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보복의 시작
무림맹이 발칵 뒤집혔다.
제갈서운이 북해빙궁의 첩자였다니!
엄밀히 따지면 그는 북해빙궁 쪽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북해빙궁의 무공을 익혔으니 무림맹 내에서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빙궁의 무공을 익혔느냐. 대체 언제부터였는가? 그러한 문제는 무림맹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제갈서운을 잡아넣은 황극린은 바로 무림맹을 떠났다.
당연히 남은 황보휘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열띤 관심에도 그는 예전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축 처져 수련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휘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느냐?”
황씨 가문의 가주 황천옹이 묻는다.
그 또한 황씨 가문이 과거엔 잘나가는 무가(武家)였다는 걸 깨닫고 뇌가 희망과 탐욕으로 절여진 상태였다. 가문이 새롭게 태어날 기회다. 그 중심에는 황보휘가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하던 아이가 왜 이렇게 바뀌었는가?
“황극린 그놈을 만나서 그런 것이냐? 알지 않느냐? 너와 극린이 놈의 재능은 똑같다. 너는 천우기공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배웠지 않느냐?”
황보휘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어제까지 그 또한 아무것도 몰랐다. 무지는 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분노가 치민다.
“저는 평생 노력해도 황극린의 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뭐? 무슨 말이 그렇더냐? 우리는 용황신가의 피를 이어받은…….”
“제가 재능이 있었다면, 정말 황극린과 같은 재능을 타고났다면 무당파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겁니다. 제가 명성을 얻기 싫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저 또한! 아버지처럼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살려 보고자 했습니다!”
“이, 이놈이?”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니 황천옹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만하십시오! 이제는 정말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용황신가니 뭐니의 핏줄이 정말 대단한 핏줄이라면, 이제까지 황씨 가문에서 왜 단 한 명의 무인도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무공을 못 배워서? 상가라서? 아닙니다. 그냥 재능이 없었던 겁니다! 만약 황씨 가문에서 황극린 그놈과 같은 재능을 타고난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황씨 가문은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겁니다.”
“이놈! 세 치 혀로 가문을 욕보이다니!”
“가문이요? 가문이 무어가 대수입니까? 용황신가? 과거에 잘나갔던 가문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 가문이 용황신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황씨 가문일 뿐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나대다가 망해 버린 병신 같은 집구석일 뿐입니다!”
황천옹이 뒷목을 잡았다. 병신 같은 집구석이라는 발언에 심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전 강호 무림의 희망이니 황씨 가문의 구세주 따위가 아닙니다. 그냥… 중원에 널리고 널린 수준의 무인일 뿐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약간 미안해졌는지 황보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고개를 숙인 후에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속에 있던 생각을 다 털어 내서인지 그나마 마음이 홀가분하다.
인정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황극린이 보여 준 신위. 그것을 본 뒤로 황보휘는 죽음과 맞먹는 충격을 받았다.
‘그냥… 적당히 무공을 익히고 강서성에 가서 무관이나 차려야겠다.’
물론, 무림맹에서 천우기공을 내어 준 만큼 그냥 내보내 주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걸 말로 내뱉으니 아무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휘의 타고난 성정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최소한 주제를 알게 된 인간은 과거처럼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 * *
뒤처리는 모두 무림맹에게 넘겼다.
귀찮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황극린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다.
‘마경.’
그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저들에게 마경은 소중한 자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걸 온전히 황극린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망쳐 버릴 수는 있었다.
‘선전포고는 네놈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황극린이 도달한 곳은, 귀주성 성도 귀양이었다. 이곳에 배교가 관리하는 다른 마경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당연히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놓고 드러나 있었다면, 마경이라는 존재를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 끼이이!
어둠을 파헤치며 흑주가 달려왔다.
“벌써 찾았다고?”
- 끼!
현무의 사체를 먹고, 자금성에서 또 다른 마경을 겪어 봤기 때문일까? 흑주는 금방 마경을 찾아냈다. 정확히는 귀양의 검령산(黔靈山)에 있었다.
검령산에 도착하니 묘한 냄새가 났다. 배교도로 추정되는 평범함을 가장한 약초꾼들이 여럿 보였다.
황극린과 흑주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육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녕의 대련지부는 황극린 때문에 그곳에 마련해 둔 기반이 무너졌다. 다시 그것을 복구하려고 했지만, 다시 황극린이 찾아갈 수도 있으니 제대로 방비를 해야 했다. 황극린은 마경의 경계를 금방 통과할 수 있으니 아무리 그라도 통과하지 못할 방진을 구성해야 했다.
그녀의 노력과 배교의 자원들이 대련지부에 모두 투자됐다.
그렇게 겨우 복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부, 부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 그게…….”
보고를 듣는 육금연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검령산이 무너졌다고?”
“정확히는 마경 내부의 마기가 폭주했습니다.”
마기가 폭주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육금연이나 숙련된 진법가들이 갖춰 놓은 진법이 무너졌다. 마경에서 마기를 채취할 수 있도록 수십, 수백 년 동안 고안된 진법이다. 물론, 모든 마경을 다 제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검령산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 최소 2년간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아직 검령산의 마경은 다른 마경과 연결되지 않았다. 황극린이 통로를 타고 넘어왔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대련지부는 거의 다 복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교주님께 전갈을 보내 놨고.”
“예, 다녀오십시오.”
배교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마경이었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배교의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또한, 교주의 분노도 감당해야 했다.
육금연은 바로 대련지부를 떠나갔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 * *
콰아앙-!
여인의 손짓 한 번에 벽이 무너진다. 경악할 신위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 앉은 사내는 태평하게 술을 홀짝이고 있다.
“취하지도 않을 술을 왜 마시는 것이더냐?”
여인, 북해빙궁의 주인 빙천마제가 비아냥댄다.
어깨를 으쓱인 혈마교주가 여유롭게 대답한다.
“풍류를 즐기는 것이지.”
“풍류는 개뿔!”
여인이 다시 한번 화풀이를 한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혈마교주는 무덤덤했다.
“본녀가 직접 나섰다. 그런데도 천화련주를 이길 수가 없었어. 어찌 놈은 그렇게 강한 거지?”
“말했지 않나, 그는 선택받은 존재라고.”
“또 운명이니 뭐니 헛소리를 할 생각이거든 닥치고 있거라!”
혈마교주는 사실 천화련주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에 나타난 유령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놈은 또 어떻게 그리 강해진 거지? 여유로운 낯짝을 보니 네놈은 뭔가를 알렷다.”
“유령 말인가?”
“그럼 누구겠느냐?”
혈마교주, 빙궁주 그리고 흑살문주까지.
세 사람이 뭉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기어코 차지하려 했던 천화련주의 심장은 결국 얻지 못했다. 아마 유령이라는 놈이 날름 삼켜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나처럼 강해진 게지.”
“…….”
빙궁주가 혐오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혈마교주를 응시한다.
“목숨을 내놓았구나.”
“아니지. 아니야. 회생비록엔 쓰여 있다, 언젠가 저주를 해주 할 선경(仙境)이 나타날 것이라고. 난 그 순간이 곧 오리라 믿는다.”
“그따위 회생비록, 그런 말장난은 본녀도 쓸 수가 있다.”
“그래서 맹주를 죽였나?”
빙궁주가 입을 다물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미모라 생각하며, 혈마교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혈마교주쯤 되면 하고 싶은 건 모든 걸 이룰 수 있지 않느냐고.
아니다.
보는 게 달라지면, ‘모든 것’이라는 것도 기준이 바뀐다.
“그리고 아직 선경 따위를 믿는 것이더냐?”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 당연한 논리지.”
“마경이 논리가 통용되는 곳이던가?”
“인간은 언제나 방법을 찾아냈지.”
“결국, 죽는 게 인간이 아니더냐?”
혈마교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천화련주를 없앤다고 해도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의 심장을 취했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마경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은 제어를 잃게 된다. 마기의 근간은 혼돈이다. 혈마교주는 그때도 오롯한 인격체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본녀는 돌아가겠다. 네놈들 장난질에 놀아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넌 우리에게 협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라고?”
빙궁주가 손을 뻗는다.
보이지 않는 냉기가 가공할 속도로 어둠 속을 후려갈렸다. 그곳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검은 형체가 등장했다. 흑살문주였다.
“최고의 살수라더니 그놈을 놓친 거냐?”
흑살문주는 빙궁주의 도발에도 무표정했다.
“유령이 놈의 심장을 파먹었어도 결과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다시 놈의 심장만 차지하면 된다.”
“흥, 헛소리. 천화련주도 셋이서 제압하지 못했는데 가능할 것이라 보느냐?”
“잘 모르는군.”
“뭐라?”
“무력이라는 건 단순히 내공이 많다고 정의할 수 있지 않다.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차이에서 사선을 넘을 수 있지.”
“그래서 유령을 놓친 건가?”
“천화련주가 예상보다 더 강했을 뿐.”
“변명도 잘하는구나.”
빙궁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이제 미련을 버려 버렸다. 애초에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저주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천화련주의 심장을 얻었다면 북해는 더한 저주에 고통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자위하려 했다.
“잠깐.”
혈마교주가 빙궁주를 불러 세운다.
“네가 생각한 방법이 황극린이라는 놈을 사위로 받아들이는 건가?”
“네놈이 신경 쓸 건 아니지.”
냉소를 머금은 빙궁주.
그런 그녀에게 혈마교주가 말한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빙궁주의 살기가 폭주한다. 셋 모두 상처를 입었다. 그중에서 빙궁주가 가장 멀쩡하다. 그녀는 애초에 천화련주를 잡는다는 계획이 마뜩잖았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여기서 두 놈을 죽여 버린다면…….
“월영문이 갑자기 본교의 품을 떠나갔지.”
“그딴 잡스러운 문파에 관심은…….”
“우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월영문도 저주를 이어 오고 있지.”
“어쩌라는 거지?”
빙궁주는 지금 이 순간 다짐했다.
그냥 죽여 버리기로. 헛소리만 찍찍 해 대는데 왜 저놈들의 혀에 놀아났을까?
휘이이익-!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냉기가 빙궁주의 몸에서 흘러나온다. 마치 이곳이 북해라도 되는 것처럼 강맹한 냉기의 폭풍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흑살문주가 눈썹을 꿈틀였다. 빙궁주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혈마교주는 급히 내력을 끌어 올리면서 말한다.
“월영문의 저주가 해주됐다는군.”
“……!”
빙궁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또 간교한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맞다. 천화련주를 상대하러 오기 전에 보고를 받았었지.”
“그럼 왜 천화련주와 싸웠던 거지?”
“혹시 모르니까. 대책은 여럿 세워 두는 게 좋지 않은가?”
흑살문주가 스르륵 움직였다.
참으로 신묘한 보법이었다.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으니.
“자세히 듣고 싶군. 월영문의 저주가 황극린이라는 놈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다더군. 거기다 놈은 본교에 있는 마경까지 침범했었다. 그곳에서 ‘무덤’까지 파헤치고도 무사했다더군.”
“무덤이라면…….”
“마기의 중심과 직접 맞닿은 시신이 묻힌 곳.”
“그런데도 괜찮다는 말인가?”
“북경에서도 활약을 했다더군.”
빙궁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흑살문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시작됐어야 했다. 단순히 마경과 조우하는 것으로 ‘저주’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기에 점차 침식되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마경의 마기라는 건 그러했다.
최소한 세 사람이 알기로는 말이다.
“가정을 하나 해 보지. 난 여태껏 선경을 마경과 같이 경계에 맞닿은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런 장소에서 마기를 씻을 ‘무언가’가 생겨날 것으로 생각했지.”
“네가 찾은 쓰레기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나 보군.”
회생비록을 쓰레기라 칭하는 빙궁주의 비아냥에도 혈마교주는 말을 이어 나간다.
“또 어쩌면 영약과도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빙궁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마경 또한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듯, 선경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겠지. 그렇다면 선경이라는 인간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북해빙궁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흑살문주의 두 눈동자는 뱀처럼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