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무신
태사는 살짝 마음이 약해졌다.
필사적으로 살아가려는 인간들. 그들 중에는 태사가 익히 보아 왔던 사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등 떠미는 흑무(黑霧)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황태자가 나타났다.
그는 왜 이런 짓을 하냐며 따졌다. 공교롭게도 태사는 그와 대화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혁명이다.’
역사를 배우면 알 수 있다.
나라에서 공부하라는 역사가 아닌, 숨겨져 있던 역사. 이제까지 헤아릴 수도 없는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했다. 그 중심에는 황제의 죽음이 있었다.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에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개국한 황제나 왕이 있을까?
그는 황제가 될 것이다.
입과 붓으로 말하는 황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하는 절대적인 황제가 말이다.
“천재지변은 그 누구도, 설령 황제라 하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너희의 죽음은…….”
모두가 알아 둬야 한다.
새로운 황제 앞에서는 그 무엇도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쿠릉!
“필연이다아아아아아아악!”
처음엔 간지럽다고 느꼈다. 찰나가 지나자 매캐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또, 간지러움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심해졌다. 그것은 고통이 되었다.
“으아아악!”
쿠릉!
다시 벼락이 내려쳤다. 분명 흑무에 하늘마저 가려지고 있을 텐데도, 어찌 벼락이 떨어지는 건가?
- 위!
저 멀리서 전음이 들려왔다.
그분의 전음에 태사가 하늘을 바라본다. 태사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흑무. 그것이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번쩍이는 뇌광을 뿜어내며 틈틈이 뇌전을 태사에게 쏘아 댄다.
“으아아악!”
다시 한번 뇌전에 적중한 태사가 황급히 도망친다. 동시에 누군가가 땅에 착지했다.
“북경의 모든 진이 먹혔군.”
“뭐……?”
태사가 움찔했다. 그것을 어찌 아는 거지?
“흑주!? 네가 왔다는 것은!”
뇌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황극린이라고 여유롭게 대화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장소는 위험했다. 마치 회계산의 마경이 외부로 방출되었을 때가 이러할까? 아니, 회계산의 마경보다 더 악독했다. 인간에 대한 증오. 저 검은 연기에선 그것이 엿보였다.
“네놈은 누구냐.”
“황극린.”
“황극린?”
“일단 네놈부터 죽여 주마.”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흑무가 황극린을 집어삼켰다.
“크하, 크하하하하! 이 힘만 있다면 난 무적이다! 무림인이라고 으스대는 놈들도… 모두 내 앞에서 무릎 꿇을 것이다.”
자신의 힘에 취한 태사.
흑무에 잡아먹힌 이상 저 뇌전을 쓰는 요상한 놈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이젠 저놈들 차례다. 동서6궁을 바라보던 태사의 머릿속에 외침이 울린다.
- 뭣 하는 것이냐!
“예?”
허공에다 대답한 태사.
그를 덮치는 것은.
쿠르으응-!
수백, 수천 가닥의 뇌전이었다.
“끄아아악!”
평범한 뇌전이 아니었다. 보통 뇌전이라면 눈부신 빛을 방출해 내지 않은가? 그런데 황극린의 손에서 뻗어 나간 뇌전은 달랐다.
검은 뇌전.
마치 흑무처럼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태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은 뇌전이 그의 몸을 잠식하기 전에 흑무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일단 그분께 도달하면 된다. 왜인지 저 미친놈은 흑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강한 것은 흑무가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 도망쳐야…….”
흑무 폭풍이 다시 한번 황극린을 덮쳤다. 흑무 속에서 뇌전이 울리고 있다. 그 굉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태사는 오줌마저 지려 버릴 지경이었다.
타다다닷!
‘말도 안 된다. 천하제일의 무림인이라던 놈들도 흑무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당파의 장문인도 결국 내 힘에 밀려 도망쳤는데, 어찌 저놈은…….’
태사의 머릿속에 황극린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황제도 그를 언급한 적이 있다. 황극린을 용성에 꼭 영입하라는 것. 황태자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황제의 입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뇌불이라는 제어가 안 되는 무인을 용성의 부성주로 앉힌 것은 황극린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저놈은 뭔가 다른 건가? 대체 다른 무림인이랑 무엇이 다른 거지? 왜 흑무가… 절대적인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거지?’
태사는 싸우는 방식을 몰랐다.
손을 휘두르면 흑무가 그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흑무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처음으로 공세가 막히자 ‘싸우는 방식’을 전혀 배운 적이 없었던 태사가 취할 수 있는 건 도주뿐이었다.
쿠릉!
“도, 도와주십시오!”
왜인지 여인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지 않았다. 거기다 중심에서 동서6궁으로 이동한 흑무가 왜인지 다시금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버렸다고?’
가족마저 버린 태사.
뇌전의 굉음이 커질수록 그 생각에 심취해 간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그것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으아아악!”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흑무가 완전히 중심부로 이동하게 되면, 그가 살아갈 방도가 없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보여 주마, 내가 황제를 어떻게 죽였는지.”
태사의 눈자위 전체가 검게 물든다.
동시에 그가 뽑은 검에서 흑색의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태사의 코와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맹렬히 흩어지던 흑무조차도 잠깐 멈추어 태사를 흘겨볼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매혹적인 인간의 생기(生氣)였다.
“죽어라!”
흑무를 뚫고 나오는 황극린.
그의 심장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이것으로 뚫어 내지 못할 것은 없다고 했다. 황제가 착용했던 음양쌍룡포(陰陽雙龍袍)마저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 힘이다.
단순한 찌르기.
그렇기에 더욱 강력하다.
그것이 흑무를 빠져나온 황극린에게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닿았다!’
손끝의 감촉. 황제를 죽일 때도 느꼈던, 찰나의 감각이 그를 전율케 만들었다.
“뒈져라!”
하나, 곧이어 전해지는 묵직함.
어느 순간 황극린의 주먹이 그의 검에 닿아 있었다.
“보, 보이지 않았는데?”
“무공을 익히진 않았나 보군. 그런데도 이런 힘이라.”
“마, 말도 안 된다! 내 힘은… 이 힘은…….”
“네 것이 아니지.”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이건 분명히 내 힘이다. 내가 쌓아 올린 내…….”
왜인지 힘이 빠진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검을 더 깊게 찔러 넣으려 했지만, 검마저 태산처럼 느껴진다.
툭. 검을 떨어트린 태사.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코와 입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흐, 흑무가 나를…….”
그를 집어삼키려 하는 흑무의 살의를 말이다.
왜 무당의 장문인 천룡대제나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흑무를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 누군가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사냥감을 가져가면 쓰나.”
쿠릉!
이제껏 흑무가 황극린을 집어삼켰다면, 이제는 황극린의 뇌전이 흑무를 집어삼켜 버렸다.
* * *
“이건 대체…….”
처음엔 황극린이라는 무인이 왔다고 하여 생존에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그 무당파의 장문인도 검은 연기에 당해 위험한 상태였다. 애초에 희망을 품는 게 상식에 맞지 않았다. 제아무리 황극린이라 해도 저들과 천룡대제와 얼마나 다를까?
검은 안개에 둘러싸이는 순간, 옥면검 관소양은 탄식을 내뱉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은 안개는 그 누구도 견딜 수 없다.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중독시키고, 중독된 인간의 곁에 있으면 다른 인간까지 전염되고 만다. 하늘이 인간들에게 내리는 천벌. 자금성의 상황은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끝났구나.’
희망을 놓고 옆을 바라본다.
진짜 인간의 얼굴처럼 현실감 넘치는 표정을 가진 거미였다. 몸통에 인면이 달려 있다니. 인면지주였다. 날개가 달렸다는 건 들은 적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고작 날개로 놀랄 리가 있겠는가?
그리 생각한 옥면검이었지만, 왜인지 뇌불은 몹시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 문주님도 포기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천둥소리가 전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대체 뭐야……?”
몇 번이고 검은 안개에 잡아먹힌 듯했다. 그런데 황극린은 보란 듯이 몇 번이나 농축된 안개를 빠져나왔다. 심지어 검은 안개가 황극린을 피해 도망치는 듯하기도 했다.
“극린이 놈, 더 강해졌구나.”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절규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동서6궁에서 불쌍하게 모여 겨우 생존하고 있던 이들이 황극린이 보여 주는 신위에 넋을 놓고 있었다.
“저게 파천뇌권?”
“뇌전이 어떻게… 빛이 나지 않을 수가 있지?”
“허어.”
“이, 이 거미가 내 손목을 물었다!”
“도망쳐! 괴물이다!”
약간의 소동도 있는 듯했지만, 뇌불이 조치하자 금방 잠잠해졌다.
태사가 검게 일렁이는 마기를 품은 검을 황극린의 심장에 찔러 넣었을 때, 모두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을 주먹으로 막은 것을 확인하고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검은 안개가 도리어 태사를 집어삼키려 했고, 황극린은 뇌전을 쏟아 냈다.
결국,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 검은 안개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천룡대제의 태극검으로도 갈라 버리기만 한 게 고작인 검은 안개가 뇌전에 먹혀 사라진 것이다.
“…저게 파천뇌권?”
황극린의 명성이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무림에서 강한 이들이 한둘이던가? 천하칠대고수가 있으며, 사대마제도 있다. 거기다 존재만으로 사흑련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천화련주도 있다.
이 순간, 동서6궁에 모인 이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천하제일…….”
“무신이다… 정녕 무신이야…….”
현시대에 무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천화련주 계양 한 명뿐이다.
그리고 무신은 양립할 수 없었다.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듯 말이다.
“이겼다.”
“검은 안개를 몰아냈다!”
“무신 만세! 황극린 만세!”
“우리가 이겼다!”
천재지변에 연신 패배하며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인간들이 승리를 선언했다. 생존의 안도감. 이제 살 수 있다는 기쁨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뇌불 또한 자금성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놈들이 이긴 게 아니라 극린이 놈 혼자 이긴 거다.”
물론, 그의 혼잣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 * *
“꺼럭! 꾸레억!”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태사. 그는 시시각각 죽어 가고 있다. 황극린이 고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고문을 했다간 바로 죽어 버릴 것이다.
“살려 줘. 살려… 꾸엑! 우에엑!”
마기를 끌어다 쓴 대가.
마공(魔功)이라는 건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살려 주지.”
“저, 정말인가? 꾸엑! 제발! 살려…….”
“이걸 마셔라.”
황극린이 작은 약병을 건넨다. 옆에 있던 흑주가 갑자기 발광하는 통에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황극린의 눈빛에 금방 제압되고 만 흑주였다.
“사, 살 것 같다! 대, 대체 뭐지? 무슨 영약이라도 먹인 건가?”
회복되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찰나에 몇 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피투성이가 아니었다면, 죽어 가던 사람이라고 믿지 못할 수준이었다.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내게 알고 싶은 게 있는 게지? 모두 알려 주겠소. 결자해지(結者解之). 그 사특한 괴물에게 홀렸다고 하더라도 잘못은 잘못이겠지.”
태사는 총명했던 머리도 되찾았다.
그걸 본 황태자와 뇌불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지만, 개입하지 않는다. 황극린에게 다 생각이 있으리라.
“누구에게 홀렸다는 거지?”
“도원향의 지배자였소. 그년은 음기가 가득하여 나를 유혹했소.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지. 사특한 년이오!”
도리어 태사는 분노한다.
마치 자신은 조종당했을 뿐이라는 듯. 그러나 그는 허리를 숙였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리다. 하나, 지금은 시간이 없소. 그녀를 막아야 하오!”
“뭘 원하는 거지?”
“도원향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야 한다고 했소. 그걸 꺼내려면 황제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크흑! 모두 다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갑자기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태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그렇게 잠시 스스로의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한 태사가 황극린의 얼굴을 마주한다. 황태자는 정말 태사의 뻔뻔함에 욕설이 튀어나오는 걸 혀를 깨물며 참고 있었다.
“그년은 사특한 요괴입니다. 본디 여우였던 짐승이지만, 도원향에서 힘을 얻어 인간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잠시 흑주를 바라보았던 황극린이다.
솔직히 흑주의 변화를 보면서도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 존재가 한둘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뭘 꺼내려는 거지?”
“거기까진 모르겠소. 같이 갑시다. 내가 도원향으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소.”
“어떻게 가는 거지?”
태사는 자신을 의심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당당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황극전(皇極殿)에 지하로 가는 통로가 있소. 그곳에서 일각 정도 내려가다 보면 공동이 나오는데, 거기서 들어갈 수 있소. 선택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으니 이 몸이 함께 가야 할 것이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태사가 결연한 얼굴로 외친다.
“바로 출발합시다. 거기서 죽더라도 끝을 보겠소!”
“넌 갈 수 없을 거다.”
“내가 의심된다는 말이오? 이젠 그 사특한 요괴에게서 벗어났으니…….”
말을 하던 태사가 움찔했다.
지금까지 그의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평생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머리가 쌩쌩 돌아가고, 마기를 몸에 품었을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황극린이 건넨 약병에는 그의 피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약이기도 했으나.
결국엔 독으로 작용했다.
“뭐… 어… 이… 게… 무…….”
마흔 살이 쉰 살이 된다면.
어쩌면 엄청난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흔이 일흔이 된다면? 여든이 된다면?
태사의 몸에선 그러한 급작스러운 노화가 일어났다.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 지난 듯, 그의 온몸에 검버섯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