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79화 (279/316)

279화 기회

마경이 담고 있는 힘은 황극린이 백 년을 운기조식으로 흡수하더라도 다 체화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애초에 황극린과 상극인 것도 있었지만, 순수한 내력의 양으로는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이 안 된다. 애초에 바다의 마경에서 보았던 현무나 자금성에서 자란 기괴한 꽃이나 싸우는 법이 몰랐던 게 아니라…….

‘저토록 거대한 힘을 지닌 것만으로도 다른 행동은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까.’

차라리 저 꽃과 비슷한 것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또 모르겠다.

여우로 태어나 인간으로 변했다고 주장한 여인. 화신설화(化身說話)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호리정도 인간처럼 말할 수 있는데, 도리어 저런 거대한 기운을 지닌 존재가 인간의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황극린은 죽은 호리정을 바라본다.

그녀는 황극린의 피를 몇 방울 먹고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빨리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이제껏 황극린의 피를 먹고 회복하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 물론, 곧장 다 죽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더 이상 꽃은 황극린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싸우면 손해라는 개념을 깨달은 걸까. 아니면 심장 부근이 크게 찢어져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황극린은 몇 개의 마경을 겪으며 본능적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비정상적이다.’

이곳은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경은 사방팔방에서 기운을 빨아들인다.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황극린조차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오히려 마경의 기운은 혐오감이 들었다. 황극린은 온갖 영약을 취하며 체질을 변화시켜 왔지만, 마경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

무림에서는 마기(魔氣)를 품은 무공을 마공이라 칭한다. 마공은 빠른 성장을 담보한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마경은 결국 마기가 넘쳐 흐르다 못하여, 비상식적인 상황을 자아내는 공간이다.

과연 이게 자연의 뜻이 모여 만들어진 공간일까?

인간이 감히 자연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개의 마경을 겪어 보며 무언가 미묘한 어긋남을 발견했다. 자연과 섞일 수 없는 종류의 것 같았다.

“일단 밖을 확인해야겠군.”

기괴한 꽃은 치료를 위해서인지 사방에서 독무를 빨아들이고 있다. 여태 밖으로 뱉기만을 반복했던 놈이었다. 그런데 이젠 흡수하고 있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내뱉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삶을 희망한다.

저 기괴한 꽃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단지, 평범한 생명과는 다르게 성장했을 뿐.

마경 밖으로 나가니 자금성 전체에 뻗어 있던 검은 연기가 빠르게 흩어지고 있다. 정확히는 대지에 흡수되고 있었다. 황실에서 도원향이라 칭했던 장소가 땅 아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극린아!”

뇌불이 흑주를 타고 날아왔다.

“놈들은 어떻게 됐느냐?”

“일단은 처리했소.”

“일단?”

뇌불은 일이 생각처럼 다 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혹, 밖으로 도망 나간 놈을 보지 못했소?”

“그런 놈은 보지 못했다. 이제 막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유령이었소.”

“유령이라고?”

그놈이 진짜 유령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천화련에 충성하는 존재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놈이 마경의 중심에 있었소. 뭘 하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오.”

“유령이 마경에 있었다고? 설마 그놈이 이번 일을 계획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오.”

“마경이라면 여기보다 더 연기가 지독했을 것 아니냐? 그놈은 그걸 버틸 수 있었던 것이더냐?”

“그렇소.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듯했소.”

“특이한 무공이라도 익힌 건가?”

대화하다 보니 황극린의 뇌리에 스쳐 가는 단어가 존재했다.

‘현 유령이 아니라 과거의 유령이 남긴 무학.’

무영심결(無影心訣).

처음엔 단순히 길을 닦는 무공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효능은 탁월했다. 황극린은 무영심결로 체내의 탁기(濁氣)를 몰아내고, 약간 늦은 나이에 내가기공에 입문했지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황극린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게 유령의 의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흑살문주가 뿌린 해석본보다는 훨씬 결과가 좋았었다.

‘어쩌면 유령의 무영심결이라는 건…….’

흩어지고 있는 독무를 바라본다.

천화련의 유령. 그 또한 무영심결을 익혔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흑살문주가 발견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었지만, 그와 황극린의 공통점은 무영심결을 익혔다는 거다. 그것이 마경의 기운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면?

‘확인해 봐야겠군.’

* * *

자금성에 들이닥친 재앙은 곧 중원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마경에 대한 이야기가 중원에 퍼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러 소문이 생겨났다. 마경에 들어가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곳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이 살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소문에는 근거가 없었지만, 그럴듯해 보였다.

“마경에 대해서 들으셨소?”

“그런 게 이제 남아 있을 리가 있나. 중원에 비동이나 장보도 따위가 나오면 온갖 놈들이 몰려들어서 싹 쓸어 버리는 판국인데 말이야.”

그렇다.

과거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던 무인들.

천화련주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에 살았던 무인 중에서도 제자를 만들지 않고 중원에서 사라져 간 이들이 많았다. 신룡태자(神龍太子), 성수화타(聖手華陀), 건곤신마(乾坤神魔)……. 뭐 그런 이들의 무공은 이미 발견된 지 오래였다. 그런 무공 대부분이 혈마교나 구파일련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독수마제나 기련노괴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불세출의 고수라 불리던 이들이 남긴 심득으로 무공을 더 발전시켜 왔다.

고대의 무공이 더 강하다는 설이 존재했지만, 독수마제나 기련노괴는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았다.

“마경이라는 게 있었다면 벌써 구파일련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가서 수작을 부려 뭔가를 이뤘겠지. 기련노괴는 마경에 대하여 들어 보셨소?”

“처음 듣는군.”

두 사람은 사파에서 알아주는 고수였으며, 만독문의 문주이자 돈황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마경에 대하여 몰랐다? 그런 것이 있었다 한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다 거짓이오. 황태자라는 놈이 황권을 강화하려고 수작을 부린 게지.”

“으음.”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천화련주가 나타났다. 그는 기련노괴와 독수마제와 함께 다니며 한 번도 식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밥을 먹을 땐, 잠시 자리를 비켜 줬었다. 한데, 식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천화련주가 나타난 것이다.

“마경은 있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군…….”

독수마제와 기련노괴의 불신이 깨진다. 천화련주가 거짓을 말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게 있었는데 왜 이제야 드러난 것이오?”

독수마제의 물음에 천화련주는 대답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천화련주 앞에서는 만독문주의 위엄도 통하지 않는다. 기련노괴가 다시 묻는다.

“듣자 하니 마경이라는 곳은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솟구치는 장소라 했소. 무당의 장문인까지 속수무책이었다더군. 그곳에서 운기조식을 하다간 죽겠지. 그런데… 당신은 그게 가능한 것이오?”

천화련주가 기련노괴를 바라본다.

기련노괴는 묻고 있었다. 마경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극히 일부다. 천화련주는 이미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의 강함에는 ‘마경’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허, 설마 거기서 수련하면 더 효율이 좋다는 건가? 하기야 우리도 독물이 가득한 곳에서 수련하니까 말이야.”

“그건.”

천화련주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객작의 문을 향하고 있었다. 만독문주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가 그 또한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계양, 드디어 만나는군.”

“혈황마제.”

혈황마제라는 말에 객잔주는 이미 창문을 타 넘고 도망치고 있었다. 천화련주나 사대마제 중 하나인 만독문주가 객잔에 있는데 식사하는 간 큰 손님은 없었다.

만독문주가 혈마교의 교주를 바라본다.

15년 만에 보았지만, 그의 얼굴을 그대로다.

‘더 강해진 건가?’

그의 주위로 흐르는 기운. 암울하면서도 비릿한 향기에 짓눌리는 듯하다. 천화련주가 가진 기세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강하단 건 알 수 있었다. 단지 마주한 것만으로 말이다.

혈황마제는 기련노괴나 독수마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기련노괴와 독수마제가 눈빛을 교환한다.

그들은 기회가 생기면 도주하기로 말을 맞춰 놓았다. 천화련주를 따라다니며 얻는 것도 많았지만, 언제까지고 그의 뒤를 졸졸 따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기회가 생기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천화련주와 혈황마제의 전투.

현시대에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두 무인이 맞붙는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도를 넘어섰군. 그걸 취한 건가.”

천화련주의 물음에 혈황마제가 답한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괴물 주제에 말이야.”

그러한 대화에 기련노괴와 독수마제는 더더욱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강호의 비사를 많이 아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혈황마제와 천화련주는 두 사람도 궁금하게 만들 비밀을 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맞붙을 것만 같았지만, 혈황마제는 바로 공격해 오지 않았다.

이제야 그의 시선이 기련노괴와 독수마제에게 닿는다.

“너희 두 놈이 천화련주에게 붙었다는 게 의외로군.”

“붙긴 뭘 붙었단 말이냐!”

“그럼 왜 동행하는 건가?”

“그건…….”

천화련주에게 쥐어 터졌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독수마제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았겠는가? 그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혈황마제가 혀를 찼다.

“상관없다, 네놈들은 여기서 죽을 것이니.”

“뭐라? 네놈이 우리 셋을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천화련주는 강하다.

혈황마제가 더 강해졌다고 해도 패배할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기련노괴나 독수마제 또한 사파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다. 혼자서 셋을 상대하겠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독수마제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가 아니라면?

기련노괴가 소리친다.

“조심!”

그가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빛. 그리고 그 빛을 쬐는 탁상. 그 밑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어두운 것보다 더 어두운 것이 꿈틀였다. 그림자를 다루는 무공.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사아악-!

소름 끼치는 절삭음. 다행히 독수마제는 그림자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천화련주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흑살문주까지?”

전선에 사파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던 이유.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들이 직접 나서기 위해서였다. 천화련주라는 거물을 잡기 위해서.

휘이이익-!

살을 에는 폭풍이 객잔 밖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후마저 온 모양이로군.”

사대마대 중 세 명이 천화련주를 상대하기 위해 나타났다. 기련노괴와 독수마제가 허탈한 눈으로 천화련주를 바라본다. 이런 것을 예상하고 두 사람을 잡아 놓은 걸까?

“천화련주, 당신의 계략인가?”

“그건 아니지만, 예상은 했었지.”

“뭐?”

“두 사람은 가도 좋다. 까드득-”

천화련주의 뼈마디에서 괴이한 마찰음이 울려 퍼진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혈황마제의 눈썹이 꿈틀인다.

“내가 생각했던 결말은 아니지만, 어디서든 네놈이 죽는 건 정해진 운명이었지. 그러니 이곳에서 죽여 주마.”

혈황마제의 몸에서 흑색의 강기가 솟구친다. 강기와 닿은 객잔의 기물들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객잔 내부가 어두워진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으니 흑살문주가 활동하기 더 편해졌다.

사가악-!

공간을 갈라 돌진하는 그림자의 칼날. 그것이 천화련주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쿵!

그걸 가로막은 건, 기련노괴였다. 천화련주에게 패배했지만, 그 또한 사파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 중 하나였다.

“일단 천화련주를 도와야겠군.”

“뭐, 그러지. 사대마제가 전부 모였으니 누가 제일인지 가려 봐야 하지 않겠나?”

* * *

자금성의 상황을 수습한 황극린.

그는 흑주를 데리고 마경에 진입했다. 그곳에서 꽃을 본 흑주의 인면에서 표정이 떠올랐다.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건 먹지 말아라.”

- 끼이!

현무는 그나마 정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흑주와 함께 마경을 한번 돌아보곤 다시 올라왔다. 흑주는 자금성 아래에 있는 마경에서 딱히 식욕이 돋지 않는 모양이었다. 흑주의 반응을 확인한 황극린이 마경을 빠져나갔다.

자금성 재건 작업이 한창이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황극린의 물음에 장문인이 깊은 한숨을 토해 내듯 말한다.

“천화련주가… 죽었다고 하네.”

천화련주가 죽었다?

이것도 황극린이 살수로 살아가던 시절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일의 배후에 천화련주가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자금성의 마경에서 유령을 만난 것이 주효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대체 누구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