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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84화 (284/316)

284화 씨앗

귀주성의 성도 귀양에 도착한 육금연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마경으로 통하는 검령산의 입구가 무너졌다. 이곳을 수복하려면 상당한 인력이 필요할 듯했다. 거기다 검령산 전체에 깔아 놓았던 진들이 모두 엉망이 되어 뒤엉켜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망쳐 놓은 것처럼 말이다.

“부교주님,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육금연을 수행하는 배교도들이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근처에 있는 지부들에게 소집령을 내리도록 해. 일단 무너진 입구를 다시 파내야 한다.”

마경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굴을 파내고 다시 입구와 접촉해야 해결을 볼 수 있다.

“예, 알겠습니다.”

“너희는 날 따라와라. 진이 어떻게 꼬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 부교주님.”

스무 명의 교도들.

육금연이 그들을 데리고 검령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산 곳곳에 설치된 진법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으으.”

휙휙!

검령산을 타던 배교도들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육금연도 마찬가지였다.

“거미줄이 왜 이렇게 많아?”

쉽게 떼어지지도 않는다. 보통 마경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잘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구축된다. 마경의 입구가 무너져서 그런 것일까? 이곳의 생태가 불안정해진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검령산 전체에 깔린 거미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묘한 불안감을 느낀 육금연이 한 손을 든다.

“정지!”

모두가 군말 없이 멈춰 섰다.

“거미줄이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는다.”

“……!”

누가 거미줄을 검으로 잘라 보려 했을까? 그냥 거미줄이 너무 많아서 손으로 휘휘 저으면서 나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검령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거미줄이 뭔가 더 질겨지는 듯했다. 손으로 휘휘 저어서 떼어 낼 수 있었던 거미줄은 점점 억세지고 끈적이게 되었다.

육금연은 단검을 꺼내 거미줄을 베었다.

쉽게 베이는 거미줄도 있었는데, 검으로도 쉽게 잘리지 않는 거미줄도 있다. 안쪽에서 묻은 거미줄일수록 더 질기고 끈적했다.

그래서 검기마저 사용했다.

육금연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미줄에 내공이 흡수되고 있다.”

모두가 놀란다.

그게 말이 되는가? 거미줄에 그런 능력이 있다면…….

‘마경이 무너진 이유가 설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육금연의 표정이 굳는다.

그때, 기이한 울음소리가 검령산 전체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 끼이이이, 끼익.

온몸에 소름이 돋은 육금연이 소리쳤다.

“도주해!”

“예!”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처음엔 손으로도 잘 뜯겨 나가던 거미줄이다. 그런데 마음먹고 뒤로 물러서기 위해 내력을 끌어 올린 배교도들. 그중에서는 마기를 품은 존재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고작 거미줄을 뜯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력을 흡수하는 거미줄이라고? 말도 안 돼……!’

발버둥 칠수록 억세지는 거미줄.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거미줄의 탄력이 강해졌다. 한 발자국도 겨우 움직일 정도로 거미줄이 단단해졌을 때.

놈이 나타났다.

- 끼이.

몸통에 실감 나는 인간의 얼굴이 봉긋 솟아오른 거미.

순간 본능에 새겨진 공포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기 시작한다.

“괴, 괴물!”

괴물이라는 말에 인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대체 이게 무슨…….’

마경에선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배교는 중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마경을 연구한 집단이라 말할 수 있었으니까. 마경에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영물 따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경에 살던 영물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육금연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번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교주님의 힘이 필요하다. 그분께서 염원하셨던 일은 성공했다. 그분만 돌아오신다면…….’

전화위복.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육금연은 괴물 거미에게 잡혔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 끼이!

“……?”

애교?

육금연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인간 따위는 먹잇감으로 보던 괴물의 입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거미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여유로웠다. 말이 되는가? 검으로도 쉬이 잘리지 않고, 내공을 흡수하는 미친 거미줄. 그런 거미줄을 저리 통과할 수 있는가?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든 사내와 눈을 마주친 육금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 당신!”

“월척이 잡혔군.”

- 끼이! 끼이!

칭찬을 받으려 아양을 떠는 거미 괴물. 인면지주라고 하기엔 외형이 특별한 존재. 당연히 마경에서 태어난 놈이라 생각했다. 그런 놈이 황극린에게 애교를 피우고 있다. 황극린이 저 괴물을 길들인 건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황극린이 손짓하자 흑주가 알아들었다는 듯 신형을 움직인다.

주르르륵!

거미줄에 묶였던 육금연이 빠르게 낙하한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질러 대던 육금연이었지만, 다행히 머리는 깨지지 않았다. 땅에 부딪히기 전에 거미줄의 탄력이 돌아왔다. 흑주의 인면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저거 사람 아니야?’

실감 나는 표정에 침을 꿀꺽 삼킨다. 많은 것을 보아 온 육금연이다. 그녀는 다른 이들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도 흑주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오랜만이군. 육금연.”

“…….”

육금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황극린의 뒤통수를 쳤다. 기회가 있을 때, 황극린을 없애 버리는 게 좋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다.

“대련지부는 대비를 많이 해 뒀더군.”

“설마!”

육금연이 발작했지만, 그녀를 꽁꽁 싸맨 거미줄을 탈출할 수 없었다.

“그래, 거기도 다시 다녀왔다.”

“대체 왜……!”

“잘 알지 않나?”

“…….”

황극린이 육금연에게 다가온다.

그의 눈동자와 마주한 육금연은 숨 쉬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보아 왔던 황극린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언제라도 황극린은 육금연을 죽일 수 있다.

“천화련의 유령이 배교주인가?”

황극린의 질문에 육금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었지. 유령이라는 놈이 그리 강하다면 너희는 어떻게 우리 문주를 사로잡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

육금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이미 그녀는 황극린의 뒤통수를 때리기로 했다. 마경에 마음대로 진입할 수 있는 모습을 보고 위험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적을 미리 배제하는 건, 효율적인 전략이다.

“뭐, 과거 이야기는 할 필요는 없겠지.”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거겠죠?”

육금연이 상황을 주도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을 살려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황 공자님을 배신한 것은 후회하고 있었답니다. 본교 또한 황 공자님 덕에 상당히 손해를 보았어요. 이제 여기서 멈추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서 멈추면 내가 얻는 게 있나?”

황극린의 물음에 육금연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그래도 아예 무시하지 않는다. 황극린은 이성적이다. 잘만 설득한다면 넘어갈 수도 있다.

“마경에 대한 정보. 본교는 마경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답니다. 당신도 알고 계시겠죠. 마경의 힘은 인간이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렇던가.”

“네! 당연하죠! 구파일련에 속한 화산과 무당… 대부분 정기가 가득한 곳에 터를 잡았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지맥의 힘이 들끓는 공간에선 위대한 무인이 탄생하기 쉽답니다. 그렇다면 마경에서 탄생한 무인들은 어떨까요?”

“일리가 있군. 거기서 배교도들을 키워 왔던 건가?”

“맞아요. 사흑련과 구파일련 그 누구도 마경의 힘을 제어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배교는 가능했어요. 황 공자님께 지은 죄도 있으니 사죄의 의미로 본교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겠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너희의 마경을 내가 차지하면 그만일 텐데.”

육금연은 배교주가 얼마나 무섭고 강한 존재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황극린을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선 그가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혈고독 그리고 파열고.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의미심장한 눈빛.

확실히 혈고독이나 파열고는 이질적인 고독들이다. 암수 한 쌍으로 이루어진 혈고독은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죽음을 맞이한다. 파열고는 인간의 내장을 무한히 파먹을 수 있다. 거기다 내공으로 만든 반탄지기도 파먹는다.

“본교에는 그보다 더한 고독들이 있답니다. 황 공자님이 원하는 만큼 드리겠어요!”

“고독은 딱히 필요 없는데.”

“마기를 다룰 수 있는 무공도 있답니다! 아마 황 공자님이 배교의 무공을 보신다면 심득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육금연은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극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마기는 동물이나 사람에게나 결국 독이 되는 것 같더군.”

“그건 마기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제대로 마기를 다룬다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겠지.”

무언가를 알고 있나? 분명히 마경과 마기에 대해서라면 육금연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모를 위화감이 황극린에게서 느껴졌다.

“대련지부에 가 보니 마기에 취하여 주화입마에 빠진 사람들이 있더군.”

“그건…….”

“너희도 실패했던 게 아닌가?”

“아니에요! 그건 실패가 아니라……!”

“아니, 배교가 정말 마기를 다룰 수 있었다면 너희는 이미 중원 무림을 지배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유가 있지 않나?”

황극린이 핵심을 찔렀다.

“너희 교주를 자금성에서 보았었지.”

“……!”

“너희가 무엇을 꾸미는지 관심 없지만, 내 사람을 건들진 말았어야 했다.”

황극린은 애초에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육금연은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여기서 절 죽인다면, 교주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분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리 황 공자님이라도 불가능해요! 그분께서 당신을 찾아갈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군.”

“……!”

한때 육금연을 믿고 마경을 맡긴 적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양념 고기를 나눠 주며 적당히 서로에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었다. 이미 바닥에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놈이 날 찾아오길 바라마.”

육금연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 * *

오로목제.

그곳에서 벌어지던 소교주 쟁탈전은 멈추었다. 본격적인 정사대전이 시작되었으니 소교주 후보들이 서로 싸우는 걸 금지한 것이다. 혈마교주는 소교주 후보들에게 공언했다. 정사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자를 소교주로 추대하겠다고 말이다.

얼마 뒤, 또 다른 전언이 내려왔다.

“갑자기 왜?”

혈마교주의 진언을 담은 서신을 읽던 마령의 얼굴이 굳었다.

정파와 사파가 전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아한 전언이었다.

“만뇌문을 왜…….”

만뇌문과 혈마교는 최근 여러 사건으로 대립했지만, 혈마교가 가장 경계하는 적은 천화련이었다. 그녀는 혈마교주가 천화련주와 싸우기 위해 움직였다는 정보도 겨우 입수했었다.

혈마교주의 전언은 간단했다.

만뇌문을 척살 대상으로 지정한 것. 불구대천의 원수인 천화련보다 더 경계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마령은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아는 황극린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혈마교주의 전언을 같이 보게 된 천흉이 대뜸 말한다.

“네가 소교주가 된다고 해도 그 명령은 되돌릴 수 없겠구나.”

“고모님…….”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겠구나. 널 소교주로 만드는 게 그분께서 내게 명하신 일이지. 하나, 그게 은인께 위협이 된다면 난 그 명령을 더 수행할 수 없다.”

천흉은 무식하게 황극린이 내린 명령이라고, 만뇌문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데도 혈마교에 충성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혈마교에 정이 떨어져 떠나갔던 전적이 있었다.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 어차피 이곳에 남아 봤자 넌 과거의 나처럼 될 뿐이다.”

마령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천흉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떠나간다면 배후 세력을 잃은 마령은 아마 제1공자에게 밀릴 것이다.

“아뇨.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제가 만뇌문에 도움이 되진 못할 거예요.”

“그럼?”

“전 이곳에 남겠어요. 그리고 이곳에서나마 황 공자님께 은혜를 갚을 길을 찾겠어요. 최소한 혈마교의 정보를 만뇌문에 전달해 줄 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예?”

“내부의 적이 무서운 법이지.”

천흉이 미소를 짓는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혈마교를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느냐? 뭐, 그때쯤에는 단일 문파 중 최고라 불렸던 혈마교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황극린이 심어 놓은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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