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번쩍번쩍
“그러니까 놈들이 극린이 널 탐한다고?”
“그렇소.”
뇌불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한다. 황극린이 가진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선경이라고? 마경의 반대라서 선경이라 부르는 건가? 그리고 만약 황극린이 선경이라면 뭘 하려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분노가 치솟았다.
“미친 것들이로군. 정말 제대로 미쳤어.”
“서신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우리가 주도할 수 있소.”
뇌불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또 너 혼자 감당할 셈이냐?”
“그럴 리가 있겠소?”
황극린은 뇌불을 기다려 왔다. 혼자서 혈마교 모두를 상대하라? 물론, 마음은 편하겠지만 몸은 편하지 않으리라. 혈마교주와의 일대일로 싸운다면 거리낄 게 없지만, 혈마교의 정예들이 속속 사천성에 도착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걸 할 뿐이오.”
“네가 가장 잘하는 거라면…….”
뇌불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린다. 마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적들도 뒤에서 수작을 부리며 만뇌문을 가두려고 하고 있소. 반대로 갚아 줘야 하지 않겠소?”
“좋은 생각이로구나.”
황극린이 함부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
저들의 목적이 뭔지 모른다. 황극린이 따로 다닐 때 전력을 다해 만뇌문을 공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런 선택을 하고 황극린을 묶어 둘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정말 원하는 게 황극린이라면 그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아니, 주도권을 가지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래도 바깥에 너무 오래 있지 마라. 언제 큰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겠느냐?”
황극린은 뇌불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소.”
황극린은 오랜만에 살수로서 무림에 나서기로 했다.
흑살문에서 황극린을 혈귀라 칭했다던가. 그들이 원한다면 혈귀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 * *
“정파 놈들, 청성산에 갇혀서 나오지도 않는군.”
혈마교의 가장 위대한 가문이라 불리는 마도삼가 중 하나 야수천가의 무인들이 사천성 대읍(大邑)현의 어느 객잔을 점거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연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술을 입에 대진 않았지만, 그들의 태도에는 여유가 넘쳤다.
청성산과 거리가 꽤 있었던 탓도 있지만, 정파 놈들은 그들의 그림자만 봐도 꽁무니를 뺐다. 그들 또한 사람이었기에 전쟁에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을 해 보니 이렇게 쉬운 것도 없었다.
조만간 청성산 전체를 혈마교의 정예들이 에워쌀 것이다.
만뇌문이 순식간에 함락당한다면, 정파인들도 과거의 공포를 다시 깨달으리라.
“차라리 황극린이라는 놈이 좀 나타났으면 좋겠군. 얼마나 강한지 보고 싶어.”
“클클, 그러게나 말이야. 혁련소 그놈이 된통 당했었다길래 기대를 했는데, 쥐 새끼처럼 숨어만 있는군.”
“다 그렇지 않겠나? 풀을 뜯어 먹는 놈들은 피를 탐하는 맹수를 두려워하지. 우리 야수천가의 위엄을 보고 겁을 먹은 게지.”
“말 되는군. 토끼가 도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들의 자신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지금은 혈마교의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임무를 가지고 정파인들을 학살하고, 백성들을 핍박한다. 당연히 구석에 숨어 벌벌 떨기만 하는 만뇌문의 평가는 박해지고 있다.
“그나저나 선조들께서 왜 중원을 차지하려 했는지 알 것 같단 말이야.”
“왜?”
“어딜 가든 약탈할 게 널려 있지 않나?”
“크크크, 그렇군.”
야수천가의 무인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탐했다.
혈마교주의 명령은 간단했다. 사천성을 혼란에 빠트려라.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욕망을 마구 분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시하긴 하군.”
“어디서 황극린 그놈이 안 나타나려나.”
“하하핫! 그놈이 나타나겠어? 곧 청성산으로 간다고 하니 그때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지.”
“크크, 정파 제일의 고수라는 놈이 교주께 빌빌대는 모습은 참으로 재밌긴 하겠어.”
“하하하하!”
“크하하하!”
쿠르응!
야수천가의 무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감각은 예리하다. 공간의 냄새를 맡고, 피부에 닿는 습기로 비가 올지 안 올지 알 수 있다. 지금 사천성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웬 번개?
야수천가의 무인들도 바보는 아니다. 거기다 황극린이 주로 사용하는 무공이 뇌전과 관련이 있다는 교육도 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동시에 들려오는 비명.
코를 간질이는 혈향.
“뭔가 왔다!”
그렇게 외치는 순간.
“멀리서 들어 보니 재밌는 이야기를 하더군.”
“……!”
달이 밝게 대지를 비추는 밤이다. 호랑이가 밤중에 만나면 귀기(鬼氣) 어린 푸른 눈동자를 빛낸다고 하지만, 이런 밤에는 티가 나지도 않으리라. 그런데 눈앞의 사내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빛이 반사되는 게 아니라, 눈 자체에 광채가 휘몰아치는 듯이 말이다.
“죽여라.”
간결한 명령.
야수천가의 무인들이 살벌한 움직임으로 붉은 눈동자의 사내를 공격한다. 이제껏 풀어진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태도가 돌변한다. 그들 또한 강자존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던 혈마교 내에서 강자로 군림하던 존재들이었다.
“야수탈혼(野獸奪魂)!”
사자처럼 거대한 덩치와 갈기와 같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사내가 의복을 흩날리며 사내에게 돌진했다. 그의 뾰족한 손톱은 강철마저 잘라 낼 정도로 예리했다.
쉬익!
그러나 사내의 옷깃에도 스치지 못했다.
“이걸로 백이군.”
“백……?”
사내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손바닥을 펼쳤다. 순간 야수천가의 무인들은 밤이 아니라 낮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콰지지직-!
황극린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튀기듯 터져 나오는 뇌전. 그것이 객잔 전체를 뒤덮는다. 살수처럼 한 번에 하나씩, 그런 방식은 몹시 비효율적이다. 황극린은 짧은 시간에 최대의 피해를 선사할 생각이었다.
“끄어어억!”
“으아아아악!”
감전된 야수천가의 무인들이 고통의 비명을 질러 댔다.
심심하다며 황극린을 찾던 놈들이었지만, 막상 황극린이 나타나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압당하고 있었다.
“으음, 이번 냄새는 좀 고약하군.”
야수천가의 무인들을 제압한 황극린이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저들 또한 황극린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산되어 있던 무인들이 뭉치기 시작한다. 개중엔 황극린의 후각을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가 있었다. 고수라는 뜻이었다.
황극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반대로 달려 나갔다.
그는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황극린을 맞이하기 위해 저들이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 * *
콰앙!
군사라고 함은 보통 학사풍의 노인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강자존이 진리인 혈마교의 군사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주먹질 한 방에 거대한 탁상이 가루가 되어 버린다.
혈마교의 군사 흑선노마가 분노하고 있었다.
“야수천가의 직계들도 당했다고?”
“예, 대려군 외 총 서른 명이 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이후에 그놈은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고?”
“취약한 부분만 골라서 타격하고 있습니다. 교도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황극린은 취약한 곳만 노리고 있다.
혈마교에서도 대응을 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런 낌새가 보이면 바로 도주했다. 참으로 쥐새끼처럼 얍삽했다. 사천성 전체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흑선노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교주와 마도삼가의 가주 그리고 장로들이 있는 곳은 철저히 피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간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혈마교에 간자가 있다?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다. 애초에 혈마교도들은 대부분 십만대산에서 태어났다. 간자를 투입하기엔 가혹한 환경이다. 거기다 간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각각 움직이는 고수들의 움직임을 적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아니다. 그건 아니겠어. 그냥 놈이 뛰어난 거다.”
“어찌해야 할지……. 이대로면 피해가 극심해집니다. 교주님이 내리신 ‘혼란’을 중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작전명 혼란.
사천성을 뒤집어 놓고, 사천성에 지원하러 오는 문파들을 처리하여 만뇌문을 겁박하라는 게 혈마교주의 명령이었다. 지금까지는 잘 먹혀들어 갔으나 황극린이라는 놈이 직접 움직인 하루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그러던 중, 흑선노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놈이 원하는 거다. 어울려 줄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놈들의 처리는 흑살문에게 맡기도록 하라. 그리고 수라천가주에게 전달하도록.”
흑선노마가 잔혹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오늘 사천당문을 멸문하라고.”
사천당문은 육대세가에 들어가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정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명문가였다. 흑선노마는 한마디 말로 사천당문을 멸문하라 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드는 수하 또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흑선노마가 명하면 오늘 사천당문은 멸문할 것이다.
“본교를 흔들려고 한 죄는 크지.”
압도적인 무력으로 공포를 선사한다.
과연 사천당문이 멸문했는데도, 다른 문파들이 만뇌문을 도우려 할까? 전쟁이란 기세였다.
“군사님, 보고드립니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사천성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보고를 들은 흑선노마가 창밖을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크크, 네놈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대세는 변하지 않는단다.”
황극린이 발악할수록 그의 최후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
* * *
파천뇌권 황극린이 나섰다는 소문은 사천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혈마교도들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청성산에 박혀만 있던 만뇌문. 거기에 화산과 소림까지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니 백성들의 불만은 상당했다.
하지만 황극린이 움직이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죽이던 혈마교도들이 함부로 병력을 분산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천당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붉은 깃발을 든 놈들이… 성도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붉은 깃발에는 ‘수라천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혈마교의 위대한 가문 중 하나. 사천당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화산과 소림에선?”
“전서구를 보냈지만, 지금 혈마교도들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전서구가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기랄!”
사천독왕(死天毒王)이라 불리는 사천당문의 가주가 욕설을 내뱉는다. 화산이나 소림이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만뇌문 때문에 혈마교가 쳐들어왔다. 황극린이 나섰다고 하지만, 잔챙이만 잡고 으스댄다고 생각했다.
“그걸 준비하게.”
가주의 말에 당문 무인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만천화우(滿天花雨)는 무공이 아니다.
일회성의 병기라 할 수 있었다. 세상에 딱 두 번 모습을 드러냈다. 우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살상을 목표로 한 병기다. 대부분 사천당문의 멸문 위기 때 등장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증거다.
이미 사천당문은 몇 번이나 수라천가의 무인들과 충돌했지만, 제대로 된 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줄곧 밀려났다. 결국, 가주 혁련광을 위시한 수라천가의 마인들은 사천성의 성도까지 진입하고야 말았다.
“아미파는 어떻게 되고 있나?”
“아미산을 공격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도 위험하겠군.”
부웅-! 부웅-! 부웅-!
사천당문 내부에 거대한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도에 그들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다. 그런데 벌써 사천당문의 장원에 도달했다는 뜻인가.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버리는 패였나.”
가주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가신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살아남아 왔다. 누군가는 정파인이 독을 쓴다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독으로 사천당문이라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가주가 처절하게 외친다.
“수라천가, 더 나아가서는 혈마교도. 그들에게 맹독의 무서움을 알려 주도록 하자꾸나!”
만천화우 세 개가 도착했다.
가주와 내당주 그리고 외당주가 그것을 착용했다. 만천화우를 착용했다는 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사천당문을 이끌던 이들의 각오가 당문의 무인들에게 전해졌다. 모두가 분노와 슬픔으로 눈동자가 흐릿했다.
“가자꾸나! 사천당문의 영예를 위하여!”
“예, 가주님!”
혈마교.
거대한 적과 맞서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포기한다. 그 위대한 사명을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 죽더라도, 그들의 오늘 싸움은 중원의 역사에 새겨지리라!
그러한 생각을 하고 전투에 나선 사천당문.
하나,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당당히 사천당문으로 진격하는 수라천가의 무인들이 아니었다.
“저, 저게 뭐야?”
콰지지직-!
뇌전을 사방으로 내뿜는 둥근 구체가 수라천가의 무인들을 헤집고 있었다.
“막아! 막으라고!”
“이, 이 미친 번개가!”
“으아아악!”
아비규환.
사천당문 장원 바로 앞에서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지고 있었다.
“허?”
만천화우를 들고 가장 먼저 앞서 나가던 사천당문의 가주가 입을 벌리고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