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90화 (290/316)

290화 전투

‘이놈이 어떻게 무영심결을 알고 있는 거지.’

의아한 일이다. 이건 흑살문주도 최근에서야 얻게 된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는 심결이다. 이것은 익혀 왔던 무공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벽에 가로막혀 있다면 이것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다.

흑살문주도 놀랄 만큼의 식견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걸까?

살수의 정점이라 불리는 암혼마제.

잠깐 표정이 변화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아악!

보통의 기감으로는 감지할 수조차 없는 은밀한 그림자가 황극린의 몸을 스쳤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위력이 떨어진 느낌이다. 황극린의 피가 튄 그림자는 흑살문주의 진짜 힘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황극린이 흑살문주의 그림자를 완벽히 봉쇄했다고 할 수 없다.

위력이 떨어졌음에도 황극린이 긴장할 정도로 예리하면서도 은밀했다.

속도가 느려졌기에 황극린은 그의 그림자를 피할 수 있었다. 천화련주를 제외하곤 그의 그림자를 온전히 피한 적은 거의 없었기에, 흑살문주는 솔직하게 당황했다.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지만은 않았다.

휘익!

순간, 사방을 밝히던 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흑살문주가 사라졌다. 살수는 원래 정면에서 싸우는 게 아니다. 그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는 데 능했으며, 진의 입구에는 그림자가 몸을 숨길 만한 지형이 많았다.

황극린은 사라진 흑살문주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다 예상 범위 안이었으니까.

황극린의 예리한 청각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난다. 사방에 깔린 흑주의 거미줄. 아무리 흑살문주가 은신술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흑주의 거미줄을 무시하고 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소리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황극린이 손가락을 들었다.

통!

둥근 뇌전의 탄이 앞으로 쏘아진다.

콰지지직!

잘 숨어 있던 흑살문주가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쉽게도 뇌탄 한 방에 흑살문주가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뭐,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왠지 나를 잘 알고 있는 듯하구나.’

흑살문주의 눈동자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처음 황극린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적당히 무림을 혼란으로 빠트릴 재목이라 판단했다. 그 당시에는 그리 위협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만뇌문에 이리 찾아올 때만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작정한다면 죽이지 못할 것은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막상 마주한 황극린은 다르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살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뿜어내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놈이 뿜어내는 피는 흑살문주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로 연결된 듯한 수십 개의 암기.

흑살문주는 공간 속에 녹아들 듯이 은신을 펼치는 동시에, 암기를 깔아 두었다. 기로써 검을 움직인다는 이기어검과 비슷했지만, 그림자처럼 연결이 되어 있는 모습이 이기어검과는 다르다.

수십 가닥의 그림자가 황극린에게 쏘아졌다.

캉캉캉캉캉캉!

황극린은 정면 돌파를 강행했다. 사각까지 계산한 듯한 암기의 돌진이다. 피해 내는 건 쉽지 않았다. 거기다 암기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흑살문주는 역시 다르군.’

황극린은 여러 준비를 해 두었다.

만뇌문의 진을 마경처럼 바꾼 것. 흑주의 거미줄을 깔아 둔 것. 그리고 무영심결을 언급한 일까지. 흑살문주를 비롯한 다른 마제들을 노린 것이다.

이제껏 황극린이 싸웠던 적 중에서도 단연 세 손가락에 꼽힌다.

반월의 그림자가 황극린의 등에서 폭발하듯 솟구쳤다.

암기를 날리던 흑살문주가 어느샌가 황극린의 뒤에 숨어든 것이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촤아아악!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흑주가 깜짝 놀랄 지경이다. 흑살문주의 검은 기운은 뇌섬사를 마치 진짜 거미줄처럼 쉽게 잘라 낸다. 저것이 황극린의 등에 직격했다?

- 끼!

앞으로 나서지 말라는 주인의 명령만 없었다면, 흑주는 당장 앞으로 달려 나갔을 것이라. 이제껏 많은 인간을 보아 왔던 흑주였지만, 흑살문주의 실력은 단연 최강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황극린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반월의 그림자가 황극린의 등에 직격한 듯이 보였지만, 황극린은 상처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단천절영식이라. 소문만큼 무섭지 않군.”

“네놈…….”

무영심결에 이어 초식명까지 정확하게 읊는 황극린이다. 흑살문주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뭐 하는 놈이지?”

대답하는 순간, 흑살문주는 후회했다.

이놈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흑살문주가 궁금증에 이기지 못하고 대답하는 순간, 황극린의 반격이 시작됐다.

‘저릿저릿하군.’

뇌탄을 막아 내는 건 쉽지 않았다. 단천절영식으로 겨우 잘라 냈지만, 일부의 뇌전만으로도 손이 저릿저릿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날아온 뇌탄을 보고 흑살문주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무식한 기의 운용이었다.

물론, 무식하니 더 막아 내기 힘들었다.

스걱!

이번에도 단천절영식으로 뇌탄을 잘라 내며 뒤로 물러서는 흑살문주.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

이전의 뇌탄은 잘라 내면 위력이 반감됐다.

하지만 방금 황극린의 뇌탄은 다르다. 반으로 잘려 버린 뇌탄. 그것은 그림자와 닿자마자 폭발해 버렸다.

콰지지지직-!

검지 정도의 크기였던 뇌전의 탄의 크기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삼 장 범위로 뇌전의 폭발을 만들어 냈다. 흑살문주의 몸이 경직됐다.

“잡았다.”

어느샌가 나타난 황극린.

흑살문주가 그의 주먹을 보았다.

쿵!

“……!”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주먹 찜질을 당한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천화련주와의 싸움은 논외라고 치더라도 단순히 주먹으로 맞은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황극린의 권격은 끊임이 없었다.

뇌탄이 만들어 낸 삼 장 크기의 뇌전은 흑살문주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급히 그림자를 움직이려 했지만, 뇌전이 만들어 낸 광휘는 그림자를 제어하는 걸 방해한다. 마치 흑살문주의 기술 전체를 파악하고 판을 깔아 놨다는 느낌이 들었다.

흑살문주는 섬뜩함을 느꼈다.

살수는 최소한의 힘으로 상대를 상대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 황극린은 마치 최고의 살수라 불리는 흑살문주를 잡기 위해 함정은 파 놓은 듯했다.

퍽! 퍽! 퍽! 퍽!

거기다 단순한 권격도 아니다. 맞을 때마다 그의 주먹에선 뇌전이 흘러나와 뼈와 혈맥을 자극한다. 이렇게 수세에 몰리다 보면 외상뿐 아니라 내상도 입을 게 분명하다.

무영기검(無影氣劍).

흑살문주가 검지를 치켜세웠다. 황극린의 팔 하나는 받아 가야 지금까지 당한 피해를 되갚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통하지 않는다.

황극린은 마치 흑살문주가 무영기검을 사용할 줄 알았다는 듯이 이미 거리를 벌린 뒤였다.

‘감각? 계산?’

둘 중 하나라도 흑살문주에겐 문제였다. 멀쩡히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의복이 끊임없이 잘게 떨리고 있다. 그의 주먹에 담긴 뇌전이 흑살문주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다. 흑살문주는 황극린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놈의 목적이 나였는가?’

그런 착각이 들 만큼.

황극린의 공세는 치밀했다. 그의 피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 대충 예상은 간다. 그가 정말 선경이라면, 마기를 제약할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초반에 흑살문주에게 일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으로 흑살문주에게 피해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거기다 흑살문주는 그가 힘을 어느 정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준비된 무대였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황극린은 흑살문주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네놈, 유령 쪽 사람인가.”

흑살문주의 물음에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황극린이 흑살문주가 있는 대막으로 향했다면 이처럼 완벽하게 싸우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패배할 것이라 생각이 들진 않았다.

“날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조금 알지.”

“그런가.”

진중한 눈빛으로 황극린을 마주하는 흑살문주.

그의 몸에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그때마다 사방의 빛이 움찔움찔 떨린다.

“어디서 나에 대한 정보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건 칭찬해 주도록 하지.”

“그거 고맙군.”

황극린은 전생에 특급 살수를 목표로 살아갔다. 살수의 정점이라 불리는 흑살문주가 저리 말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나, 거기까지다. 네놈에게 이걸 쓸 줄 몰랐지만, 어쩔 수 없군.”

정확히 말하면, 다시 천화련주를 만나면 쓰려고 최후의 일격으로 남겨 두었던 기술이다.

단천절영식은 분명 강한 기술이 맞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계를 느꼈다. 천화련주라는 거대한 산이 운용하는 기를 침범할 정도로 예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흑살문주는 새로운 기술을 완성했다.

뭐, 천화련주와의 싸움부터 생각해 왔던 건 아니었다. 그 전부터 갈고닦고 있었지만, 천화련주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여 천화련주의 심장을 꿰뚫은 유령의 기술을 보고 깨달은 것이었다.

“암월.”

암월이라는 말에 세상이 어두워졌다.

황극린의 감각에도 이상이 생겼다.

동시에.

스걱!

황극린의 심장에 광채가 휘감겼다.

암월개천은형살(暗月蓋天隱形煞).

흑살문주가 최근 완성한 오의였다. 살수의 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은밀하면서도 즉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쿨럭!”

입가와 코에서 피를 흘린다. 전조조차 없이 무언가가 다가왔다. 마치 어둠으로 물들었던 공간 자체에서 억지로 빛이 파고드는 것처럼.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그림자가 아닌 찬란한 빛이 황극린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래도 심장을 피한 건가.”

왜인지 숨이 차는 듯한 흑살문주의 목소리다. 당연했다. 그 한 번의 기의 운용으로 흑살문주는 막대한 내력을 소모했다.

“초월적인 감각이로군…….”

하나, 이제는 끝이다. 심장을 피했다고 해도 가슴이 꿰뚫렸다. 기를 운용할 상태가 아니리라. 이제는 단천절영식으로도 황극린의 목을 쉽게 베어 버릴 수 있다.

‘나쁘지 않아. 이 정도면 충분히 천화련주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

저런 애송이한테 최후의 비기를 사용했다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이제껏 흑살문주를 농락하던 놈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지 않은가?

“뭐, 됐다. 이만 끝내도록 하지.”

흑살문주가 순식간에 황극린의 앞으로 나타났다.

거무튀튀한 마기가 일렁이는 손. 흑살문주는 직접 황극린의 심장을 뽑으려 했다.

“내 심장을 노리는 이유가 뭐지.”

“이제 죽을 놈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가.”

묘하다.

흑살문주는 본능적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황극린은 분명 가슴이 꿰뚫렸다. 아마 간발의 차이로 심장을 비껴 나갔으리라.

그렇다고 한들, 무사한 것은 아니다. 심장 주변에는 중요한 혈맥들이 많았다. 그 옆을 꿰뚫린 것만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놈의 안색이 왜 이리도…….’

멀쩡한 거지?

흑살문주가 의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이놈, 설마 당한 것까지 계산이었나? 아니면 당한 척을 했다는 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부족한 피를 채우기 위해 맥박이 빨라졌어야 한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야 했다. 눈은 충혈되었어야 했는데, 가까이서 본 황극린은 너무도 멀쩡했다.

그는 모른다.

황극린은 당한 순간부터 회복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황극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가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괴물이…….’

하지만 흑살문주를 진짜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네놈과 싸우길 잘했군.”

“……?”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네 해석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너처럼 무영심결을 활용하면 그렇게 되는군. 암천성휘와는 또 달라.”

“무슨.”

흑살문주가 묻기도 전이었다.

“결국, 그림자는 빛이 통하지 않는 공간에 생겨나지.”

그 말에 흑살문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럼 그 반대는.”

“……!”

흑살문주의 동공이 팽창한다. 아니, 그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암월개천은형살을 사용할 땐, 찰나에 불과했지만 공간의 모든 빛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기로 빛 자체를 공간에서 지워 버린 느낌이라 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눌려 있던 빛은 일점에 쏘아지며 상대를 꿰뚫는다.

하지만 황극린은 달랐다.

눈이 멀 것만 같은 광채. 태양을 바로 앞에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지워진 것과 같은 기분. 흑살문주는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공간 자체의 빛을 지우거나 어둠을 없앤다는 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반작용의 힘을 얻기 위해 억지로 힘을 누르는 것에 불과했다.

콰직-!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잠깐이나마 눈앞의 모든 공간을 빛으로 점멸시켰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어둠이 일점에 쏘아졌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