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85화 (285/316)

285화 발아

황극린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바로 청성산으로 향했다.

육금연의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유령이라 불리면서 천화련의 간부였던 자가 배교의 교주였다. 놈이 작정한다면 만뇌문도 꽤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흑주, 당분간은 현무를 취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녀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미 흑주는 만뇌문에 없어서는 안 될 전력이 되었다.

- 끼!

흑주는 황극린의 말에 수긍했다. 어찌 보면 이게 맞는 길일 수도 있다. 여러 마경을 겪어 보고 느낀 것인데, 마기라는 건 무조건 많이 취한다고 능사는 아니었다. 흑주도 자금성의 도원향이나 바다의 마경에서 보았던 괴물처럼 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으리라.

만뇌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황극린의 감각에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저기로 가자.”

피투성이가 된 두 아이. 그리고 걸레짝이 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누군가의 옷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

십만대산에서 보았던 두 아이가 눈을 떴다. 황극린을 본 하종과 율명이 울음을 터트렸다.

“으, 은인!”

“흐윽!”

십만대산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

“어르신들이 말씀하셨어요, 모두 다 혈마교주의 계략이라고.”

“처음엔 은인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괴물들이 부족을 노리는 건, 은인이 다녀가서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혈마교주가 마지막에 나타나서 어르신들이 가진 힘을 빼앗아 갔어요.”

“어르신들은…….”

율명이 울먹이며 말한다.

“그때, 은인을 내쫓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죄송해요. 정말…….”

솔직히 황극린도 그들에게 감정은 없었다. 뭔가를 받아 낼 생각도 없었고, 그들의 은인으로 추앙받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가족들을 전부 잃은 두 아이가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안쓰러울 뿐이다.

“다른 부족들은 어떻게 됐느냐?”

“어른들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해요. 저를 끝까지 데려다준 어른들은 모두 바깥에 나오자마자…….”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는지 하종과 율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어르신께서 전해 주라고 하신 거예요.”

짧은 서신이었다.

그때, 오해해서 죄송했다고, 황극린을 쫓아낸 건 최악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혈마교주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었다.

‘그 마경이 천마신공이 탄생했던 장소였으며, 천마신공의 사육장이었다라…….’

만마앙복(萬魔仰伏).

만마가 경배한다는 최악의 마공이 바로 천마신공이다. 탄생의 비화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이 서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혈마교주는 황극린이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황극린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비를 철저히 해야겠군.’

더 놀라운 점은 그런 혈마교주나 다른 사대마제 중 두 명이 합공하고도 천화련주를 제압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다. 제갈서운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겠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교주는 위험한 상대다.’

강자가 즐비하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극린은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삶의 터전을 잃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청성산에 찾아왔다. 어떤 심정일까? 황극린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고, 황씨 가문에 갔을 때.’

그때의 감정은 한 번 죽음을 겪은 황극린의 뇌리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노예를 자처하면서도 살아가는 데 감사했었다. 아니, 솔직하게 섭섭했다. 혈육이지만 남보다 못한 대접을 하는 황씨 가문의 사람들이 미웠었다. 지금 황씨 가문에 감정은 없지만, 당시 어린 황극린은 꽤 삐뚤어졌었다.

황극린이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어렸던 황극린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고생 많았다.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눈이 빨갛게 된 상태로 아랫입술을 깨문다. 사실 황극린에게 받아 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염치없는 행동이 아닌가? 그들의 부족은 황극린을 쫓아냈다. 혈마교주에 대한 정보를 서신으로 전해 줬다고 그들을 받아 달라는 건…….

남에게 빚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하종이 말한다.

“저, 저는 괜찮… 더 이상 은인께 폐를 끼칠 수는…….”

율명 또한 오라버니인 그가 그렇게 말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 맞아요……. 저희는…….”

“만뇌문은 자질이 뛰어난 제자를 언제나 찾고 있다.”

자질을 보기보다는 황극린과 인연이 있었던 자들을 문도로 받아들였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종과 율명은 황극린이 알기로 광풍사 내에서 혈겁을 일으킬 정도로 성장한다. 광풍사의 무공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만뇌문의 무공을 익힌다면 두 아이의 잠재력은 어느 정도일지 예상할 수 없다.

‘온후랑도 좋은 친우가 되겠군.’

황극린이 두 아이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어른이 잡아 주고 내미는 손. 아이들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황극린의 손을 꽉 잡는다. 황극린은 두 아이의 손을 이끌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후후! 여긴 대장간이야! 멋지지?”

“와아!”

“서, 설마! 이건 달의 광석 아니에요?”

“달의 광석? 아, 그건 운철이 아니라 묵철이야! 장로님께서 가져오신 거야. 너희도 조만간 묵철 갑주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엣헴!”

“허, 헉!”

“저희도요!?”

백온후는 신이 나서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니며 만뇌문 이곳저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황극린보다 나이가 비슷한 백온후가 두 아이를 맡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하종과 율명은 빠르게 만뇌문에 적응하고 있었다.

황극린은 묘한 흐뭇함을 느끼면서 어르신이라 불렸던 이들이 남긴 서신을 보았다.

‘혈마교주가 더 강해졌다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분명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무공에서 보통 강해지는 방식은 탑을 쌓는 것과 비슷하다.

탑을 쌓을 땐, 1층을 가장 튼튼하고 넓게 하며 터를 다진다. 처음엔 쌓아 올리는 속도가 느려 보여도 밑바탕을 착실하게 쌓아 올렸다면, 언젠간 그 누구보다 높게 올라갈 수 있다.

황극린이 보기에 마기를 흡수해서 강해지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탑의 구조물을 옮겨 놓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 관점에선 황극린이 영약을 취해 체질을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황극린은 영약을 취하면서도 부작용 따위는 없었다.

물론, 혈마교주 또한 부작용이 없기에 마기를 거둬들이는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겠지만, 천화련주와의 싸움을 앞두고 급하게 마기를 취했다면 분명히 제약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만큼 혈마교주의 돌발 행동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종과 율명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혈마교주가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혈마교가 그리 틈이 많은 집단은 아니었다.

황극린이 대장간에 들러 묵철 갑주의 제작을 서둘러 달라고 말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무공에서는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무인들은 실력이 높아지면서 더 좋은 무구를 탐한다. 내공을 다루기에 극도로 잘 만들어진 병기는 신병이기(神兵利器)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갑주는 어느 정도 완성됐습니다. 심장과 목 그리고 복부는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흑주님의 뇌섬사와 묵철이 조합된다면… 어떤 고수라도 쉽게 뚫어 내지 못할 겁니다.”

대장장이 초우가 황극린에게 가져다준 묵갑.

그걸 입어 본 황극린이 만족했다. 그리 무겁지도 않으면서 탄력도 있다. 이건 만뇌문도들의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제갈수에게 줄 갑주입니다.”

주 무공이 각법인 제갈수. 그의 다리를 보호하면서도 위력을 극대화할 묵철 병기였다. 황극린은 생김새만 보고도 초우가 만든 병기의 효용을 깨달았다.

“칼날이 있군요.”

“예, 다리는 길어지지 않지만, 이 틈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묵철 칼날은 위력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황극린은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초우는 문도들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게끔 병기를 제작하고 있다. 가볍고 튼튼한 묵철이 산더미처럼 쌓이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고생은요. 대장장이로서 묵철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만뇌문의 문도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신속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초우의 대장간에서 나간 황극린은 만뇌문을 돌며 문도들의 무공을 봐주거나 진법을 보수하는 등의 작업을 했다. 진법을 구축하는 재능은 없었지만, 진법의 불안정한 부분은 황극린이 가장 잘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황극린 스스로도 쉽게 통과할 수 없을 만큼 내부의 흐름을 비틀어 버린다.

“아니다. 이 정도라면 화경에 이른 고수라면 통과할 수 있다. 그들도 당황할 만큼 더 위력이 강해야 한다. 그러려면…….”

황극린이 행낭 속에 잔뜩 챙겨 온 무언가로 진법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진법을 보수했다.

그렇게 만뇌문의 입구를 지키는 진법의 위력이 제작자인 제갈창해나 제갈소희의 의도를 한참 벗어난 수준으로 탈바꿈되고 있을 때쯤.

황극린은 입구 앞에 손님이 찾아온 걸 느꼈다.

“청매로군.”

만뇌문은 전서구를 훈련시키고 키우고 있다. 여태껏 청성산의 전서구를 빌려 이용했지만, 독자적인 정보망을 갖춰야 한다고 교특범이 오래전부터 기반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청매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전서응이었다. 청매는 신강의 정보를 물어다 준다.

서신을 읽는다.

혈마교의 마령이 보낸 것이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를 놓쳐 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뇌문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무공을 모르는 아이들이 청성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에도 어쩌면 혈마교의 안배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혈마교와 전쟁이 일어나는 건, 아이들의 탓이 아니다.

저들은 작정하고 만뇌문을 치려 하고 있다.

그 본질적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황극린은 만뇌문도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 온 대비도 절대 부족하지 않았지만, 진법으로 되돌아간 황극린은 부족함을 느꼈다. 수많은 마경을 겪다가 만뇌문의 진법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경처럼이라…….’

황극린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는 흑주를 불러 만뇌문의 진법을 하나하나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 * *

화산파에 서신이 도착했다.

장문인 화염신황은 서신을 읽는다. 그의 눈썹이 꿈틀였다.

“장로들을 소집하게.”

화산파는 만뇌문에 은혜를 입었다. 만뇌문이 용성 소속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장로들을 불러 모은 화염신황이 선언한다.

“화산은 만뇌문을 도울 것이다.”

장문인의 선언.

그 결정에 반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화산의 결정은 무림 전체에 뻗어 나갔으며, 만뇌문의 서신은 화산에만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황극린은 무림에서 여러 인연을 만들어 놓았다.

처음엔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인연이 된 무인들.

소림사도 마찬가지였으며, 처음부터 인연을 맺은 남궁세가나 개방도 있었다.

“혈마교가 만뇌문에 척살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구나.”

남궁세가의 가주의 말에 남궁운혜가 눈을 번뜩인다.

그녀는 자그마한 인면지주 한 마리를 쓰다듬는다.

“아버지께선 어떠한 결정을 내리실 건가요?”

“당연한 것 아니더냐?”

천하칠대고수 창천뇌검이 미소를 머금었다.

“은혜를 갚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만뇌문을 중심으로 정파 무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거대한 흐름은 당연하게도 혈마교나 흑살문 그리고 북해빙궁에게도 전해졌다.

* * *

혈마교주는 무림맹이 아닌 만뇌문 하나에 척살 명령을 내렸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파 무림 전체와 싸우던 혈마교가 고작 문파 하나에 전력을 집중한 일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금방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 여겼다.

황극린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혈마교와 만뇌문은 체급 자체가 다르다. 거기다 흑살문도 그들의 뜻에 동참하기로 했으며, 북해빙궁주 또한 혈마교주의 말을 아예 무시하진 못하였다.

“마도삼가의 가주들이 모두 출정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철마적풍대(鐵馬赤風隊)와 철궁천마대(鐵弓千魔隊) 그리고 흑마질풍단도 청해성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흑살문은 따로 움직이겠다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보고.

혈마교주는 천화련주 때의 실패를 곱씹고 최선의 준비를 했다. 예상외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으니까.

“교주님, 보고드립니다! 소림사의 백팔나한과 화산의 매화검수가 청성산에 집결했다고 합니다.”

“예측한 일이옵니다.”

혈마교의 군사 흑선노마(黑仙老魔)가 교주에게 보고를 올린다.

“이참에 싹 쓸어버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혈마교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교주님, 보고 서신입니다.”

사천성에서 막 도착한 서신.

혈마교주는 서신을 읽다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황극린이라는 아이가 제법 인망을 쌓은 모양이로구나. 예상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군.”

군사 흑선노마가 교주가 내민 서신을 읽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건…….”

만뇌문 하나만 확실하게 잡고자 준비했다.

그런데 만뇌문을 중심으로 정파 무림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소련주가 이끄는 천화련까지 만뇌문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단다. 남궁세가뿐 아니라 육대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잘못하면 정사대전급으로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시간을 더 끌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구나.”

혈마교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