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배신
“벌써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군.”
혈마교의 교주 혈황마제가 말한다. 그의 기감에 느껴졌다면, 북해빙궁주에게도 전해졌으리라. 그리고 두 사람을 바로 뒤에서 따른 부궁주 한소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진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참는다.
진법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진법에서 펼쳐진 오묘한 기운에 놀랐다. 마치 이곳은 북해의 호수 아래에 잠든 그곳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질적이고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
혈황마제가 신형을 움직여 최근 명성을 떨치는 파천뇌권 황극린에게 다가갔다. 간발의 차이로 흑살문주가 죽지 않았다.
“저 아이의 실력이 더 상승했구나. 정말 선경이라는 건가.”
빙백마후의 읊조림에도 부궁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펄떡인다. 황극린은 빙궁주의 존재를 알아챈 것 같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그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면 바로 다리가 풀렸을 수도 있다. 정말 그 아이가 맞는지, 아니면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물론, 확신을 품고 여기까지 온 것이긴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다. 만약 이름만 같고 완전 다른 존재라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인 것은 황극린이라는 무인의 경지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는 점이다.
그 흑살문주를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갔다. 혈황마제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흑살마제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전투가 시작됐다.
왜인지 얼굴이 익숙한 뇌불.
그리고 화산파의 화염신황이 빙궁주에게 돌진했다. 빙궁주는 코웃음을 쳤다. 중원의 무인들은 새외의 무림보다 훨씬 약하다. 그들이 제대로 된 경쟁을 겪어 보기나 했을지 의문이었다.
빙궁주의 예상과는 다르게 뇌불과 화염신황의 무위는 강력했다.
빙궁주라도 함부로 황극린에게 다가가지 못하였으니까. 특히 뇌불의 강함이 의외였다.
“오랜만이로구나! 마후!”
“흥, 본녀를 보니 반갑기라도 한 것이냐?”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지만, 한소연은 빙궁주의 전투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롯이 한 사내의 싸움만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장난인지 제대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가만히 회복을 하던 흑살문주가 전투에 개입했다.
황극린의 어깨가 베이고,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의외로 부궁주 한소연은 침착했다.
예상했던 결과라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어깨에서 샘솟는 핏줄기를 보았기 때문일까?
- 한빙백골소혼장을 사용해라. 놈이 어떻게 그걸 막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부궁주 한소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보법을 펼쳤다. 그러던 순간, 황극린 또한 한소연을 목격할 수 있었다.
“……!”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황극린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왜인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부궁주는 그에게 할 말이 많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녀는 황극린에게 말을 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죽인다.’
부궁주는 목숨을 걸고, 얼지 않는 호수의 아래에 다녀왔다.
빙궁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경의 힘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저주가 해주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북해가 품은 혹한의 추위는 얼지 않는 호수에서 비롯된 것. 북해에 머무는 이상에야 지속적으로 마기가 침범한다.
한빙백골소혼장.
빙궁주의 직계만 익힐 수 있는 절기. 인간의 육신뿐 아니라 혼(魂)마저 얼려 버릴 강렬한 냉기가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방출된다.
당연하게도 표적은 황극린이 아니었다.
감히 황극린의 어깨에 상처를 내고 그림자를 칭칭 휘감은 흑살문주였다.
“……!”
흑살문주는 부궁주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의 감각은 이미 그녀의 장법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부궁주의 한빙백골소혼장에 일격을 허용하고 만다.
“흡!”
흑살문주가 신음을 토해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황극린의 뇌전이 자꾸만 그의 단전을 괴롭히고 있다. 동시에 혼마저 빙결시킨다는 빙궁의 절기가 그에게 쏟아졌다.
사아아아아-!
흑살문주의 왼팔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황극린은 의외로 쉽게 그것을 막아 냈지만, 북해의 빙공은 북해의 정기를 온전히 품은 만큼 쉽게 받아 낼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흑살문주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황극린이 어떻게 한빙백골소혼장을 막아 내려 했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혈황마제.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다.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부궁주?”
부궁주는 혈황마제의 진득한 살기에도 물러섬이 없었다.
설사 그녀가 죽더라도.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과거에 하지 못한 결단을 내릴 것이다.
* * *
콰지지직-!
촤아아아아-!
혈풍뇌전신공 오의 만뇌(萬雷).
사방으로 뇌전을 뿜어 대는 그 기술은 피해 낼 수 없으며, 막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중단전을 잠시 개방한 뇌불의 힘은 빙궁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했다.
문제는 상대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화염신황. 그는 천하칠대고수 중에서도 최상위의 고수로 통했다. 흑살문주에게 패배했었다고 하지만, 그가 내뿜는 불길의 검은 북해빙궁주에겐 최악의 상성이라 할 만했다.
빙백수라장(氷魄修羅掌).
냉기는 위로만 흐르는 게 아니다. 사방으로 흐르는 냉기를 움직여 묘한 문양을 만들어 냈다.
파앗!
빙백마후의 손바닥과 문양이 충돌하자 사방에서 밀려오는 화기와 뇌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뇌불과 화염신황이 헛웃음을 삼켰다. 저 여자는 진정으로 괴물이었다. 상성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흥, 네놈들 따위가 본녀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의기양양하게 외친 빙백마후였지만, 이내 인상을 찌푸린다.
“무슨 짓을……?”
빙백마후가 바라보는 곳에는 부궁주 한소연과 흑살문주가 있었다.
흑살문주가 거무죽죽한 팔을 뒤로 숨긴 채로 뒤로 물러섰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영영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뇌불과 화염신황도 그 광경을 보았다.
빙궁의 부궁주. 그녀는 당연히 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흑살문주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빙궁주의 표정으로 보건대, 미리 상의된 것은 아닌 듯하다.
“배신인가?”
“으음, 의외이긴 하지만… 우리한텐 다행이로군.”
빙궁주가 순식간에 뇌불과 화염신황을 돌파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황급히 뇌불과 화염신황이 그 뒤를 뒤따랐다.
“빙궁주, 네가 개입한 건가?”
“아니.”
빙궁주의 단호한 대답에 혈황마제가 부궁주를 바라본다.
“무슨 속셈이지?”
부궁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 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와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타닷!
부궁주가 앞으로 나아간다.
한빙백골소혼장과 암천성휘가 부딪친다.
짜그작!
격한 충돌음이 아니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쉴 새 없이 상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암천성휘. 그리고 흡수하기 전에 적을 얼리기 위해 냉기를 내뿜는 한빙백골소혼장의 기운.
최근 마경에 들어갔다 온 모양인지 부궁주의 힘은 강력하다.
하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아직 제대로 힘을 다루지 못하는구나.’
기회가 생겼을 때, 완전히 끝을 내야 했다.
혈황마제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운에 뇌불과 화염신황이 경악한다. 거리가 있음에도 그들의 단전에서 내력이 요동친다. 저 불길한 기운은 상대의 내력을 흡수하는 듯하다.
‘대체 이 기운은…….’
그런 혈황마제의 마기와 동등하게 맞서고 있었으니 부궁주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만약 부궁주마저 적이었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대체 부궁주는 왜 갑자기 흑살문주를 공격했을까?
두 사람 사이의 전투를 지켜보던 빙궁주는 혼란한 얼굴이었다.
부궁주 한소연은 궁주에게 다짐했다, 빙궁주를 이어받기로. 그 다짐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배신이라?
대체 왜 저런 선택을 한 것인지 궁금하다.
빙궁주가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행동을 취한다.
‘감히.’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흑살문주. 그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의 장점은 암습이다. 혈황마제와 부궁주가 대립하고 있을 때가 절호의 기회다. 약간의 틈. 그것만 있으면 살수의 장점은 극대화된다.
검은 그림자가 솟구친다.
그것은 부궁주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빙궁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지켜볼 뿐이다. 흑살문주의 암습에 부궁주가 당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쿠웅!
그 어떠한 것도 베어 낼 수 있다는 흑살문주의 무영기검(無影氣劍). 보통 그것에 직격당한다면 들리는 건 예리한 절삭음뿐이다. 굉음이 터져 나왔다는 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는 뜻이다.
두 사람 사이의 전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선 것은.
바로 황극린이었다.
“네놈……!”
흑살문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천하제일의 살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흑살문의 문주였다. 그가 죽일 수 없는 상대는 세상에 천화련주를 제외하곤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자만은 오늘로 막을 내렸다.
이제 막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황극린에게 죽을 뻔했으며.
비록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부궁주에게 팔을 하나 내준 것도 모자라.
그가 작정하고 펼친 암습이 너무도 쉽게 가로막혔다.
황극린이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다.
“…….”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조심!”
황극린은 표적을 바꾸었다. 흑살문주는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혈황마제였다. 황극린의 살의를 느낀 것인지 혈황마제가 눈썹을 꿈틀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부궁주의 냉기를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을 테니까.
“빙궁주, 뭐 하고 있나!”
그러나 빙궁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에 가득 찬 상태였으니까.
‘왜 저 아이가… 황극린을 위해서 움직인 거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설마 연정의 감정이라도 느낀 건가? 오늘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만약 오늘 처음 만나는 게 아니었다면?’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긴 했다.
황극린이 북해에 감히 발을 디뎠을 당시 부궁주는 ‘벌’을 받고 있었으니까.
혈황마제가 뒤로 물러섰다. 한빙백골소혼장과 마주한 상태로 황극린이 펼친 검은 뇌전을 막아 내는 건 위험했다. 그의 뇌전에는 마기를 파괴하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마기의 결정체라 불리는 암천성휘라고 해도 말이다.
콰지지직!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혈황마제 또한 절대고수라 칭할 만했다. 정면으로 혼까지 얼려 버린다는 한빙백골소혼장을 마주하면서도, 황극린읜 뇌전을 피해 냈으니까.
멀찍이 거리를 벌린 혈황마제.
“빙궁주.”
이미 흑살문주도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부궁주의 배신으로 인해 계획이 일그러졌다. 빙궁주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니 그녀가 의도한 방향은 아닌 듯하다. 만약 그녀가 이것을 계획했다면, 광녀처럼 그들을 놀렸을 게 분명하니까. 그녀는 그런 성격이었다.
빙궁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혈황마제의 곁으로 섰다.
“잠시 물러나도록 하지.”
교주의 시선이 흑살문주의 팔로 향했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정말 한쪽 팔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균형이 갖춰진 무인의 신체 한 부분이 망가진다면, 본래 무위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건, 천화련주의 죽음.
교주가 가진 ‘모든 것’을 펼쳐 낸다면, 놈들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 와중에 흑살문주는 무조건 죽는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조만간 혈마교와 빙궁의 정예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새로운 기회였다. 급작스럽게 만뇌문의 진을 급습했던 혈마교주와 흑살문주 그리고 빙궁주가 빠져나갔다.
뇌불이 한숨을 내쉰다.
저들이 손해만 보고 떠나간 것은 다행이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극린아, 어찌할 것이냐?”
지금 혈황마제나 빙궁주와 혼자서 맞설 존재는 황극린뿐이다. 화염신황과 뇌불이 동시에 빙궁주를 상대했지만, 압도하기는커녕 조금씩 밀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황극린은 뇌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혈황마제를 죽이려고 살기를 마구 내뿜으며 싸웠던 부궁주.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듯이 황극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부궁주는 왜 극린이를 도운 거지?’
뇌불로서도 의문이었지만, 황극린의 입에서 그 이유가 튀어나왔다.
“살아 계셨군요,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