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91화 (291/316)

291화 사냥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흑살문주의 뇌리에 스쳤다.

‘해석? 지금 암월개천은형살을 파악했다는 건가?’

심장이 꿰뚫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칭송할 수 있다. 일점에 쏘아지는 섬광은 잠시나마 공간에 빛이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 속도는 흑살문주가 얼마나 많은 내력을 소모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흑살문주는 상당한 내력을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소모했다.

그런데도 피해 냈다.

끝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흑살문주는 순간적으로 어둠이 모두 짓눌릴 정도의 섬광을 목격했다. 흑살문주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어둠이 빛을 짓누르는 게 아니다. 빛이 어둠을 짓누른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빛이 한 점으로 모여 ‘어둠’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놀랍게도.

콰지지직-!

뇌전을 품고 있었다.

‘암천성휘.’

사흑련 쪽의 절대고수들이 왜 하나같이 암천성휘와 같은 비기를 익히고 있는지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마기(魔氣)란, 절대적인 파괴를 염원하며 추구하는 힘이다. 암천성휘는 그러한 마기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흑살문주를 노리는 한 줄기의 어둠은, 암천성휘와는 조금 다르다.

암월개천은형살과 암천성휘를 반반 섞은 것 같다고나 할까?

그게 이해가 안 됐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혈마교주는 황극린을 선경이라 추측했다. 선경은 마기의 집합이자 정수라 불리는 마경의 반대이다. 그런 존재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힘을 다룬다?

“……!”

찰나의 순간은 짧았다.

지금 황극린이 어떻게 자신과 비슷한 기술을 펼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직격하면 죽는다.’

죽음.

천화련주와의 싸움에서도 느낀 그 감정을, 눈앞의 어린 사내에게서 느껴야 했다.

수십 겹의 그림자가 흑살문주를 감싼다. 피할 수 없다.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은 뇌전이 흑살문주를 관통했다.

“커억.”

신음을 토해 내는 흑살문주.

그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이건…….’

흑살문주가 황급히 고개를 든다. 황극린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의 양손에 뇌전이 일렁거리고 있다. 이대로 그에게 권격을 허용한다면… 정말로 죽을 수가 있었다.

‘이대로는…….’

언제나 상대에게 죽음을 선사하던 존재가 공포를 느낀다.

흑살문주에겐 참으로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콰지지지직-!

“으음.”

다행히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펼친 그림자가 놈의 뇌전을 막아 낸 건가?

“대단하군.”

흑살문주의 앞에 검은 물체가 있었다. 이건 마기로 만들어진 기의 운용 따위가 아니다. 실체가 있는 존재였다. 사내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운 적은 없었다.

콰앙!

“교주.”

“까딱했으면 죽을 뻔했군. 물론, 대비는 한 모양이지만.”

검게 일렁이는 흑살문주의 양손.

‘놈의 권격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내부가 진탕되었다.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놈이 쏘아 낸 뇌전은 흑살문주의 마기를 끊임없이 폭주시키고 있다. 기의 폭주는 위력을 늘려 준다고 하지만, 흑살문주와 같은 고수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대단해. 회계산에서 봤을 때보다 몇 단계는 강해졌어.”

정도라는 게 있다.

일류에 도달하는 것보다 일류에서 절정으로 오르는 게 더 힘들다. 그 이상의 경지를 오를 때마다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황극린은 화경에 이르렀음에도, 배울 게 사방에 널린 이류 무인처럼 강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하게.”

흑살문주는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단전의 폭주를 막아 낸다. 까딱 잘못하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주화입마?’

돌이켜 볼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살수가 정면 대결에서 약하다고 하더라도, 흑살문주 정도의 고수에겐 그런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황극린이 준비한 장소에서 전투했다? 분명 그에게 이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흑살문주는 왜 자신이 패배한 것인지 변명을 수십 가지도 내놓았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극린은 강하다.

기이할 정도로 말이다.

다행히 황극린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 * *

“좋은 거라도 취한 것인가?”

흑살문주의 물음에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인다. 아쉽게도 흑살문주를 끝장내지 못했다. 무리한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황극린도 위험했으리라.

‘흑살문주가 펼친 무공은… 반동이 너무 심하군.’

일격필살의 무공.

보통 그러한 초식과 무공은 무인에게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황극린은 심장이 꿰뚫릴 뻔했다. 금방 회복했다지만, 그건 무한정 황극린을 회복시키는 만능은 아니었다. 기력과 심력을 상당히 소모한다.

‘흑살문주는 나보다 상황이 더 심할 테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혈마교주 혈황마제.

‘마경의 기운을 취했다고 했던가.’

그의 기운은 황극린이 보기에도 위험했다. 고안해서 개조한 만뇌문의 진도, 그의 강맹한 기운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다 혈마교주 혼자만 온 게 아니었다.

휘이잉-!

황극린에게 추위를 느끼게 할 존재는 몇 없다.

그중 하나가 북해빙궁주였다.

앞에는 혈마교주.

뒤로는 북해빙궁주.

아마 혈마교의 강자들도 조만간 도착할 것이다.

“정말 신기하군. 조금 전, 흑살문주에게 사용했던 기술. 암천성휘와 매우 비슷한 성질의 기운을 품고 있더군. 자네가 그러한 무공도 익혔던가?”

“만물의 기운은 이어져 있으니까.”

황극린의 답에 혈마교주가 살짝 놀란 눈을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서 말이다. 안 그런가, 빙궁주?”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는군.”

황극린이 주먹을 쥐었다.

천화련주는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그 또한 가능할까?

“무언가 얻은 게 확실하군. 뭐, 차근차근 알아보면 되겠어.”

혈마교주의 불길한 기운이 강해진다. 황극린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공간이 일렁인다. 진이 과도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거다.

“이것도 막아 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쿵쿵! 쿵쿵!

심장 소리가 울리듯 마기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황극린의 귓가에 흑주가 포효하는 소리도 들렸다. 기파로만 흑주를 긴장하게 하고 있다.

“이건 혈천광화(血天狂火)라고 한다.”

친절하게 이름까지 말한 혈마교주가 손을 뻗는 순간.

검붉은 작은 구슬이 크게 요동치며 질주했다. 그리고 황극린에 몸에 닿는 순간 폭발했다.

콰아앙-!

흙먼지가 걷히자 혈마교주의 미소가 짙어진다.

“천화련주와 다시 싸우기 전에 시험할 정도로는 충분하겠어.”

광오한 발언이었지만, 황극린은 그의 자신감을 이해했다. 가볍게 펼쳐 낸 것처럼 보였지만, 작은 구슬엔 막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어찌 보면 황극린의 뇌탄과 비슷한 느낌이라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의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다.

“호오, 그렇다면 이건…….”

혈마교주가 말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였다.

콰지지지직-!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벼락을 두른 뇌불이었다.

“이 비겁한 쓰레기 놈들! 여럿이서 극린이 한 명을 압박하니 좋더냐?”

뇌불이 나타났다.

그의 옆으로 화염신황까지 등장했다. 황극린도 혼자는 아니었다.

혈마교주가 혀를 찼다.

“너희가 나선다고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텐데 말이야.”

혈마교주와 빙궁주.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전력 차이는 상당하다. 혈마교의 부교주들만 와도 균형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황극린의 손에 뇌전이 어린다.

쉬운 싸움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흑살문주를 끝장냈으면 좋았겠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무너뜨리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

“소림사의 고승들은 나서지 않는 것을 보니 대비를 하는 건가. 미련한 선택이로군.”

혈마교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흑살문주가 패배할 뻔했다는 건 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황극린이 품은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네가 가진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오늘 확실히 알아내 주마.’

두 사람이 움직인다.

혈마교주와 황극린이 충돌한다.

콰아앙!

황극린은 적당히 힘을 아끼지 않는다. 일단 기회가 되면 혈마교주를 쓰러트려야 한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뇌전과 검붉은 강기가 충돌한다.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뒤에서 빙궁주도 뇌불이나 화염신황과 전투를 시작한 듯하다. 거기다 흑살문주도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쿠웅! 쿠웅! 쿠웅!

여유로워 보였던 혈마교주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런 기공을 펼치고도 아직 여력이 남았다는 건가.’

혈마교주가 판단할 때, 황극린이 펼친 검은 뇌전은 황극린이 익힌 내공심법과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그만한 힘을 발휘하려면 내부에서 치미는 반발을 이겨 내야 한다.

‘그러나 폭주하는 것은 없다. 도리어 너무 안정적이군.’

혈마교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사악!

그가 검을 뽑을 때는 진심으로 상대를 죽여야 할 때뿐이다.

천마난무(天魔亂舞).

수십 가닥의 검붉은 검강이 사방을 가른다. 평범한 뇌전 따위는 순식간에 잘라 내고, 상대의 살점과 뼈까지 단절시킨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피해 내고 있었다.

‘눈동자가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있군.’

천마난무로는 황극린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극린에게 틈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천마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사방으로 쏟아지던 검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외부로 방출되는 기운이 아니다. 상대의 기운과 더불어 빛까지 흡수하는 혼돈의 기운. 암천성휘의 힘이 그의 검에 깃들었다.

콰지지직!

황극린이 쏟아 낸 뇌전이 그의 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회계산에서와는 많이 다를 거란다.”

동시에 천마의 검에서 검은 뇌전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황극린의 그의 기세에 뒤로 밀려났다. 그는 황극린의 뇌전을 빨아들여 자신의 기운으로 발산했다. 이건 황극린조차도 놀랄 기예였다. 그는 마경의 힘을 흡수했으며, 천화련주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또한 과거의 혈마교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혈마교주의 미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그는 거의 내력을 소모하지 않았다. 방금 펼친 한 수에는 황극린의 뇌전을 재사용했을 뿐이었다. 분명 일방적인 이득을 본 건 혈마교주여야 했다. 그랬어야 할진대.

욱씬!

미약한 뇌기가 혈마교주의 손목을 시큰거리게 했다. 참으로 묘한 감각이다. 평범한 뇌전과는 다르다. 흑살문주를 쓰러트렸던 것처럼 검은 뇌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이질적인 힘은 무엇이지?

마기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자연의 순수한 뇌기와도 또 다르다.

이놈은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힌 거지?

혈마교주가 흘끔 뇌불과 북해빙궁주를 바라본다. 뇌불이 펼치는 혈풍뇌전신공은 빙궁주의 빙공에 계속 막히고 있다.

‘으음. 확인해 봐야겠군.’

쉬익!

혈마교주가 천마군림보를 펼쳐 뒤로 물러섰다. 황극린의 주먹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가슴을 스쳐 갔다.

찌직.

미약한 뇌기가 가슴에 남아 있다. 혈마교주가 뒤쪽을 바라본다. 빙궁주는 무려 뇌불과 화염신황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온 부궁주는 가만히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 부궁주, 황극린에게 한빙백골소혼장을 써 보아라.

부궁주의 시선이 혈마교주에게 닿는다.

그녀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큭.”

황극린의 어깨가 베였다. 혈마교주의 힘은 아니었다. 황극린을 상처 입혔던 건, 어느새 전투에 복귀한 흑살문주였다. 그는 한 수에도 지독할 살의를 담아 황극린을 노렸다. 혈마교주를 상대하며 흑살문주의 공세까지 막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앞서 나갔다고 전투에서 이기는 건 아니다.”

조금 전에 당했던 치욕을 되갚았다는 듯이 말한 흑살문주가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혈마교주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은 채로 황극린에게 돌진했다.

‘미안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이 괴물이라서 말이다. 언제 나타나서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 시간을 끌 수가 없구나.’

여기서 황극린 하나를 잡는 데, 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진짜 적은 천화련주다. 황극린은 빨리 제압하고, 사체를 분해해야 할 먹잇감에 불과했다.

혈마교주가 검을 휘두르자 황극린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검붉은 검에는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단순히 상대의 기를 흡수하는 것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그를 빨아 당긴다. 그 찰나의 틈을, 부궁주는 놓치지 않을 것이리라.

‘한빙백골소혼장이라면 놈의 뇌전이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테지. 혈풍뇌전신공, 그 무공에 그만한 가능성이 있다면…….’

냉기가 솟구친다.

황극린이 황급히 몸을 돌린다. 살의를 뚝뚝 흘리는 여인이 황극린의 앞에 섰다.

황극린이 빙궁의 비기를 어떻게 막아 내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던 혈마교주.

사아아아아-!

북해의 폭풍이 사방에 밀어닥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또 무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