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03화 (303/316)

303화 천하제일

유령. 놈에겐 쌓인 게 있다. 과거 뇌불을 주화입마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었으며, 천화련에 납치한 전적도 있다. 또한, 그가 속한 배교가 황극린을 공격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혈마교주나 흑살문주와 함께 만뇌문을 공격했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 놈……!”

견디다 못한 유령이 그림자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흑살문주와 매우 흡사한 방식의 내공 운용이었다. 세련됐다고도 할 수 있다. 유령이 펼치는 무공이 중원에 퍼진다면 강호의 무학은 몇 단계는 더 상승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황극린의 뇌전은 유령의 무학과 상성이었다는 점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순수한 힘. 그것의 모든 장점을 모은 듯한 마기. 황극린의 뇌전은 마기를 녹이고 찢는다.

뇌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유령은 유령보(幽靈步)를 펼치지 못했다.

“켁!”

유령의 품위와 맞지 않는 신음이 터져 나온다. 황극린의 주먹이 박힐 때마다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건 기본이고, 머릿속에서 뇌전이 폭주한다. 다른 생각 따위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만 떠올랐다.

“어딜.”

생명의 위협에서 펼친 유령의 신법과 보법은 현란했다. 그러나 단순한 황극린의 권격에 가로막히고 만다.

콰지지직-! 퍼억!

퍽. 퍽. 퍽. 퍽. 퍽.

“끄어어……!”

뇌혼.

황극린이 만들어 낸 마지막 뇌전의 단계. 그의 주먹은 단순하게 보였지만, 그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최상승의 무학에 도달한 이들은 의지만으로 강철을 베어 버린다고 한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주먹에 담긴 힘은 황극린이 깨우친 모든 심득을 담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유령이 최후의 수를 던진다.

“내가… 여기서… 당할 것…….”

유령의 몸에서 칠흑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황극린이 눈을 가늘게 뜬다. 어찌 보면 혈마교주가 펼친 담축성과 비슷한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마기라도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이 말이다.

혈마교주가 펼친 담축성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인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유령이 펼친 그림자는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림자가 닿은 모든 기(氣)가 그 자체로 소멸하고 있다.

결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확실히 다르다.

황극린은 눈을 번뜩였다.

뇌혼을 발동하고 있는 황극린은 오감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마기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눈에 선하게 보이고 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무공이다.”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그림자가 황극린의 심장에 도달했을 때.

황극린이 말한다.

“하나, 부족하다.”

황극린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중단전에 쌓아 왔던 뇌기가 황극린의 전신에서 일렁였다.

콰지지지지직-!

마기에 반발하듯 세차게 튀어 오르는 뇌기. 스치는 모든 존재의 기 자체를 말끔히 지워 버리며 돌진한 유령의 검은 창날이 우뚝 멈춘다. 뇌기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

유령이 경악이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어찌 마기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피를 토하듯 외치는 유령.

황극린이 무심하게 답한다.

“그야 내 뇌전이 더 강하니까.”

“그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는 유령. 황극린이 검은 창날을 손으로 잡는다. 뇌혼의 기운으로 반탄지기를 구성한 황극린이었지만, 짜릿한 느낌이 든다. 상성이라는 말은 황극린이 품은 기운도 마기에 소멸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황극린의 말이 맞았다.

그가 품은 마기보다 황극린의 뇌기가 더 강할 뿐이다.

“이름이 뭐지?”

황극린의 물음에 유령은 답하지 않는다.

그의 전신에서 솟구치는 어둠이 점점 깊어진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기 시작한 것인지 그의 육신마저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끝을 보도록 하지.”

그 말과 동시에 황극린이 잡은 검은 창날이 크게 휘청였다.

까드드드득-!

황극린이 만든 뇌전이 검은 창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기의 존재마저 소멸시키며 전진하던 유령의 검은 창날이 역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순식간에 뇌기가 유령에게 닿았다. 그의 마기는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라졌으며, 도리어 그의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

“커, 억……!”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은 칠공에서 피를 토했다.

“말도…….”

안 돼.

결국, 유령은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뇌기에 반발하던 마기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검은 창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극린이 고개를 돌렸다.

절대자가 보인 위용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그 북해빙궁의 궁주마저도 멍한 얼굴이었으며, 흑살문주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겨우 빙궁주의 한빙백골소혼장의 여파에서 벗어났지만, 움직일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가 마지막인가.”

기세등등하게 도착했던 혈마교의 부교주들을 비롯하여 흑살문주가 몸을 떨었다. 유령이 제압당했으니 다음 차례는 당연히 그들이었다.

황극린의 무심한 시선이 그들에게로 옮겨졌다.

* * *

상황은 만뇌문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황극린뿐 아니라 빙궁주를 비롯하여 뇌불까지도 전투에 나섰다. 혈마교의 부교주들은 차례차례 제압당했으며, 흑살문주 또한 황극린의 뇌혼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압도적인 승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모두가 흥분하여 황극린을 바라본다. 승리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그였으니까.

황극린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한다.

“…아직 청성산 곳곳에 불이 있소.”

황극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부궁주가 가장 먼저 그의 이변을 깨달았다.

“황 공자!”

부궁주가 미친 듯이 달려가 황극린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약쟁이 놈을 불러라!”

뇌불은 성수신의를 약쟁이라 칭한다. 뭐, 영약을 다루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야월이 황급히 만뇌문으로 복귀하여 성수신의를 데려온다. 모두가 긴장 가득한 얼굴로 성수신의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

빙궁의 궁주와 부궁주의 서늘한 시선.

뇌불의 분노.

성수신의는 오랜만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황극린의 맥을 짚었다.

“크으음…….”

“뭐야? 상태가 많이 안 좋으냐? 겉에는 상처가 없는데?”

“저들이 방출한 마기에 침식당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녀에게 방법이 있느니라!”

“그건 안 됩니다!”

빙궁주와 부궁주가 격돌하고.

뇌불은 보관 중이던 영약들을 잔뜩 들고 나왔다.

“…잠들었습니다.”

“뭐야! 잠에는 뭐가 좋지? 이 영약이 어떠냐?”

“북해로 데려가야 하느니라! 본녀가 업겠노라!”

난리 법석인 두 사람과는 달리.

한소연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성수신의가 황극린의 육신을 가장 잘 안다는 걸 파악하고 있다.

“잠들었다고 하셨나요?”

“예, 단전에 기운이 텅텅 비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내상은 전혀 없습니다. 숨소리도 고르고요. 심장이 너무 빨리 뛰긴 합니다만…….”

“심장? 심장이 안 좋다고?”

“본녀가 말했듯이…….”

성수신의가 황급히 말한다.

“황 장로께서는 혈풍뇌전신공을 익혔습니다. 문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혹시 모르지 않느냐!”

“그래도 문제가 아니더냐. 잠이 들면 심장이 더 얕게 뛴다는 것은 모두가…….”

“조용!”

한소연의 살의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빙백마후조차도 부궁주의 저런 살기를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작은 잡초 하나 꺾기 힘들어했던 아이였다. 그런 부궁주가 좌중을 압도하는 살의를 발산하고 있었다.

“황 공자님께 필요한 건 휴식입니다. 그러니 모두 물러서세요.”

부궁주가 황극린을 등에 업었다.

“문주님, 뒤처리를 부탁드립니다.”

부궁주의 날카로운 시선에 뇌불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교주나 흑살문주 그리고 유령은 죽지 않았다. 실로 괴물 같은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저들의 단전을 폐하고, 뇌옥에 가두어야 한다.

“마녀, 넌 나와 이들을 처리하자.”

“…….”

마녀라는 말에도 빙궁주는 가만히 떠나가는 부궁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뇌불은 왜인지 빙궁주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빙백마후가 슬퍼한다고?’

뇌불은 혀를 차고, 유령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빙궁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혈마교주와 유령 그리고 흑살문주가 쳐들어오는 순간에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만뇌문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으리라.

* * *

스으으으으-

황극린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간의 기운이 흔들린다. 뇌불은 당혹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이건 대체 뭐냐?”

“저도 잘 모르겠군요…….”

“자면서 운기행공이라도 한다는 건가?”

어떤 공간이라도 기(氣)가 가득하다. 물론, 조금 더 풍성하고 정순한 기운을 내포한 공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만뇌문이 터를 잡은 곳은 청성산의 중심부다. 그렇기에 기가 부족할 일은 없다. 그러나 황극린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기가 부족해지는 것 같았다.

“무지한 것은 여전하구나.”

빙궁주의 말에 뇌불이 인상을 쓴다.

“너는 뭘 알고 있다는 것이더냐?”

“마경은 주변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그 거대한 힘을 유지하려면 당연한 게지.”

“극린이가 마경이라고?”

“아니, 선경이다.”

뇌불도 황극린에게 마경과 선경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괴한 공간 따위가 아니다.

반박하려던 뇌불이었지만, 그 또한 화경에 이른 고수였기에 대충 빙궁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기야, 그런 괴물들을 이겨 버리려면 내공의 질 또한 차원이 다르겠군.”

“그런 셈이지. 아마 단전의 내공이 다시 채워지면 깨어날 것이다.”

“으음…….”

황극린은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근래 하루 한 시진도 자지 않고 움직였던 황극린이다. 이번 기회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성수신의도 황극린의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 그는 황극린의 체질을 개선하며 가장 가까이서 그의 몸을 지켜본 의원이었다. 그를 의심한다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운기행공으로 내 내공도 뺏어 가는 건가?”

뇌불이 말하자 빙궁주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선경의 위대함이로군. 본녀의 내공도 저 아이에게 일부 흘러가고 있다.”

그러자 뇌불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빙궁주를 바라본다.

“네년, 설마 허튼 생각을 품은 건 아니겠지?”

“내가 손주를 해할 것 같으냐?”

“…….”

손주라는 말에 뇌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충격적인 소식이 중원 무림에 알려졌다.

흑살문주 암혼마제(暗混魔帝).

혈마교 혈황마제(血皇魔帝).

배교주 유령(幽靈).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던 초고수들의 충격적인 패배. 거기다 멸문한 줄로만 알았던 배교가 존재했었으며, 천화련의 유령이 배교주였다는 소식까지 알려지자 중원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중에서도 강호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단연 황극린의 무위였다.

저들의 합공을 어떻게 막아 냈느냐?

무신이라 불리던 천화련주도 저들의 합공에 패배했다고 한다. 물론, 황극린은 하나씩 각개격파를 했으며 빙궁주가 황극린의 편에 섰기에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지만, 중원인들의 입장에선 아니었다.

“파천뇌권 대협이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이 아닌가?”

“천하제일? 그런 업적을 달성한 무인은 전무하다네! 고금제일인이라 칭해도 모자라지!”

“그래도 과거 혈교와 마교를 몰아낸 천화련주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파천뇌권 대협이라도 당시의 천화련주와 비교할 수는 없지!”

“자네, 아직도 그분을 파천뇌권이라 칭하는가?”

“그럼?”

“뇌신(雷神). 중원에선 황 대협을 그리 칭하고 있다네.”

무신(武神)이라 불리는 천화련주와 충돌하는 별호.

중원에서는 천화련주와 황극린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중원인들이었다.

세간의 관심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자 고금제일인이라 불릴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로 향했지만, 그런 논쟁을 불식시키는 이들이 있었다. 구파일련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이었다.

사흑련의 수장들이 패배했다. 이제 정파의 논리를 중원을 넘어 새외까지 뻗어 나갈 것이다. 진정한 정파의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파인들은 내부 분쟁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중원인들은 그들이 만든 여론에 동조했다.

그러나.

대다수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결국, 균형이 깨졌군.”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방.

옥좌에 앉은 존재가 충격적인 소식에도 무심한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전을 나선 그의 손에는 한 권의 서책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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