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97화 (297/316)

297화 운이 좋다

“할 수 있겠나?”

“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황보휘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천화련주는 그를 데리고 다니며 신기하고 기괴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따금 무공을 봐주기도 했다. 천하제일인이라 칭하는 존재의 가르침.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왜인지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데 대체 왜 나를 데리고 다니시는 거지?’

황보휘는 천화련주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

보통의 무인보다는 빠르다. 하지만 황보휘는 잘 알고 있다. 황극린이나 천화련주, 아니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칠룡오봉과 비교해도 부족하리라.

‘내가 용황신가의 피를 이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다.

용황신가라는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마기를 정화할 체질이랬던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마기를 품은 무림인이 있다면, 천화련주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압하면 되지 않은가?

그리고 같은 피를 이어받은 절대고수가 또 있지 않은가?

천화련주는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련주님에게만 보이는 내 재능이 있다는 건가?’

황보휘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였다.

천화련주는 고뇌에 빠진 황보휘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천화련으로 가지.”

* * *

혈마교주는 부교주를 모두 불러들였다.

“소교주는 제1공자 마영비로 결정한다.”

감히 십만대산을 습격했던 이들을 가장 많이 학살하여 두각을 나타낸 존재. 애초에 소교주 쟁탈전은 마영비를 키우기 위한 교주의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경쟁에서 밀린 소교주 후보들은 쫓겨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소교주가 된 마영비가 선택할 일이다.

각자 한 명씩 소교주 후보를 뒤에서 밀어주던 부교주들은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충성해야 할 존재는 혈마교주였다.

“받들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

무슨 임무일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만뇌문, 정확히는 황극린을 생포할 것이다.”

중원 전체와 자웅을 겨룬다는 혈마교였다. 당연하게도 만뇌문 따위는 부교주들에게 언제든 없앨 수 있는 존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인식이 바뀌었다.

만뇌문은 결코 만만히 볼 문파가 아니다.

혈마교가 흔히 농락하며 싸우던 정파와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다. 황극린의 무위가 강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거침없이 벽력탄을 활용하는 것부터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 정파의 문파들은 그런 병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교주님, 최근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흑살문의 움직임이 묘하다고 합니다.”

부교주 중에서 유일하게 여인인 섭혼요희가 말한다.

“그들은 본교와 같이 습격을 받아 복귀했습니다만, 시체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습격의 배후가 흑살문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섭혼요희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혈마교주는 빙궁주나 흑살문주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믿는 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같지만, 마지막에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각자가 다르다. 공동의 적을 치고 난 뒤에는 서로 싸워야 할 운명이다. 어쩌면 흑살문은 황극린을 사로잡을 것을 대비하여 계책을 세운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들과 목표가 같다. 그러니 당장은 적대시하지 않아도 된다.”

당장은.

후에는 싸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부교주들은 교주의 말을 이해했다.

“만뇌문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본교의 교도 모두를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만뇌문이 대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거기다 수가 많더라도 만뇌문의 진 속에서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그렇기에 혈마교주는 부교주들만 대동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황극린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일 출정하도록 한다. 준비하도록.”

“받들겠습니다.”

* * *

“혈마교가 다시 움직인다는군. 이번에는 최정예만 추려서 움직인다고 한다.”

“대비해야겠군요.”

황극린 앞에는 교특범이 있었다. 만뇌문의 정보를 총괄하는 무문의 문주였다. 그는 만뇌문의 끝없는 재력과 명성을 이용하여 무문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단순히 규모 면에서는 하오문이나 개방에 밀리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정보의 질은 확실히 대단했다.

“신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 모두 참수당했다고 한다. 오로목제의 명문 가문 둘과 사파 문파 네 개라더군.”

교특범이 눈을 빛낸다.

황극린이 제공하는 정보는 혈마교에서도 핵심 인물이 보내오는 정보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 황극린은 교특범에게도 그게 누구인지 직접 밝히진 않았으나 사실 교특범은 그게 누군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황극린이 묻더라도 모른다고 답할 테지만 말이다.

“이번 정보는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유력 문파와 가문들에게 전달하도록.”

“값을 매기지 않고 말입니까?”

“이러한 정보에 값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까.”

교특범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적당한 선에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그들이 혈마교주가 돌아오면 죽을 걸 알았을 텐데도 왜 십만대산을 공격했던 것인지 의문입니다.”

아쉽게도 서신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황극린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번 일의 배후에서 그의 어머니 한소연이 개입했다.

“천마의 무공을 탐한 것이다.”

교특범이 작게 고개를 젓는다.

“설사 그것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제명에 살지 못할 것인데…….”

“장보도 하나에 중원의 무인들이 몰려 혈겁이 펼쳐지는 곳이 무림이니까.”

확실히 무림 곳곳에선 그런 일들이 흔하게 벌어진다. 설사 그게 가짜 장보도라 할지라도 혹시 모르지 않은가? 중원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선 비루한 낭인이 천하제일의 무공을 손에 넣어 절대고수가 될 수 있다는 꿈같은 이야기가 많다.

사실 그런 숨겨진 무공도 요즘은 거의 없지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명문가와 거대 문파가 날름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 조치하겠습니다.”

만뇌문을 나선 교특범은 중원 곳곳에 퍼진 황악반점을 통해 정보를 퍼트렸다.

혈마교가 움직이면 곧 알게 되겠지만, 무문을 통해 정보가 가장 먼저 퍼졌다는 건 그들의 정보력이 신강에도 뻗어 있다는 걸 뜻했다. 하오문과 개방에서는 위기감을 느끼고 무문을 견제하기 시작했지만, 감히 무력으로 충돌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문의 뒤에는 뇌불과 황극린이 이끄는 만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예상외로 혈마교의 세력이 약하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무문에 의하여 다 읽히고 있다. 거기다 대규모의 교도들을 대동하고도 만뇌문을 처단하지 못했다. 혈마교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그들이 예상보다 약하다고 판단했다.

종남과 점창 그리고 공동파의 장문인.

사마세가와 위지세가 그리고 황보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모였다. 물론, 정말 약체라고 생각했다면 가문이나 문파 홀로 움직였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세 개의 문파와 세 개의 가문이 감숙성에서 회동을 가졌다.

“만뇌문만 활약하게 할 수는 없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종남의 장문인 만패불성(萬敗不聖) 좌백승의 말에 모두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문과 아미파 그리고 청성파에선 호들갑을 떨어 대고 있지요.”

지금도 무림맹에서 그들은 목 놓아 만뇌문을 찬양한다. 사실 다른 문파들이 보기엔 참으로 꼴불견이다. 혈마교에 당한 중소문파들이 꽤 있었지만, 사천성의 명문거파들은 실상 피해를 입지 않았다.

황극린이 도와줬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나?

한 사람이 어찌 세 문파를 지킨단 말인가?

거기다 명실상부 무신이라 평가받는 천화련주를 두고, 황극린을 천하제일인으로 꼽는다니? 아무리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들, 우습지도 않은 소리였다.

세 명의 장문인과 세 명의 가주가 모였다.

만뇌문이 한 것을 그들이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번 혈마교의 준동은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좌백승의 말에 모두가 동감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그들이 또 만뇌문을 노릴 것 같소이까?”

“그럴 확률이 높소.”

“그렇다면…….”

사마세가의 가주 사마광곤이 금천(金川)현을 가리킨다.

“여기를 지나쳐 갈 수밖에 없소이다.”

사마세가의 가주.

제갈세가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지금 그들은 명실상부 무림의 최고 두뇌로 평가받는다. 거기다 사마세가의 가주의 식견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듣자 하니 이번엔 작은 규모로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시간 끌 것 있겠습니까? 바로 출발하면 되겠군요.”

“좋습니다!”

위지세가의 가주가 말하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의 눈동자엔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들 또한 평화로운 시대에 힘을 쌓아 왔다. 젊을 때야 용봉지회와 같은 비무대회에서 힘을 증명할 길도 있었지만, 나이가 찬 이후에는 공개적으로 친선 비무도 하기 어려웠다.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좋겠지만, 패배하면 감당키 힘든 후폭풍이 들이닥쳤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사파라면 이해득실을 크게 따지지 않아도 된다. 승리가 주는 과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달콤할 테니까. 지금 만뇌문이 누리는 명성을 그들이 차지한다면, 훗날 무림맹 내의 요직도 모두 이들이 차지할 수 있으리라. 누가 혈마교를 쓰러트렸느냐? 그러한 명분이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세 문파와 세 가문의 수장들이 금천현으로 이동했다. 말을 타고 관도를 달렸으며, 말이 지치면 경공을 펼쳐 달려갔다. 최대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금천현에 도착한 강호의 명숙들.

“……!”

그들은 운이 좋게도 혈마교의 교도로 추정되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마 가주의 식견은 정말 대단하군!”

“가 봅시다!”

그들은 열의를 잔뜩 내뿜으며 교도를 추격했다. 흔적을 숨기기 위해 꽤 고심한 듯 보였지만, 장문인들과 가주들의 시선을 피해 가진 못했다. 특히 공동파의 장로는 마기에 특화된 무공을 익혔기에 그들이 혈마교도라고 확신했다.

반 시진 정도 그를 추격했을 때.

그들은 개성 강한 외관을 자랑하는 여섯 명의 무인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중앙에 팔짱을 끼고 선 자는 특이하게도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의 귀공자였다. 그 특징은 이미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혈마교주!”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정말 운이 좋군! 금천현에 도착하자마자 혈마교주와 마주하다니 말이외다!”

혈마교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운이 좋다?”

중앙의 사내에게선 어떠한 위험도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내를 보좌하듯 선 다른 무인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수장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은 강호의 명숙들이다. 그리고 한 가문과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최정예의 무인들이 혈마교주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 패배란 없었다. 막대한 군세를 끌고 와서도 만뇌문 하나를 무너뜨리지 못한 혈마교 아닌가? 고작 여섯 명에게 패배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 또한 각 지역에선 패자라 불리는 세력의 수장들이었다.

“으음, 조용히 움직이려 했건만.”

“네놈들이 아무리 그래 봤자 우리 손바닥 안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종남의 장문인이 비웃는다.

그러자 혈마교주 또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래 그는 가로막는 것을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그래, 요즘 무림에선 본교의 무서움을 잘 모르는 것 같더군.”

모두 황극린 때문이었다. 놈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날개라도 달린 듯이 움직이며, 아미파와 사천당문을 습격한 혈마교도들을 싹 쓸어버렸다.

“계획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아니, 오히려 좋은가?”

혈마교주의 의뭉스러운 말에 부교주들이 앞으로 나선다.

이런 일에 교주까지 나설 일은 없었다. 그들은 제물이었으며, 부교주들이 실전에 나서기 전 몸을 푸는 용도에 불과했다.

“운이 좋다고 했느냐?”

부교주 섭혼요희의 야릇한 미소. 하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네놈들은 운이 나쁜 거란다, 아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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