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달라진 위상
“이건… 말… 도…….”
종남의 장문인 만패불성.
그는 칠대고수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자라 알려져 있다. 검강을 환으로 엮어 내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검강은 굳세고 강직하여 어떤 것이든 베어 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난생처음 베어 내지 못하는 것을 마주했다.
“커헉!”
피를 토하며 물러서는 만패불성.
“대,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혈마교의 힘은 과대평가되었다.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리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혈마교는 대규모의 군세를 이끌고 만뇌문 하나 처리하지 못했다. 황극린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와 뜻이 통하는 명문거파의 장문인들과 명문가의 가주들과 함께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혈마교를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부교주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한 명, 한 명이 천하칠대고수에 비견될 만큼.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전력을 가지고도 만뇌문을 멸문하지 못한 건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발칙한 상상.
어쩌면.
“설마 네놈들은… 만뇌문과 한패였던 것이더냐!”
피를 토하며 외치는 만패불성.
그게 아니고선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부교주가 이런 실력이라면, 교주는 어느 정도일 것인가? 그들이 작정하고 만뇌문을 치려 했다면, 하루 만에 멸문지화를 당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뇌문에서 죽은 이는 없다고 했다.
만패불성의 참신한 깨달음에 섭혼요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만패불성은 그 미소를 오해했다.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버티고 있던 위지세가의 가주 또한 처절한 탄식을 쏟아 냈다.
“어찌 이런 일이! 모두 우리를 꿰어 내기 위해서였는가!”
“제기랄! 이걸 맹에 알려야 하외다!”
공동의 장문인까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혈마교주가 말한다.
“이제야 그걸 눈치챘군.”
“……!”
사실 혈마교주는 강호에 혼란의 불씨를 지필 생각이었다.
저들을 모두 죽이고, 사천당문이나 아미파 그리고 만뇌문을 제외한 다른 문파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황극린이 만뇌문에서 벗어난다면 마경과 흡사한 그 공간에서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멍청한 정파 놈들의 착각을 보고 있자니 더 수월한 길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너희는 살려 둘 수 없겠군.”
만패불성이 외친다.
“모두 도망쳐야 합니다!”
이미 세 명이 죽었다.
“최소한 한 명이라도 살아서 강호에 진실을 전달해야 합니다!”
어쩌면 별 효과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저놈들 하나 살려 주는 대가로 불화의 불씨를 만들 수 있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모두 죽여라.”
- 하나만 놓치도록.
상반된 명령을 전음으로 내린 혈마교주.
그의 말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세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 * *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림맹 섬서성지부.
그곳에 도착한 종남파의 장문인 만패불성. 그는 팔 하나를 잃었으며,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거파의 장문인의 몰골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하지만 섬서성지부엔 종남의 제자들이 많았다.
“장문인!”
“어, 어찌 된 일입니까. 이게 대체…….”
만패불성이 입술을 깨문다.
치명적인 패배.
사마세가, 위지세가, 황보세가.
종남과 점창 그리고 공동파.
각 가문과 문파의 수장들이 죽었다. 그들이 이끌던 최정예 무인들도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는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뇌문…….”
만뇌문이라는 말에 모두가 집중한다.
“그들이 혈마교와 한패였소……!”
“……!”
“…….”
종남의 제자들은 처절한 분노를 토해 냈다.
그러나.
화산파 출신이자 전대 매화검수였던 화산은검(華山隱劍) 사인청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지, 지금 뭐라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종남의 장문인.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사인청을 마주한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증거라니?
“나, 24대 종남의 장문인 만패불성이 그 증거요……!”
그의 처절한 외침에도 사인청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일단 치료부터 받으셔야겠습니다.”
“아니!”
그러나 사인청의 반응은 차가울 뿐이었다.
“온전히 정신을 회복하시고 다시 대화하시죠. 전 서신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만뇌문의 황극린은 화산의 은인이다.
최근 화염신황은 매화검수들을 이끌고 그들을 도우러 갔다. 그들이 혈마교와 한패라면, 화산도 그들을 도운 셈이 된다. 화염신황은 코앞의 배신자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얼간이가 된다.
사인청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더 신뢰하는 건, 종남의 장문인이 아니라 화산의 장문인 화염신황이었다.
* * *
“만약 이번에도 정파 놈들이 또 지랄을 했으면 나 혼자서라도 맹을 뒤집어 놓으려 했다.”
뇌불이 혀를 찼다.
종남의 만패불성이 돌아와서 헛소리를 지껄인 건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명숙들이 대부분 죽어 버렸기에 뇌불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분노했었다. 멍청한 아집으로 가득 찬 소위 정파라는 잡놈들이 또 정치와 수작을 부려 올까 봐 말이다.
다행히도 정파엔 그리 멍청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종남의 만패불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그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맹주가 나서서 황극린을 옹호했다.
그는 부맹주 시절 만뇌문의 뒤를 캔 적이 있었다. 그는 전면에 나서 황극린을 의심하는 이들을 처벌하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그리 발언하니 감히 황극린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혈마교주가 이런 장난질을 칠 줄 몰랐소.”
절대자의 품위라는 게 있다.
뭐, 사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 되었지만 그래도 상정 외의 상황이라고 할까.
“그냥 질러 본 거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널 의심하는 놈이 있으면, 되레 욕을 먹는 상황이다.”
뇌불의 말에도 황극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보통 무림에서 초고수의 중요성은 무거움에 있었소.”
뇌불 또한 황극린의 말을 모르지 않는다.
혈마교주는 마지막에 나서는 역할을 포기했다. 사실 만뇌문을 습격하던 당시에도 먼저 수하들을 보내 만뇌문을 흔들 수도 있었지만, 먼저 만뇌문의 진에 들어왔다.
당시에 혈마교주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무리 만뇌문의 진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제 혈마교주는 만뇌문의, 정확히는 황극린의 실력을 파악했다.
“놈이 비열하게 나올 것을 걱정하는 게로구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이오.”
승자가 옳은 것이다.
비열하게 나오더라도 승리하면 된다. 황극린의 고강함을 아는 뇌불이었기에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황극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문도들을 잃을까 봐 걱정되는 게냐.”
뇌불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뇌불부터 식솔로 있는 이들까지. 모두 황극린이 지켜야 한다. 살수로서 살아가던 당시엔 스스로의 목숨만 신경 쓰면 됐다. 동료의 죽음은 서글픈 일이었지만, 임무만 완수하면 됐으니까.
“그렇소.”
“걱정하지 말아라.”
뇌불이 가슴을 쳤다.
“우리라고 네가 홀로 나설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다. 그러나 너를 믿고 있기에 기다릴 뿐이었다.”
“…….”
“네가 걱정하는 만큼 우리는 약하지 않다.”
그 말에 걱정을 모두 털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마음이 편해진다. 동료를 믿는다. 살수였던 시절에는 사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어미와 나 그리고 공야월. 이 세 사람만 있어도 혈마교주는 상대가 가능할 거다. 그리고 만뇌문엔 그 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지.”
“문주 말이 맞소.”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를 끝까지 믿어 주는 이들도 무림에 많이 생겼지 않느냐?”
뇌불에게 또한 색다른 경험이다.
무림맹과 더불어 거대 문파들이 황극린을 적극 옹호 한다. 작은 거짓으로 황극린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땅에 처박혔던 과거와는 다르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황극린을 의심하여 무림맹의 장로들이 압박을 가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죽다 살아온 종남의 장문인이 피를 토하며 황극린을 흉수로 지목해도, 정파 무림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넌 진정한 천하제일인으로 거듭날 거다. 언젠간 천화련주도 넘어서겠지. 그 의미는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뇌불은 무림공적이 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천하제일인이라는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황극린이 강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순 없었다. 무신이라 불리는 천화련주도 구파일방의 축을 담당하는 천화련을 이끌고 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소.”
“크음!”
뇌불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기나 하나 구워 다오.”
피식.
상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과거와 변함없는 뇌불의 반응에 황극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좋소. 모두 모이라고 하시오.”
* * *
“…….”
전(前) 북해빙궁의 부궁주 한소연.
그녀가 불현듯 젓가락을 멈추었다.
“어떠냐?”
뇌불이 다가와 묻는다. 양손에 고기를 꿴 꼬치를 일곱 개나 들고 다닌다. 그 모습을 볼 땐, 왜 저리 욕심을 부리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먹어 보고 느꼈다.
“왜 문도들이 이리 좋아하는지 알겠네요. 혀끝에 감도는 농밀한 향이 이제껏 먹어 본 것과 확실히 달라요.”
“후후, 그렇지? 극린이 놈이 양념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니까. 그리고 저놈이 굽는 건 뭔가 달라.”
이미 양념장의 재료는 잘 알고 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먹던 뇌불이었지만, 한소연의 앞에서는 꼬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소연의 그릇에 올려 준다. 자신이 먹으려고 한 게 아니었던가?
“이제 적응은 좀 했느냐?”
“네, 모두가 환영해 준 덕분이지요.”
“분위기는 어떤 것 같으냐?”
“좋아요. 빙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사람들이에요.”
뇌불이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면 그 미친 여자가 있는 빙궁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한소연이 빙궁을 탈출했다가 체질을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했으니 더 안쓰럽다.
“나도 빙궁에 가 본 적이 있다.”
“손님으로 말인가요?”
“그래, 그 할망구가 젊었을 때였지. 뭐, 그때나 지금이나 생긴 건 거의 똑같지만 말이야.”
뇌불은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빙백마후는 3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손님이라면…….”
“그냥 북해빙궁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확인하러 갔었다. 역시 강하더군.”
“아, 그렇군요.”
“아무튼, 잘 지내니 보기 좋구나. 극린이 놈도 네가 오니 왜인지 표정이 다채로워졌어.”
“그런가요?”
갑자기 확 밝아진 한소연의 목소리.
그녀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황극린의 이야기만 나오면 달라졌다. 뇌불은 그녀의 반응에 기뻤는지 이야기를 쏟아 냈다.
“내가 오래전에 만든 비동에서 주화입마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 날 구해 준 놈이 극린이였다. 어린놈이 어찌나 맹랑한지, 부모가 누군지 참으로 궁금했었지.”
“어린 극린이는 어땠나요!?”
평소 황 공자라고 지칭하는 한소연이었지만, 뇌불이 자꾸 이름을 언급하니 저도 모르게 극린이라고 칭했다. 뇌불은 긍정적인 변화라 판단하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지. 처음엔 잘 훈련받은 살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몸을 회복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는지 틈을 전혀 주지 않았어.”
“문주껜 죄송하지만, 옳은 판단이었군요.”
“그래, 언제나 녀석은 옳은 길로만 나아갔지. 거기다 천재였어.”
“천재요?”
“혈풍뇌전신공이 그리 익히기 쉬운 무공은 아니다. 사실 혈맥을 이용하여 중단전을 활용하는 무공은 흔한 개념이 아니지. 그런데 녀석은 내게 배우지도 않고 홀로 무공서를 보고 익히더구나.”
“천재……!”
“그렇지.”
황극린의 성장 이야기를 들으며 한소연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기쁨과 감탄밖에 내뱉지 않았지만, 점점 슬픈 얼굴이 되어 갔다. 홀로 얼마나 고생했을지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무림맹의 장로라는 놈들이 극린이 놈들을 압박했는데, 녀석이 어떻게 대처했냐면…….”
뇌불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문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천화련주가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황 장로님을 콕 집어서 말입니다!”
“그놈이 극린이를?”
“…천화련주가 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