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어머니
어머니라고?
뇌불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화염신황도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 여인은 분명히 북해빙궁의 부궁주가 아닌가? 어찌하여 황극린이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건가?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데 부궁주의 반응이 묘했다.
그녀는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잘게 떨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화염신황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말이었다.
애초에 북해빙궁엔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북해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들은 극음의 절맥증을 앓고 죽는다고 했다. 그건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나는 절맥증은 실로 저주라 불릴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황극린이 내뱉은 말이니 거짓이 아닐 거다.
뇌불이나 화염신황이나 그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말이던가? 그러고 보니 얼굴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뭐, 북해 출신들이 경이로운 미모를 자랑한다는 건 중원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황극린 또한 외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극린아?”
그래도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황씨 가문의 출신인 황극린. 그의 어머니가 정말 북해빙궁의 부궁주라면, 왜 그는 황씨 가문에서 노예처럼 살아왔던 건가? 북해빙궁에서 그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는 호화로운 삶을 영위했으리라. 빙궁주가 황극린을 사위로 받아들인다고 헛소리를 했을 정도였으니 그건 확실하다.
뇌불과 화염신황의 시선이 황극린을 향했다.
황극린은 간단한 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제가 어릴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시군요.”
“…….”
“…….”
뇌불의 마음속에는 한 점 의문이 떠올랐다. 잘 늙지 않는 건 북해빙궁도들의 특성이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이치곤 젊다. 물론, 무공의 수준이 높을수록 노화가 늦는다는 건 무림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빙궁의 무인들은 무인에서 흔히 말하는 재능 이상을 타고난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알아보았다는 말인가?
그럼 빈틈이 있을 텐데……. 그러나 부궁주가 혈황마제나 빙궁주를 배신하고 황극린을 도운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의문이 늘어났다.
* * *
황극린은 부모라는 존재를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가끔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는다. 만뇌문도들도 그런 말을 주억거린 적이 있었고, 심지어 객잔을 지나가면 술에 취한 이들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 울먹이는 걸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러나 황극린은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207호로 살아갈 땐, 그럭저럭 그리웠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묶여 있는 존재였으니까. 만약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자신은 살수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혈고독이라는 마물에 코가 꿰어 평생 살인귀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황극린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환상 따위를 모두 버렸다. 정확히는 굳이 그들을 그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황극린은 부궁주의 얼굴을 본 순간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기도 했지만, 살수로 살아온 세월이 그를 무뎌지게 했다. 어떤 것을 목격하더라도 그러려니 하는 성향이었다.
‘어머니?’
황극린은 부궁주의 얼굴을 보고 치미는 그리움에 심장에서부터 머리까지 차오르는 울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 순간 혈황마제가 그를 공격했다면, 황극린은 중상을 입었을 게 분명하다. 절대고수의 싸움에서는 그런 사소한 방심이 결정적인 결과로 나타나니까.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 그대로다.’
어린 시절의 황극린이었지만, 어머니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죽어 가는 와중에도 언제나 황극린을 안아 주었다.
당연히 얼굴이 닮았다고, 저토록 젊어 보이는 여인을 어머니라 믿고 싶은 건 아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도 했다.
‘북해에서의 이질적인 경험.’
황극린은 얼지 않는 호수에 있던 영물의 내단을 너무도 쉽게 취했었다. 마치 음기에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빙궁의 소궁주도 그녀의 절기를 쏟아 내고, 어찌 그리 쉽게 막느냐며 경악했다.
만약 그가 북해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가능하다.
물론, 북해 출신들이 받는다는 저주를 생각하면 아직 의문이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부궁주가 목숨을 걸고 혈황마제를 배신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녀가 황극린을 아들로 생각했다면, 그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라면…….
충격에서 빠져나온 황극린은 결론을 내렸다.
기억 속의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 물론, 지금이 훨씬 건강해 보인다. 어쩌면 북해에서 오랫동안 벗어났기에 죽어 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
“미… 안해요.”
황극린의 말에 부궁주 한소연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모든 게 미안해요. 못난… 어, 저 때문에…….”
한소연은 차마 어미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제 와 그의 어미를 자처할 수 있을까? 지금 만뇌문을 도왔다고, 과거의 잘못이 사라지는가? 결국, 한소연은 아들을 버리고 북해로 돌아갔다.
그 결정이 한소연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황극린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 보았다.
잊었다고 생각한 혈육의 정.
어린 시절 황극린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던 슬픔과 기대가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차갑다.
어릴 때도 이렇게 차가웠나? 아니다. 당시의 어머니는 따스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일부러 빙공의 기운을 눌렀던 걸까? 그래서 병색이 더 빨라진 건가? 아버지는 그걸 알고 그녀를 보내 준 건가? 어머니에게선 지독한 마기의 향히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황극린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황극린은 다시 어머니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뭘 하고 싶나?
그런 의문 따위는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면 몸이 자연스레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항시 계산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던 황극린의 행동 양식이 조금은 변화한 것이다.
황극린의 따스함을 느낀 한소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뇌불과 화염신황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분위기면 모자지간이 아닐 수가 없겠군.’
‘극린이의 저런 자상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크흠!’
조금은 다른 감정으로 뇌불과 화염신황이 상봉한 두 모자를 응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해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 *
쾅! 쾅쾅! 쾅쾅쾅!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 어찌나 강렬한 소음인지 진 내부에까지 그 여파가 전해졌다.
“……!”
한소연이 깜짝 놀라 입구를 바라본다.
“준비했던 겁니다.”
벽력탄.
사실 정파 무림에선 금기였다. 정당하게 쌓은 내공이 아니라 ‘편법’으로 힘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황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파 무림에서 벽력탄을 구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구하더라도 그리 수준이 높지 않으리라.
하지만 황극린이 누군가?
그는 자금성에서 고관대작의 혈육들을 지켜 냈으며, 심지어 황제에 즉위할 황태자도 살려 냈다. 벽력탄과 같은 병기의 권한은 황실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아마 벽력탄이 터지는 와중에 사천당문의 자랑 ‘만천화우’도 열심히 적들을 살상하고 있으리라. 혈마교의 부교주급 정도는 저런 벽력탄에 죽진 않을 테지만, 적절하게 배치한 벽력탄과 만천화우에 꽤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이게 혈황마제를 비롯한 적들이 진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막지 않은 이유였다.
“설마 벽력탄인가요?”
부궁주 한소연이 뇌불과 화염신황을 바라본다. 황극린을 대할 때, 마치 죄인처럼 벌벌 떨기에 심약한 여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화염신황은 한소연의 눈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라고 깨달았다.
‘빙궁주와 똑 닮았구나.’
성격이 닮았다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강렬한 의지는 화염신황의 화염조차 흔들리게 만들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한소연이라는 여인이 심약하게 보이는 건, 황극린을 마주했을 때뿐이다.
‘사연이 있긴 하겠군.’
그리 생각하며 대답한다.
“그렇소.”
“저들은 곧 물러날 거예요.”
부궁주 한소연은 많은 준비를 했다. 단순히 여기서 저들을 배신하는 게 한소연의 계획이 아니다. 아마 혈마교나 북해빙궁이나 본진에선 난리가 났을 터였다.
“물러간다고? 여기까지 와서 말인가?”
한소연과 뇌불의 눈동자가 마주한다.
묘한 기색이 스쳐 가고, 한소연이 말한다.
“새외엔 사흑련만 있는 게 아닙니다. 빙궁이나 혈마교 그리고 흑살문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혈마교주라도 여기서 계속 머물진 못할 겁니다. 그것들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리고 천화련주마저 살아 있으니 만뇌문을 포위하고 있진 못할 겁니다.”
물론, 저들이 죽자고 황극린을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소연은 그런 가정도 이미 세워 놨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극린을 지킬 생각이다. 그녀가 목숨을 내놓는다면, 최소한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불안정하군요.”
“네……?”
한소연이 황극린의 말에 또 심약한 모습을 보였다. 황극린, 그의 이름은 그녀가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 아들을 포기하고 북해로 도망쳤었다. 그 기억이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황극린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그녀의 죄책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이대로 간다면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
황극린은 부궁주 한소연의 단전이 불안전하다는 걸 느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해빙궁의 무공은 극음을 추구한다. 그것은 사실 마기(魔氣)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그런데 그녀의 단전에는 더없이 진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다.
균형이 곧 깨질 것이다.
“아, 아닙니다. 다시 북해로 돌아갈 수 있다면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황극린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작은 부담도 주기 싫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한소연을 본, 화염신황과 뇌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저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내력을 회복해야겠다. 빙궁주의 기운 때문에 뼈가 시리군.”
뇌불의 말에 모두가 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소연은 절대 황극린을 앞지르지 않는다. 황극린 또한 억지로 그녀에게 뭔가를 묻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거기다.
황극린은 시선을 느꼈다. 마주하면서 그녀는 황극린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소연은 그의 뒷모습만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마후, 할 말은 없는가?”
빙궁주는 혀를 찼다. 그녀 또한 부궁주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빙궁을 망하게 하려고? 그러려면 더 좋은 방법이 많았다. 이미 그녀는 온전한 부궁주의 직위를 이어받았으며, 궁주가 부재일 땐 그녀가 빙궁의 궁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에 참가하여 이들을 배신한다?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미안하구나. 그 아이가 다른 속셈이 있던 모양이다.”
“다른 속셈이라…….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른다는 모양이군.”
“그렇다.”
빙궁주의 사과는 평생 가도 듣기 힘들었다.
그것으로 혈마교주는 만족하기로 했다. 이 상황에선 서로 감정의 대립을 해 보았자 손해였다. 저들은 사흑련 수장들의 반목을 바라고 있으리라.
“다행히 흑살문주의 팔은 절단하지 않아도 된다는군.”
“본녀가 음기를 거두어 주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결국, 흑살문주가 그리 당한 것은 빙궁의 탓인데도, 빙궁주는 오만하게 말했다. 혈마교주는 작게 헛웃음을 지을 뿐이다. 본래 사파의 족속들의 성격이 이러했다.
“황극린이 선경일 가능성은 높다.”
“그 아이의 피를 먹으면 된다는 건가?”
“모르지. 그리 간단할 것 같지는 않군.”
혈마교주는 일단 황극린을 사로잡아 실험을 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를 사로잡는 게 실패했다. 거기다 포위망을 구축한 순간, 벽력탄과 만천화우의 조합으로 꽤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렇다고 만뇌문 하나 처리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긴 했지만…….
‘만뇌문의 힘은 강하다. 부궁주마저 넘어갔으니 우리 전력이 상당히 줄어들겠지.’
그들은 지나가는 사냥감이었을 뿐이다.
천화련주라는 거대한 산이 있으니, 뭘 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흑살문의 살수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수 임무대라 불리며 중원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놈들이었다. 특수 임무대의 수장이 거의 특급 살수에 필적하다고 했던가? 혈마교주의 입장에선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그는 흑살문주의 전령이었다.
“흑살문주께서 돌아가시겠다고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돌아가신다고? 죽는다고 예고라도 하는 게냐?”
빙궁주가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사실 그녀는 흑살문주가 죽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사실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감정이 더 큰 것 같았다.
혈마교주가 의문을 표한다.
왜 갑자기 돌아간다는 거지?
“흑살문이 배교에게 공격당했습니다.”
“배교라.”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유령?
천화련주가 살아 있다.
그 말인즉 유령은 죽었어야 했다.
아니면, 유령이 천화련주를 살려 준 걸까?
혈마교주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선경인지 아닐지 모를 황극린에게 전력을 소모하다가 진짜 중요한 걸 잃을 수도 있었다.
“교주님, 십만대산에…….”
“궁주님, 죄송합니다. 보고드릴 것이…….”
혈마교주와 빙궁주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