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무신의 귀환
“혀, 혈마교주가…….”
하종과 율명이 혈마교가 만뇌문을 노린다는 소식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들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혈마교주와 다시 만나야 한다니. 그리고 혈마교가 왜 만뇌문을 공격하는가?
“서, 설마 우리 때문에!”
황극린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 때문이 아니다.”
황극린이 자신들을 배려해서 저리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백온후가 다가가서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장로님은 이런 거짓말 안 해. 그러니까 그냥 믿으면 돼.”
무한한 신뢰. 백온후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만뇌문도들도 모두 황극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랐다. 황극린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하종과 율명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황극린은 문도들을 보며 말한다.
“진법을 통과하려는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진법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려 주도록 하겠다.”
새로운 진법?
그러고 보니 황극린이 진법 보수 작업을 하고 난 뒤로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따라와라.”
문도들이 황극린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진법의 입구. 처음엔 딱히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거, 거미줄이?”
사방에 깔린 거미줄. 촘촘하게 깔린 거미줄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만뇌문의 무공을 익힌 너희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을 거다. 만져 봐라.”
“어? 끈적끈적하지 않고, 비단을 만지는 것같이 부드럽습니다!”
구자광의 발언에 황극린이 말했다.
“너희 둘이 한번 만져 보렴.”
하종과 율명.
두 아이가 거미줄을 만지자.
“허억!”
“소, 손이 안 떨어져요!”
“너희는 아직 뇌전과 관련된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그렇다.”
두 아이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만뇌문에 입문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못하였다.
“오늘부터 온후가 너희 두 사람에게 무공을 알려 줄 것이다.”
“……!”
“진법 내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열심히 하도록.”
“네!”
하종과 율명으로 알 수 있는 사실.
진법 전체에 깔린 거미줄은 뇌전과 관련된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거기에 묶여 움직임을 봉쇄당한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쇠뇌.
그 옆으로는 묵철로 화살촉을 만든 화살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묵갑을 만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화살을 만드는 건 초우 대장간의 실력이라면 금방 만들 수 있었다.
“뇌정신공을 익히지 못한 자들은 초반에 쇠뇌를 다루면 된다.”
“예, 장로님!”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던 공야월이 불안한 듯이 말한다.
“진법의 중심부에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대부분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겠지.”
대체 무엇이 있을까?
“당장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진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려 주러 온 것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혈마교가 척살 명령을 내렸다고 처음 들었을 때, 문도들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이전부터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진법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황극린도 문파 내에 있었다.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문도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더 강해진 건가?”
화염신황이 황극린과 마주 앉는다. 만뇌문을 보호하는 진지는 총 세 겹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바로 진법의 입구에 만들어진 방어선이다. 이곳엔 각 문파에서 파견한 고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화산의 화염신황을 필두로 한 매화검수. 소림의 사대금강 중 두 명과 백팔나한들.
그리고 중원 곳곳에서 원군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뭐, 만뇌문을 도우려는 마음도 있겠지만… 혈마교와의 전선이 더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으리라.
“새로운 것을 접하면 관점이 달라지더군요.”
“관점이라……. 하기야 생각이 갇혀 있다면 발전할 수 없지.”
화염신황은 황극린이 더 강해졌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회계산의 마경을 시작으로 최근 자금성의 마경도 황극린이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게 더 이상하리라.
“혈마교가 왜 자네를 노리는지는 알아낸 겐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곧 알 수 있다는 말이로군.”
“혈마교 내에도 제 사람이 있습니다.”
“허허허…….”
혈마교 내에 심어 둔 간자가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광신도였다. 그런 이들을 회유하는 일은 정파 무림 역사상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급이 낮은 교도들을 매수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이 물고 오는 정보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황극린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퍽 높은 직위에 있는 교도이리라.
아무리 화염신황이라도 소교주 후보인 마령이 황극린에게 정보를 전해 준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까아아!
그 순간, 청매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황극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발에 서신이 묶여 있다. 황극린이 확인한다.
“혈마교주가 직접 움직였다는군요.”
화염신황의 얼굴이 굳는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아직 만뇌문에 도착하지 못한 무인들이 많았다.
“마도삼가와 철마적풍대, 철궁천마대 그리고 흑마질풍단까지 모두 청해성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속도를 보면 칠 주야 내로 만뇌문에 도착할 겁니다.”
“……!”
“대단한 정보로군. 하지만 기병대가 힘을 쓰려면 평평한 대지여야 하지. 이곳에선 아무리 기병대가 많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게야.”
“아뇨. 기병들은 청성산으로 오지 않을 겁니다.”
화염신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들이 노리는 건, 만뇌문을 지원하러 오는 무인들입니다.”
“어찌해야 좋겠는가?”
소림과 화산의 전력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빠진다면,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만뇌문이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하더라도 혈마교 전체를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그건 내게 맡기시오!”
청색 도포를 두른 노인이 나타났다.
청성파의 장문인 태을종객이다.
“예로부터 사천성을 지키는 건 청성파였지요. 만뇌문 또한 마찬가지요.”
“사천의 당문도 빼놓지 마시지요.”
“아미타불, 아미 또한 만뇌문을 돕고자 왔습니다.”
사천당문과 아미파.
그들은 만뇌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문파들이다. 소림이나 화산이 도착했는데도 움직이지 않아서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는데, 이렇게 지원을 보냈다.
화염신황이 미소를 머금는다.
‘자네를 중심으로 정파 무림이 움직이는군.’
세상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하던가.
황극린의 과한 명성을 싫어했던 자도 있을 것이며, 그들이 용성의 밑으로 들어간 것에 불만을 가졌던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결국 정파 무림이 황극린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뭐, 천화련주의 죽음이나 무림맹주의 죽음 같은 사건도 관련이 없겠다고 할 순 없겠지만… 현시대가 황극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네만 있다면 분명 정파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세상일은 모두 생각대로 되는 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사천당문과 아미파의 본진에 괴한이 들이닥쳤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두 문파의 기세가 꺾인 것은 당연했다. 또한, 혈마교의 지배하에 있던 사파 문파들 또한 주변 정파 문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진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처, 천화련주께서…….”
천화련주의 시신이 드디어 발견된 건가?
모두가 사흑련에 절망과 분노를 쏟아 내려 할 때.
“건장한 모습으로 무림맹에 귀환하셨다고 합니다!”
“뭣이?”
분명 천화련주는 죽었다고 했다. 사대마제 중 셋의 합공을 받아 내고, 천화련주의 심복이었던 무인의 배신으로 심장이 꿰뚫렸다고 했다. 배교의 첩자였던 총군사 제갈서운이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
천화련주가 살아서 무림맹에 돌아왔단다.
무신의 귀환.
정파인 모두가 무신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살아 있었다니? 심지어 그가 사대마제 중 셋의 합공에도 우위에 섰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났다면 황극린이 정파 무림의 중심으로 우뚝 솟아올랐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정파 무림의 의지와 결의를 흔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공교롭게도 천화련주라는 존재가 황극린으로 뻗어 오는 정파의 의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귀환 소식에 흔들리는 건 정파뿐만이 아니었다.
* * *
“무신의 귀환이라.”
이미 사천성에 도착한 혈마교주.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서신을 태워 버렸다. 극도로 깔끔한 삼매진화(三昧眞火)였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분명히 심장을 꿰뚫렸을 텐데.”
혈마교주의 말에 응답하듯.
그림자가 흔들렸다.
- 유령이 실패했군.
“그게 가능한가?”
- 그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이지.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혈마교주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지?”
- 해야 할 일을 할 뿐. 놈은 분명 만뇌문이 공격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림맹으로 갔지. 원래 천화련의 족속들은 작은 희생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련주가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로군.”
- 심장이 꿰뚫리고 살아났다. 아마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테지.
“속전속결이로군. 놈이 선경인지 알아본 뒤, 대책을 세우도록 한다.”
- 그러지. 최상급 살수 스무 명이 움직였다. 곧 사천성의 여론은 만뇌문을 탓하게 될 것이다.
“좋아. 빙궁주는?”
- 이미 출발했다. 부궁주와 나찰과 선녀까지 대동하고. 그들의 속도로 볼 때, 이틀 뒤에 도착할 것 같군.
“좋군.”
혼자서 황극린을 꿀꺽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천화련주라는 거대한 산과 싸우기 위해서는, 사대마제끼리의 협력이 필요했다. 독수마제는 이미 천화련주 쪽에 붙어먹은 것 같았지만, 애초에 그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이틀 뒤, 결행하도록 하지.”
- 그러지. 그 전까지는 전야제를 즐기도록 하겠다.
* * *
“정말 악독한 놈들이로군.”
무작위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무림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도 밤중에 죽어 나간다. 사천성은 공포에 빠졌다. 처음엔 만뇌문과 소림사 그리고 화산파를 응원하던 백성들의 여론이 뒤바뀐다.
‘왜 청성산에선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거지?’
‘죄 없는 우리만 왜 당하는 건가!’
‘만뇌문이 나서라!’
그런 여론이 들끓는다고 한다. 고작 며칠 사이에 말이다.
“흑살문이 뒤에서 여론을 움직인 겁니다.”
“흑살문이?”
“예.”
황극린은 암귀를 떠올렸다.
그가 주로 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저들끼리 싸우게 해서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대로 만뇌문이 가만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점점 만뇌문은 소외될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황극린으로선 저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만뇌문에 척살 명령을 내렸는가? 혈마교뿐 아니라 흑살문이 왜?
그나마 승전보도 들려오고 있다.
창천뇌검이 이끄는 남궁세가의 정예가 혈마교의 주력 부대 하나를 괴멸했다고 한다. 육대세가의 활약이 드러나고 있다.
“황 장로님, 익명의 서신이 청성파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청성파의 무인이 황극린에게 서신을 가져다주었다. 익명의 서신이라? 마령은 청매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다. 청성파를 통하여 서신을 보낼 사람이 누구인가?
“서신을 열어 보진 않았습니다.”
“고맙소.”
황극린이 서신을 읽는다.
그의 표정을 본 화염신황이 의아함에 묻는다. 황극린의 얼굴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왜, 서신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가?”
“사대마제가 왜 절 노리는지 알 것 같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선경일 가능성이 있다는군요.”
“선경?”
“예.”
익명의 서신.
누군지 모른다. 서신을 보낸 자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수준의 정보는 아니었다. 사대마제가 왜 황극린을 노리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마경이 어떠한 곳인지 모르는 자라면 보낼 수 없는 서신이다.
화염신황이 황극린에게 전해진 서신을 읽는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글에서 황극린에 대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게 의아하긴 하군. 어쩌면…….”
“맞습니다. 흑살문이나 혈마교가 절 흔들기 위해 계획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서신이 사실이라면?”
황극린이 서신을 품속에 갈무리한다.
이 서신을 누가 보냈는지 역으로 추적하는 게 가능하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교특범이라는 성실한 수하가 잘해 낼 것이라 본다.
“열쇠는 제가 쥐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이제껏 황극린이 함부로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저들이 당최 무엇을 노리고 만뇌문을 공격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황극린은 또 다른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그리고.
쿠웅!
“감히! 혈마교 놈들이 또 만뇌문을 건드려!”
“아미타불!”
황극린이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도 청성산에 도착했다. 소림의 백팔나한이 사내의 무지막지한 분노를 보며 불호를 외고 있다.
“극린아!”
뇌불이었다.
그의 곁에는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