.

사방에 거미줄이 쳐진 장소에서 사내는 눈을 떴다.

“여긴…….”

- 끼이.

혈마교주가 입을 떼자마자 붉은빛이 번뜩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와 비슷하다. 그게 여덟 개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크윽.”

살을 찢는 고통.

전신을 누르는 무력감.

혈마교주가 살아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단전이 부서진 건가.’

순간, 당시의 패배가 떠올랐다.

‘어떻게 내가 패배한 거지?’

지금도 그게 궁금했다.

그가 선경이라서? 정말 그가 선경이라는 말인가? 선경이라면 어떤 무공을 익혀도 마기를 품은 자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건가?

온갖 의문이 그의 뇌리를 감싸고 있을 때.

그의 시선에 밟히는 존재들이 있었다.

‘둘 다 패배했다는 말인가.’

유령과 흑살문주.

두 사람은 거미줄에 꽁꽁 묶여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기대고 있었다. 단전이 깨어진 탓인지 황극린에게 당한 상처 탓인지, 혈마교주의 감각은 예전만 못하다. 그들의 숨소리조차 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허무했다.

혈마교의 교주가 이렇게 패배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혈마교주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의 삶에서 패배란 곧 죽음이었다. 전대 천마들처럼 후대에 모든 것을 맡기고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혈황마제였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회생비록에서 보았던 글귀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깨어났나.”

- 끼이이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무언가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그래. 자주 못 봐서 미안하구나.”

- 끼이익!

“…….”

흑주는 생각보다 훨씬 몸이 작아진 상태였다.

황극린은 흑주의 인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사람의 얼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어색함이 없었다. 물론, 얼굴만 대롱대롱 흑주의 등에 붙어 있었으니 기괴하다면 기괴했지만, 황극린은 그 변화의 끝에 어떤 결말이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황극린이 혈마교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흠칫.

혈마교주는 기세에서 눌려 버렸다.

언제나 하늘 높이 올라 만인을 내려다보던 혈마교주였지만, 한 번의 패배가 그를 달라지게 했다.

“크흐흐…….”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혈마교주가 광소하기 시작한다.

황극린은 그런 혈마교주를 내려다볼 뿐이다.

“왜 웃지?”

“왜 날 살려 준 거지?”

혈마교주가 황극린을 응시한다.

패배감으로 얼룩진 눈동자였지만, 그에겐 한 가닥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그 기묘한 조화에 황극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가?’

혈마교는 이미 천흉과 마령이 장악을 시작했다.

부교주들은 모두 죽었고, 혈마교주는 이 자리에서 잡혔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두 여인이 혈마교를 손에 쥘 수 있으리라.

“그냥 죽이기엔 아쉽더군.”

“너도 겁이 나는 게 아닌가?”

“겁이 난다?”

“네 나이에 비하여 비대한 힘을 얻었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기에 내게 묻고 싶은 게 아닌가? 회생비록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궁금하긴 하군.”

하지만 황극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없다.”

황극린은 거의 반기절 상태로 사흘을 누워 있었다. 아직 완전히 단전의 내력이 채워지지 않았다. 단순히 내공의 양으로 따지자면 황극린은 하단전에 거의 3갑자에 달하는 내력을 채워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3갑자라고 하더라도, 내공의 질 자체가 다르다.

그의 운기행공 속도는 보통 명문가의 심법보다 몇 배는 빨랐지만, 회복하는 속도가 훨씬 느렸다. 그렇기에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힘은 순리에 맞았다. 저들이 사용하는 마기와는 다르게 말이다.

“…….”

혈마교주는 황극린의 말을 확인해 보겠다는 듯이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소교주로 책봉된 제1공자 마영비보다 어리다고 했던가? 참으로 괴이한 재능이라 할 수 있다. 혈마교주도 천재였지만, 황극린 앞에선 초라해질 따름이었다.

“뭘 알고 싶지?”

“말해 줄 건가?”

혈마교주가 웃음을 흘렸다.

“너도 곧 죽을 테니 말해 주마.”

“내가 죽는다?”

“오해는 하지 마라. 난 네가 죽지 않길 바란다, 진심으로.”

모순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혈마교주는 실없는 말장난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회생비록이 뭔지 알고 있나?”

“확신은 아니지만, 추측은 하고 있다.”

“뭐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심득을 담은 서책.”

회생비록을 보다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는 것이다. 황극린이 본 회생비록의 공통된 주제라 할 수 있다. 천하를 격동시킬 재능을 가진 존재들은 하나같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뭐, 그게 회생비록의 정본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회생비록의 존재가 비밀스러운 것치고는 꽤 수가 많았다.

“내 힘에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건가?”

혈마교주는 눈을 감고 잠시 침묵했다.

그는 황극린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의 힘에서는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기를 품지 않고도 어찌 그런 힘을 낼 수 있는가? 황극린의 힘에 대가가 따를 것인가?

“아마도.”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건…….”

혈마교주가 대답하려 할 때.

흑살문주가 발악하듯 외쳤다. 두 사람의 대화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네놈…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무영심결을 알고 있었지?”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

고함을 치며 피를 토해 낸다.

“네가 보여 줬으니까.”

“뭐……?”

흑살문주는 황극린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놈의 간악한 손길이 흑살문에 뻗어 있다는 말인가? 혈고독에 지배당하는 살수들이 어찌 황극린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말인가?

“흑주, 저놈의 입을 잠시 막고 있어 주렴.”

- 끼이!

“읍읍-!”

흑살문주가 발버둥을 쳤지만, 이제는 흑주에게도 제압당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혈마교주가 피식 웃었다. 처음엔 황극린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게 되니 왜인지 마음이 편해졌다.

이런 기분이던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의 죽음은 추했었지.’

혈마교주 또한 수많은 마인을 제 손으로 베었다.

형제자매뿐 아니라 단순히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죽인 이들도 있다. 그리고 혈마교주가 죽인 존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이자 전대 천마였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황극린과 천화련주를 생각하면, 그가 이대로 살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룰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차라리 눈앞의 존재에게 도움이 되자.

“천화련주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천화련은 비밀이 많은 문파였다.

“중원인들을 납치하여 피를 뽑아낸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너희와 비슷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도.”

혈마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가 이상하지?”

“과거의 천화련주는 혈교를 무림에서 몰아냈다. 마교 또한 멸문 직전까지 몰아붙였지. 그러나 혈교와 마교는 현재 건재… 하진 않군.”

황극린에게 당해서 혈마교의 최상위 마인들이 싹 다 쓸려 버렸다.

뭐, 십만대산에 남은 교도들과 오로목제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구파일련 하나 정도는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혈마교주의 성에 차지 않는다.

“당시 천화련주는 의도적으로 혈교와 마교를 살려 뒀다.”

“왜지?”

“알 수 없군. 천화련의 지하에 만든 인간 사육장처럼 우리를 길들이려 했던 것일 수도.”

“길들이려 했다?”

“그들은 인간의 피를 이용한 무공을 익힌다. 정확히는 천화련의 피를 이은 놈들은 인간의 피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

“너희의 피를 뽑기 위해 내버려 뒀다는 건가?”

“정확히는…….”

“그딴 추잡한 이유가 아니다.”

혈마교주의 말에 끼어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유령이었다.

“유령.”

황극린이 유령을 바라본다.

그는 죽어 가고 있다. 혈마교주와 흑살문주의 상태도 심각했지만, 그는 더했다.

“천화련은 중원의… 아니, 세상의 균형을 수호한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황극린은 천화련에게 공이 있다는 걸 이해한다. 그들의 존재가 중원의 평화를 지켰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 모두의 균형이라 말할 수 있을까? 뭐, 거기까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균형은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그들을 이해한다는 건가?”

“이해할 뿐이다.”

“…신기하군. 너는 화가 나지 않는 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천화련이 의도하여 만들어 낸 세상의 질서다. 혈교와 마교는 합쳐졌으며, 천화련은 구파일련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중원은 천화련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

“천화련이 아닌 배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넌 화를 냈을 건가?”

유령은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그런 마음가짐인가.”

천화련이 어떤 짓을 해 왔든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하나 분노하자면 너무 따질 게 많았다. 세상은 완벽하게 짜 맞춰 돌아가지만, 모두에게 평등이나 균형의 기회가 돌아가진 않는다.

“보통 너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들은 자아를 현실에 투영하려 하지. 보는 눈이 달라져서일까? 아니면 거대한 힘은 자연스레 주위를 변화시키기 때문일까? 너무 확신하진 말아라, 훗날 너 또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으니.”

“경계하도록 하지.”

“…….”

만약 황극린의 삶이 처음이었다면, 힘에 취해 살아갔을 수도 있다.

소위 강호라 불리는 장소. 아니,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대개 그러하다. 명예나 돈이나 힘. 하나가 충족되면 다른 것을 채우려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살아가며 쌓아 온 이상을 실천하려는 존재들도 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황극린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막상 이루려고 하면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죽었나.”

유령에겐 조금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어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황극린의 뇌혼에 가장 많이 당했으니까.

혈마교주는 잠시 유령을 바라보다가 황극린에게 말한다.

“천화련주는 강하다. 네 명이 합공했는데도 패배했지.”

“그가 날 노릴 거란 말인가?”

“그 또한 마기를 품고 있다. 네가 정말 선경이라면… 노리겠지. 유령의 말대로라면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

“천화련주는 너희와 같은 무공이 익힌 게 아닌가?”

“전대 천마들은 천화련이 혈교와 마교의 무공을 훔쳤다고 생각했다.”

혈마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땐, 아닌 것 같군.”

유령이 살아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물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천화련의 그림자로서 살아왔으니까. 천화련주의 의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면했으리라.

“내가 천화련주에게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웃었던 건가?”

“유령이 말하더군. 심장이 꿰뚫렸는데도 천화련주는 살아났다. 우리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마기의 이해도가 높다. 네 뇌전이 마기와 상성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마기 또한 네 뇌전의 상성이 되는 법이지.”

쉽지 않다.

혈마교주의 의견이었다.

“굳이 이렇게 다 말해 주는 이유는 뭐지?”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혈마교주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사실은 천화련에 복수하고픈 마음이 더 크다.”

“복수라.”

“너희가 말하는 사파인들에게 적당한 이유가 아닌가?”

“그렇군.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만약 내가 선경이었다면 넌 어떻게 하려 했나?”

“…….”

황극린의 질문에 혈마교주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엔 혼란이 떠올랐다.

“대답하기 곤란한가?”

“아니.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 질문을 들으니 또 생각이 많아지는군.”

“만뇌문에 쳐들어올 때, 어떤 생각을 했지?”

“네가 만약 선경이라면… 널 차지하여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려 했다.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경지에 올라 천화련주를 무릎 꿇린다, 그리고 역대 천마 중에서 최초로 무림일통을…….”

말을 하던 혈마교주가 인상을 썼다.

“…왜인지 의미가 없군. 분명 너와 싸우기 전까지는 분명히 확고한 목표였는데 말이다.”

혈마교주는 누구나 선망하는 실력을 가진 분명 최고의 무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혈마교주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아니, 인간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정답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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