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진(眞)파열고
수라천가의 가주 마랑천살도(魔狼天殺刀) 혁련광은 사천당문 따위야 언제든 없앨 수 있는 문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육대세가도 아니면서 고작해야 독을 주력으로 다루는 곳이다. 수라천가만 나서도 하루 만에 멸문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중에 명령이 내려왔다.
사천당문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라는 명령이 말이다. 그들은 과거 곤륜파처럼 역사에서 잊히게 될 것이다.
“만천화우는 조심해야 한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폭발하는 암기들이다. 거기엔 사천당문이 자랑하는 극독이 발려 있을 것이다.”
혁련광.
사천당문을 하루 만에 멸문한다는 자신감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비장의 한 수가 별것 아니라 판단하진 않는다. 만천화우가 무림에 등장한 적은 몇 없었지만,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쉽다고 생각한 사천당문에 가솔들이 죽는다면 얼마나 아까우리?
수라천가의 마인들은 혁련광의 조언을 깊이 새겼다. 만천화우가 등장하면 어떻게 대응할지 대책을 다 세워 놓았다.
그렇게 수라천가의 마인들이 사천의 성도의 진입했다.
그들을 가로막는 자들은 없었다.
휘익-! 휘익-!
가까이 다가와서 깨작깨작 암기를 날려 대는 당문의 무인들. 그들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돌았지만, 강자존을 숭배하는 혈마교에서 살아왔던 수라천가의 눈엔 장난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탕, 탕탕!
암기를 쳐 낸 수라천가의 마인 중 하나가 소리친다.
“계집들도 아니고, 장난감이나 가지고 노는구나?”
“이익!”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금방 사로잡혔다.
“만천화우는 누가 가지고 있지?”
“당문에 진법이 있나?”
“실토한다면 네놈은 살려 주마. 어떠냐?”
진격을 멈추지 않으면서 사천당문의 무인들을 납치했다. 이것도 혁련광의 명령이었다.
‘사천당문, 그래도 저력이 없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놈들에게 수하 몇 명만 다쳐도 내겐 손해.’
혁련광은 완벽하게 사천당문을 잡아먹고자 했다.
멀찍이 서서 수라천가의 진격을 감시하던 당문의 무인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수라천가의 압도적인 강함. 그나마 사천당문에서 암기술이 수위에 오른 이들이 나섰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했다.
‘저놈들은 괴물…….’
사천까지 혈마교가 당도하였지만, 그 누구의 지원도 없다.
당문의 힘으로 저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만천화우라도 저 괴물들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혁련광이 소리친다.
“모두 죽여라.”
기세를 탔을 때, 끝을 내야 한다.
사천당문의 입구를 지키는 놈들은 잔뜩 겁을 먹은 상태다. 이대로 정문을 뚫고, 장원을 점령한다.
“가자아아아아-!”
“키야아아아!”
괴이한 소리를 내며 달려가던 수라천가의 마인들.
그 소리가 기괴하게 바뀌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아악!”
“살려 줘!”
혁련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대체 뭐지? 무언가가 번쩍할 때마다 수라천가의 마인들이 쓰러진다. 마치 뇌전을 뿜어내는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하다. 그것이 지나친 곳은 쑥대밭이 되어 있다.
“황극린?”
그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흑선노마는 황극린이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당연했다. 그건 거리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황극린은 조금 전까지 다른 지역에서 혈마교도 소무리를 학살했다. 이제껏 대규모의 병력을 노리지 않았다.
‘쯧, 군사 놈들이 다 그렇지.’
혁련광이 앞으로 나아간다.
“네놈에겐 빚이 있었지.”
내공을 가득 담은 웅장한 말투. 그가 자랑하는 천살도(天殺刀)에선 음울한 마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황극린을 정면으로 상대할 사람은 수라천가주밖에 없었다.
“…….”
하지만 황극린은 종횡무진 수라천가의 마인들을 휩쓰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냥 수라천가주를 무시하고 있다고 할까?
“마, 마악! 막으라고!”
“으아아악-!”
수라천가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기 시작했을 때.
사천당문의 가주가 그들의 정예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 순간.
붉은 눈동자가 수라천가주를 응시했다.
- 지금 가마.
수라천가주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 *
“싸워라!”
“독을 아끼지 말아라! 저놈들은 극악무도한 혈마교도들이다!”
“우아아아아-!”
황극린이 한바탕 휩쓸어서 그런지 자신감 넘치던 수라천가의 기세는 모두 사라졌다. 사천당문에 당할 정도로 전력이 약화된 건 아니었지만, 아직 황극린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는 수라천가의 중심인 수라천가주와 마주하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지.”
“그랬나?”
“예상보다 뻔뻔한 성격이었군.”
황극린이 피식 웃는다.
“그냥 기억이 안 나서 말이야.”
네놈의 아들은 기억하기도 귀찮은 수준이다, 뭐 그런 뜻이었다. 수라천가의 가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적 앞에서 그걸 인정하긴 싫었다.
“네놈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나?”
혁련광의 질문에 황극린이 답한다.
“약하진 않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본교의 부교주 하나를 잡았다고, 혈마교도가 모두 네 발아래에 놓이는 게 아니다. 너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무슨 착각을 했다는 거지?”
“마도삼가의 가주가 왜…….”
혁련광이 사라졌다.
황극린이 뒤를 돌아보자 그가 있었다. 대단한 보법이다. 순간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보통 마공을 익힌 이들은 우악스러운 힘으로 상대를 누르곤 했다.
하지만 혁련광의 기세는 달랐다.
무(武)를 극도로 수행한 무인. 그에겐 그러한 기세가 정제되어 있었다. 거대한 도에선 굳세고 단단한 도강이 번뜩이고 있다.
생사일도(生死一刀).
일도로 생사를 가른다. 혁령광의 천살도가 공간을 갈랐다.
쉬이익-!
처음부터 오의를 펼친 혁련광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피했다?’
혁련광이 가장 자신 있는 게 보법과 도법이다. 그의 보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신묘했으며, 그의 도법은 빠르게 날아가던 새조차 떨어트린다고 한다. 그러나 코앞의 황극린은 맞히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황극린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도를 피해 냈다는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이로군.”
쉬익-! 쉬익! 쉭-!
혁련광이 황극린을 노리고 도를 휘둘러 갔다. 그러나 황극린에겐 닿지 않았다.
“이놈!”
구전회풍(九轉回風) 회풍참마(廻風斬魔)!
혁련광의 두 발을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하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주변에 있던 수라천가의 마인들도 밀려날 정도의 풍압이다.
그리고 수십 개의 도강이 공간을 베어 냈다.
스걱!
무언가가 베인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줄…….”
“그래서 잡았다.”
정확히 무언가를 벤 것이 아니다. 묵직한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순간 천살도의 무게가 몇 배로 늘어나는 듯했다. 그 정도로 도를 놓칠 혁련광은 아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위험하다.’
콰지지직-!
혁련광은 놀랍게도 도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도강을 일으킨 천살도를 맨손으로 잡고, 역으로 뇌전을 흘려보낸다.’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무인들도 몇 있었지만, 대개 사용하지 않는다. 내력의 소모가 상당하고 비효율적이다. 무공 싸움이 아니라 내공 싸움이 되어 버린다. 단순히 내공이 많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내공의 질이 달라야 한다.
혁련광은 짧은 순간 느꼈다.
황극린이 가진 뇌전이…….
‘내 마기를 압도했다.’
찰나의 순간 판단하여 손을 놓았다.
그런데도 두 손이 얼얼하다. 혁련광은 근처에 있던 마인의 애병을 뺏어 버리고 다시 손에 쥔다. 천살도가 아닌 것은 아쉬웠지만,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사용해야 한다.
그 날카로운 눈동자는 황극린의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빈틈이 너무 많다.’
그렇기에 곤란했다.
저 모든 빈틈은.
‘모두 함정.’
수라천가주 혁련광이 긴장했다. 부교주급 실력이다. 백골마존을 이겼으니 혁련광도 긴장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을 펼쳤다. 생사일도는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속에 혁련광이 무공을 익히며 얻은 심득이 담겨 있었다.
‘잘못 판단했다.’
위험한 놈이다. 이놈의 수준은 고작해야 부교주급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혁련광의 표정을 훑어본 황극린.
그가 천살도를 제대로 쥐었다.
“괜찮은 도군.”
까드득.
혁련광이 이를 간다. 황극린은 권법을 쓴다. 그런데 도를 쥐고 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권이 아닌 도로 날 상대하겠다는 건가?”
“못 할 이유도 없지.”
혁련광이 미소를 머금었다.
“네놈은 이미 끝났다.”
탁! 탁탁!
황극린의 발아래서 뭔가가 터져 나갔다.
“파열고에 당하지 않았다지. 하지만 내가 키운 그놈들은… 이제껏 네가 겪은 놈들과 다를 거다.”
꾸리익.
열 마리의 벌레가 황극린을 향해 돌진한다.
“아비나 아들이나 똑같군.”
황극린이 도발을 해도 혁련광은 태평했다.
생사일도가 통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이미 본능적으로 황극린의 수준을 알아차렸다. 놈을 순수한 무력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건 분했지만,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거다.
“진(眞)파열고는 교주께서도 쉬이 막아 내지 못했다.”
“정말인가?”
“이미 늦었다.”
진파열고라는 놈들이 황극린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간지러웠다. 놈들이 황극린의 피를 뽑아 먹으려 한다.
혁련광이 다시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천살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공을 펼칠 수 없는 건 아니다.
혹시 모른다. 황극린이 진파열고를 막아 낼 수 있을지도.
그렇기에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죽거라!”
다시 한번 생사일도가 펼쳐진다.
혁련광의 중심으로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하단전에 품은 막대한 내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기라는 건, 결국 공간에 작용한다. 생사일도는 혁련광의 주변과 바라보는 공간을 제어하는 무공이었다.
사악!
생사일도가 황극린를 반으로 쪼갤 듯이 펼쳐졌다.
황극린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이놈들은 내 피를 먹기 싫다는군.”
“뭐……?”
황극린의 천살도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다. 공간을 장악하는 생사일도가 그에게 가볍게 가로막혔다. 저 기운을 본 적이 있다. 저건 분명히…….
“커억?”
발뒤꿈치부터 골반까지.
난생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놈들이 왜……?”
전력을 다해 막는다. 내공을 끌어 올려 놈들을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건 파열고가 좋아하는 먹이일 뿐이다.
“나도 모르겠군.”
아니, 알고 있었다.
황극린은 육금연에게 들어 파열고가 마경에서 탄생한 마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놈들은 황극린의 피를 먹으면 만족하고 통통한 배를 까뒤집는다. 반대로.
‘암천성휘의 기운은 극도로 싫어하지.’
진파열고든 뭐든 놈들에게 피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황극린은 파열고들을 몰아내고 혁련광에게 던져 버렸다. 안 그래도 굶주림에 가득했던 파열고들은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살점을 파먹기 시작했다.
“끄윽.”
역시 수라천가의 가주는 다른가. 파열고에게 쉽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기다려 줄 시간은 없군.”
“……!”
황극린은 혁련광을 기다려 주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싸우고 있다. 희생은 적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수라천가의 가주 혁련광.
그는 자신의 천살도에 목이 베이고 말았다.
수장이 죽으니 전세가 돌변했다.
* * *
“혁련광이 실패했습니다.”
흑선노마가 부들부들 떤다. 황극린 그놈이 대체 언제 거기까지 간 거지? 아무리 경공이 빠르다고 해도 가능한 일인가? 거기다 이제껏 보여 주었던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소규모의 마인들을 습격하긴 했지만, 수라천가와 같은 거대한 무리를 습격하진 않았다.
“흑살문 이놈들은 대체 뭘 하는 것이냐!”
군사가 주름 가득한 볼을 파들파들 떨고 있을 때.
혈마교주가 나타났다. 흑선노마가 그에게 넙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교주시여…….”
“예상했던 일이다.”
황극린을 만나 보았다. 수라천가주로는 그를 막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수라천가주는 쓰임이 많았던 존재입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쓰임은 다했다. 수라천가주가 당했다는 말은 진파열고마저 황극린에게 통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 그 말씀은…….”
흑선노마가 몸을 움찔했다.
혈마교주의 말에 놀란 것도 있겠지만, 주위의 살을 에는 추위에 턱이 달달 떨렸다.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감길 정도의 추위다.
“이젠 확실히 결정했나, 마후?”
무림에선 빙천마제라 불리나 스스로 빙백마후라 칭하는 존재.
북해빙궁주의 궁주가 도착했다.
그녀의 뒤에는 부궁주 한소연을 비롯하여 빙궁이 자랑하는 나찰과 선녀들이 있었다.
빙백마후가 혈마교주의 앞에 선다.
“그 전에 네놈에게 제안할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