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도착
사천당문의 가주 사천독왕 당초인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 대협.”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엔 감탄과 경외 그리고 죄의식이 담겨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황극린이 보여 준 무위. 수라천가의 가주는 멀리서 보아도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공간을 수직으로 베어 내는 검술을 보았을 땐, 꼼짝없이 황극린이 당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황극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소문은 대단한 황극린이었지만, 실제로 본 황극린은 그런 소문이 축소되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무위에 올라 있었다.
‘내가 이런 분을 욕했다니.’
사천당문은 만뇌문에 지원을 보냈다. 사천당문이 공격당하는데도 만뇌문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당연히 황극린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문이 망하는 와중에 전력을 떼어 만뇌문에 지원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황극린은 사천당문의 지원을 되돌려보냈고 지금도 열심히 되돌아오는 중이었기에 가주 당초인의 죄의식은 더 커질 예정이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같이 사천에 터를 두고 있는데,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소?”
사실 황극린의 입장에선 사천당문이 공격당하는 건, 자신 때문이다. 물론, 혈마교가 정파와 전쟁을 벌인다면 사천성은 가장 먼저 전쟁터가 될 터였지만, 지금 혈마교가 작정하고 사천으로 온 것은 황극린을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확실시되고 있다.
황극린으로선 모든 사실을 알려 줄 수 없었기에 뻔한 말로 치장했지만, 당초인의 입장에선 아니었다. 만뇌문은 용성의 소속이다. 무림맹과 용성이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처럼 만뇌문의 핵심 무인이 직접 지원을 온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황 대협의 말씀, 당문의 무인들에게도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잊었던 강호의 도리.
어려운 자들을 돕고, 협을 펼친다. 사천당문은 사실 정파에 속해 있었지만, 정파에서도 소외된 집단이기도 했다. 독을 사용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파인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황극린은 그들을 직접 도와주러 왔다.
어려운 사천당문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은원을 배로 갚기로 유명한 사천당문.
그들은 강호의 도리를 지켜야만 했다.
“이건 만천화우입니다.”
황극린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만천화우를 건네주는 것에 장로들이나 원로들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수긍했다. 사천당문은 오늘 혈마교에게 멸문했을 수도 있었다.
“황 대협 같은 경지에 이르신 분에겐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 대협이라면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서책 한 권을 건넨다.
표지엔 만천화우 제작법이라고 적혀 있다. 의미는 간단하다. 만천화우의 제작법을 만뇌문과 공유한다는 것. 무공은 아니지만, 사천당문이 가진 최고의 병기라 불리는 것이었다.
“거절하지 않겠소.”
다다익선.
초우는 만뇌문의 진법 내에 수많은 기관진식을 설치했다. 만천화우는 기관진식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제안이 무엇인가?”
“혹시 모르니 그를 제압한 뒤, 부궁주와 소궁주는 합방을 치를 거다.”
“…….”
혈마교주는 빙궁주의 말을 이해했다. 빙백마후는 황극린의 피를 이은 자들이 북해의 저주를 해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가 선경이라면 그것도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받아들이도록 하지.”
“좋다.”
혈마교주가 선선히 승낙했다. 빙궁주는 그런 태도에도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듯했으나 어차피 그게 그녀가 원했던 결말이었다.
“그리고 부궁주도 황극린와 싸울 때 함께할 것이다.”
부궁주를 흘끔 바라본 혈마교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했군. 오래 살지 못하겠어.”
“그건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좋다. 빙궁의 부궁주 정도라면 믿을 만하겠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쉬도록 해라.”
빙궁주는 대답도 하지 않고, 빙궁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흑선노마가 조용히 와서 묻는다.
“빙궁이 원하는 대로 해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차피 빙궁은 우리와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빙궁이 왔으니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지.”
“받들겠습니다, 교주시여.”
* * *
“빙궁까지 도착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황극린이 흑주를 타고 정보를 취합했다. 현재 교특범이 이끄는 무문은 혈마교의 군세에 밀려 숨어 있었다. 하늘을 나는 전서구들은 혈마교도들에 의해 장악된 지 오래였다. 정보를 받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만뇌문을 향한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다.
“허허, 이것 참.”
혈마교와 만뇌문.
당연히 만뇌문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무림에서 지원이 오고 있었지만, 시일이 걸린다. 대부분 혈마교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지 몰랐다. 거기다 북해빙궁까지?
“빙궁은 자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나?”
“단순한 호의였을 뿐이지요.”
황극린은 애초부터 빙궁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찌할 생각인가?”
“정면 대결로 가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겁니다.”
사실이 그렇다.
혈마교의 전력은 중원 무림 전체와 싸울 수준이라는 평이 많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만뇌문은 하루아침에 멸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극린이 많은 대비를 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말은?”
“각개격파입니다.”
“안 그래도 우리의 전력이 부족하다네. 흩어진다면 불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진의 효용을 믿는다면 가능합니다.”
화염신황도 진에 들어가 보았다. 확실히 대단한 힘이 진 전체를 감쌌다. 모종의 힘이 내력을 움직이는 것을 제약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절대적인 전력 차이를 뒤집을 수 없다.
“그렇군.”
화염신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교주나 빙궁주 같은 이들을 유인해서 싸우겠다는 건가?”
“그게 여러모로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때,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다. 하늘을 장악했다는 혈마교. 그 감시망을 뚫고 날아왔다는 건.
‘마령이 보낸 것이로군.’
서신을 펼쳐 보니 상당히 급히 작성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글씨가 날아갈 듯 급박하다.
- 혈마교주와 빙궁주 출정!
예상보다 빠르다. 혈마교도들이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건대 하루 이틀 정도 뒤에 공격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런데 혈마교주와 빙궁주가 먼저 출발했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로군.’
혈마교 입장에서도 빨리 황극린을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끌면 정파 무림의 지원이 있으리라. 거기다 천화련주까지 생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황극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왔습니다.”
두우우우우…….
만뇌문의 진이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 진 안으로 침입했다는 말이었다.
* * *
흑살문주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의 장점은 당연히 은신과 암살. 그림자는 빛이 있다면 인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이다. 흑살문주 암혼마제는 여러 준비를 거쳐 만뇌문의 진 안으로 침입했다.
‘고작 진으로 막으려 했단 말인가.’
차라리 도피하는 게 옳았다.
황극린이라는 어린놈은 여태껏 나약한 존재들만 상대해 가며 명성을 쌓아 왔다. 사대마제 중 세 명이 그를 노리고 있으니 그의 업적은 오늘로서 끝이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으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구웅-!
어떤 때라도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천화련주에게 패배하였을 때에도 당혹감을 내치비지 않았던 흑살문주였다. 예상한 결과라서다. 천화련주의 힘은 사대마제가 상대하기엔 껄끄러운 힘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대체 무슨 짓을?’
진에 진입하는 순간 느꼈다.
뇌리를 때리는 귀곡성을 말이다.
배교의 진법에도 이와 비슷한 게 있다. 배교는 오래전부터 마경을 연구해 왔다. 그들의 진법이 특별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흑살마제는 배교가 만든 진을 몇 번 경험하고 부숴 버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어떻게 만뇌문의 진 내에서 이토록 진한 마기가 느껴진단 말인가?
흑살마제와 함께 진입한 암귀와 독귀가 당황한다. 그들은 이런 것을 처음 경험해 보았다. 아무리 특급 살수라 할지라도 마기에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 문주시여, 귀가 이상합니다.”
“왜인지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살수들은 고문 훈련도 받는다. 특급 살수는 당연하게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
“나가 있도록. 청성산의 떨거지들을 죽이도록 하라.”
문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특급 살수 두 명은 황극린을 제외한 놈들을 죽이려고 들어왔다. 여차하면 황극린의 약점을 공략한다. 흑살문이 파악하기로는 그는 만뇌문을 소중하게 여겼으니까.
그렇게 두 특급 살수가 떠나려고 할 때였다.
- 끼이!
외마디 포효 소리가 들린다.
특급 살수 두 명의 움직임이 멈췄다.
콰지지직!
“끄아아악!”
“크윽!”
고통이라는 것에 비명을 뱉은 지가 얼마인가? 두 특급 살수는 온몸을 지져 버리는 뇌전에 참지 못하고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러나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흑살마제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두 특급 살수를 옭아맨 거미줄이 잘려 나간다.
흑살마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질기군.’
흑살마제가 작정하니 겨우 두 특급 살수가 풀려난다. 그들의 얼굴에 당황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대체 이 공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라.”
“예, 옛!”
특급 살수가 도주한다.
하지만 막아서는 존재는 없었다. 흑살문주가 어두운 왼쪽 벽면을 노려본다.
“꽤 많은 준비를 했군.”
그 공간에서 황극린이 나타났다.
흑살문주. 가장 먼저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혈마교주나 빙궁주를 상대할 때, 몰래 공세를 펼쳐 올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그런 생각으로 먼저 잠입하여 숨어 있을 생각이었겠지만, 진법의 효용에 들키고 말았다.
“특급 살수 두 명은 죽을 거다.”
“…….”
바깥에도 대비가 되어 있다는 건가. 적이 도주하는 상황도 상정했다? 이들은 공성을 벌이고, 지원을 기다리려고 한 게 아니었다. 상대를 잡아먹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다.
“놀랍군.”
흑살문주의 음색.
황극린은 한때 그의 고강함을 동경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감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얄팍한 자신감이 놀라워.”
흑살문주는 말을 저리 길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황극린은 그가 예상보다 당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확실히, 황극린도 진의 효용에 감탄할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이 진의 위력은 영원토록 지속되진 않는다. 이곳이 마경처럼 완전히 변모하면 또 모를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군.”
“뭐지?”
“어떻게 공간의 기운을 변모시킨 거지?”
“궁금하면 알아내라.”
“그러지.”
흑살문주는 가만히 황극린을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어느샌가 뻗어 온 그림자. 빛을 받으면 그림자의 크기는 고정된다. 하지만 흑살문주의 그림자는 다르다.
단천절영식(斷天絶影式).
황극린은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하늘마저 단절하여 그림자를 잘라 낸다는 오만한 이름을 가진 초식. 저것은 그 어떤 특급 살수도 이어받지 못한 무공이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저 무공을 견식한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곳에서 말이다.
“천화련의 유령도 그와 비슷한 무공을 익혔었는데.”
유령이라는 말에 흑살문주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황극린의 예리한 감각으로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쉬익!
황극린의 등 뒤에 있던 그림자가 치솟았다. 동시에 흑살문주가 그곳에 있었다.
“그럼 잘 알 테군.”
사악!
피가 튀었다. 최근 어느 상대에게도 상처를 입지 않았던 황극린이다. 그의 육신은 뇌섬사로 만든 의복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며, 그의 감각은 어떠한 공격도 피해 낼 수 있는 예민함이 있다. 그림자는 황극린의 가슴을 그었다. 뇌섬사의 의복을 깔끔히 베어 내고 말이다.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흑살문주의 말이 끊겼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건……?”
황극린의 피가 그림자에 묻자 이변이 생겨났다. 팔과 다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림자가 왜인지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심결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나 보군.”
“……!”
흑살마제의 동공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