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76화 (276/316)

276화 검은 연기

처음엔 지진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아니, 지진만 일어나는 건가 싶었다. 지진이라는 게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회색의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를 코로 들이마신 사람들은 머지러움을 호소하고, 병약한 사람들은 쓰러지기도 했다. 대다수가 코피를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여긴 사람은 많이 없었다. 몇몇 무인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자금성에서 탈출해야 하오.”

“예?”

“방금 못 느꼈소? 대지에서 마기가 치솟고 있소.”

뇌불은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다. 사방을 에워싸는 살기. 마치 유령 그놈과 마주하여 싸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인의 뛰어난 안력에 비치는 스멀스멀 떠오르는 연기. 다른 이들은 회색빛의 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뇌불은 그것은 마기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마기라니, 대체 무엇이…….”

“회계산의 마경은 주변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성장했다고 들었소. 회계산에는 제대로 된 풀과 짐승들이 자라나지 못했다고 했지.”

“설마 도원향의 기운이 바깥으로 뻗어 왔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소.”

애초에 마경이라는 것은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왜 존재하는지. 무슨 이유로 다른 기운을 빨아들이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 대피해야 한다.

황태자와 뇌불은 그나마 반응이 빨랐다. 뇌불은 언치골에게 연락을 취했고, 황태자는 황실의 모든 신하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아지랑이는 더 강해졌다. 검게 변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회색빛이 감돌던 연기가 새까맣게 변했으며, 이제 고작 어지러움을 가지고 고통을 호소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죽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들어 버린 잡초처럼.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언치골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은 뇌불에게 물었지만, 그도 대답해 줄 게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복잡할 따름이었다. 지금이라도 혼자 도망치려면 할 수 있다. 사방에서 일렁거리는 검은 연기를 뚫고 자금성 밖으로 나갈 것이다.

‘문제는 자금성 밖도 이런 상황이라면?’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때, 황태자가 말한다.

“무인들이 모인 곳을 보십시오. 아직 연기가 검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언치골과 뇌불도 그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림인들이 모여 있으면 저 연기가 쉬이 침범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들어라! 동서6궁으로 모여라! 그곳에 가면 안전하다! 그러니까 모두 동서6궁으로 와라-!”

뇌불이 쩌렁쩌렁 소리친다.

과거였다면 그냥 혼자 내뺐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니 짜증이 치솟는다. 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장난을 친 걸까? 그게 ‘인간’이 아니더라도 일단 살릴 사람들은 최대한 살려야 한다. 무림인이 모여 있으면 연기가 침범하지 못하니 그 속에 일반 백성들이 있으면 그나마 안전하게 버틸 수 있으리라.

그렇게 자금성의 생존자들은 모두 동서6궁으로 향했다.

뇌불이 작정하고 고함을 쳤다. 그가 하는 것을 본 자금성의 모든 무림인도 같은 소리를 냈다.

“동서6궁이오!”

“모두 모이시오!”

“이곳은 안전하오!”

그 소리를 들은 생존자들은 동서6궁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무당의 장문인 천룡대제(天龍大帝) 또한 도착했다. 그의 양팔에는 어린아이 다섯 명이 매달려 있었다.

“장문인!”

천룡대제의 얼굴이 기묘했다. 그의 얼굴엔 검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크게 부딪쳐 멍이 든 것처럼 말이다. 천룡대제는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마(魔)의 기운은 내공을 쉬이 침범하지 못하는 것 같소. 흡성대법도 그러하지. 상대가 완전히 방심하였을 때, 상대의 진원진기를 빨아들인다고 하오.”

천룡대제의 말에 뇌불과 언치골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이것은 일종의 독이오. 아직 무사한 이들이 동서6궁 밖에 많소. 왜인지 모르겠지만, 검은 연기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일 것이오.”

천룡대제가 말을 이어 나간다.

“난 사람들을 더 구해 오겠소. 여기는 두 분께 맡기겠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장문인?!”

무당의 장문인 천룡대제.

그가 언치골을 바라본다.

“뭔가 있었소. 검은 연기를 다루는 술사처럼 보였지. 그놈과 싸우다가 이렇게 됐소. 더는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안심하시오.”

솔직히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먼저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천룡대제의 의지는 굳건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백 명을 살린다면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소이까.”

뇌불은 그걸 보며 왠지 모르게 미안함을 느꼈다.

정파인들은 모두 쓰레기다. 겉으론 공명정대한 척, 착한 척을 한다. 애초에 소림사도 그런 놈들이 천지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 천룡대제는 자신이 잘못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는 두 분께 부탁드리오.”

뇌불과 언치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사람이 늘어날수록 동서6궁의 연기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해답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 * *

뇌불은 저 검은 연기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천룡대제를 보았다. 처음엔 검은 연기에 중독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독을 전염시킨다는 걸 알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뇌불은 스스로 나서 마기에 중독된 이들을 손수 처리하고 있었다. 잔인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은 사람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못 할 일이긴 하다.

아무리 마두라 불렸던 뇌불이었다고 해도, 암담함이 몰려왔다.

“저 미련한 놈은 검은 연기 속에 박혀서 가부좌를 틀고 있지 않나.”

언치골을 바라본다.

“저놈은 자기 내력을 써서 타인의 독을 밀어내고 있지 않나.”

그중에서 뇌불이 가장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가 한 것은 그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크억!”

뇌불이 또다시 움직였다. 또다시 마기를 이겨 내지 못한 이가 속출하고 있다. 바깥의 기운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에 반해, 동서6궁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애초부터 정해진 결말이었다.

‘술사가 있다고 했었지?’

뇌불은 생각했다.

아마 자금성의 중심부.

검은 연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곳.

술사라는 놈은 그곳에 있으리라. 황태자가 말한 태사라는 놈이 어쩌면 술사가 아닐까.

‘다른 이들이 모두 죽는다면, 내 목을 걸고 그곳으로 가마.’

뇌불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움직임에선 더 이상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이건 약조와 다르지 않습니까?”

찬란한 황금으로 뒤덮인 방.

그곳에 한 여인이 한가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무슨 약조?”

“화, 황제만 죽으면 될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이 나라의 왕을 말하는 게 아니더냐?”

“예?”

“왕이 죽었다면 그 신하들도 모두 목을 내놓아야 공평하지.”

“그게 무슨!”

“네놈은 살려 두마. 마기를 잘 받아들이는 건 흔치 않은 재능이거든. 넌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란다.”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노인은 백발이 무성했지만, 주름이 많이 없었다. 나이치고 젊어 보이는 동안 얼굴이랄까?

“제 가족들이…….”

“그깟 가족이라는 게 무어가 문제란 말이더냐.”

“당신은 모르지 않습니까!”

“고개를 들어라.”

노인은 여인의 말에 항거할 수가 없었다.

“본녀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네가 상상하기 힘든 시간을 살아왔지. 처음엔 가족이라 여겼던 것들도 있었단다.”

저 여자에게 가족이?

노인이 당황했다. 저런 괴물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너보다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단다. 그런 하찮은 존재들을 가족으로 여긴다면 약점이 될 뿐이지. 너는 나약한 인간이더냐?”

“…….”

“그러하다면 가족을 구하러 저곳으로 향하거라. 무림인이라는 놈들이 제법 머리를 쓴 모양이니.”

노인은 고민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 각오와 비장함이 어렸다.

“제가 황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후후, 인간들이란 참으로 자리에 연연하는구나. 네가 본녀를 도와 대업을 성사시키게 도와준다면 능히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네가 좋아하는 교접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상스러운 단어를 언급하니 노인이 약간 움찔했지만, 금방 그의 얼굴은 탐욕으로 물들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걸 잘 알고 있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가장 위에 서는 방법은, 남을 짓밟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렇게 생각하자.

“받들겠습니다.”

“호호, 그래. 그런 의미에서 네게 명을 하나 내리겠노라.”

노인은 그 명령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동서6궁.

그곳에 모인 백성들과 무인들을 처리하라는 것이겠지. 그곳엔 무림인 중에서도 최고라 추앙받는 존재들이 있다. 노화가 진행됐음에도 20대 장정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내들. 평생 입과 붓으로 세상을 호령해 왔지만, 진정한 힘과 마주하고 나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 거인(巨人)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면 백만 대군을 움직일 수 있다. 하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낱 날붙이에 죽고 마는 신세인데.

명령을 들은 노인.

태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한계입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옥면검(玉面劍)이라 불리며 최근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던 무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평생토록 피어나지 않았던 감정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절망 그리고 공포.

항거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재해에 그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옆에선 백성들이 죽어 가고 있다. 평소 농을 주고받던 친우들도 고통에 울부짖는다.

하늘의 빛마저 거의 막아 버린 검은 연기가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때, 뇌불이 나타난다. 평소 존경하는 무인은 아니었다. 뇌불이 현재 개과천선했다지만, 과거의 악행까지 모두 잊힌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뇌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미 동서6궁은 함락되었으리라.

“언젠가 해가 뜰 것이다.”

뇌불의 말에 잠깐 움찔한 옥면검 관소양이었지만, 다시금 그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검은 연기는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분명 지금은 낮인데도, 밤처럼 느껴집니다. 황 문주님께서는 저걸 막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뇌불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여기 있는 생존자들을 모두 포기하고 저곳으로 달려 나간다면 과연 이 사태를 끝낼 수 있을까? 만약 그러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중심으로 향했어야 했다. 검은 연기가 더 강해지기 전에 말이다.

“모른다. 그러나 기다릴 뿐이다.”

“뭘 기다린다는 말씀입니까. 밖에서 지원이 오려고 했다면, 벌써 도착했어야 합니다. 자금성뿐 아니라 밖에도 이런 천재지변이 일어난 게 분명합니다!”

왜인지 설득하고 싶었다.

뇌불이 포기한다면, 옥면검도 쉽게 포기할 수 있으리라. 그가 방법이 없다면, 그 또한 편해질 수 있으리라.

뇌불은 옥면검이 가장 열심히 뛰며 그를 도왔던 걸 기억하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따귀를 때려 줬을 텐데, 이번 사태를 겪으며 뇌불도 달라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이곳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러니 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는… 친우들과 백성들을 제 손으로 저곳으로 밀어 놓고 싶지 않습니다.”

동서6궁이 아직 무사한 이유.

독에 중독된 인간의 칠공에선 검은 연기가 솟구친다. 그것을 방지하고자 곧 죽을 인간들을 바깥으로 버린다. 뇌불이 선봉에 섰으며, 몇몇이 그를 도왔다.

“올 것이다.”

“예?”

“놈이 올 거라고.”

“놈이요?”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 황극린. 후기지수 시절부터 전설을 써 내려간 존재였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하고, 소림사에 사과를 받아 냈으며, 지금은 천하칠대고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파천뇌권께서 이곳에 당도하기로 하신 겁니까!”

만약 황극린이 온다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 절대고수가 한 명만 더 있다면…….

휘이이이익-!

바깥에 폭풍 소리가 거세진다.

“뭐야, 저거?!”

“여, 연기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어!”

“이때까진 움직이지 않았는데!”

동서6궁엔 수많은 무인들이 생존해 있다. 그렇기에 검은 연기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으아아악! 다 죽는 거야! 이제 다 죽는 거다!”

“여기선 벗어날 수 없어……. 다 죽는 거야. 헤헷… 헤헤헷!”

“살고 싶어.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제각기 다른 반응.

뇌불이 눈을 빛냈다.

“저놈은.”

검은 연기를 몰고 오는 존재.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지만, 등은 꼿꼿했으며, 눈에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쿨럭! 태, 태사입니다.”

옆에서 벽에 기대어 쉬고 있던 황태자가 뇌불의 옆으로 왔다.

“태사! 당신이 이 사태의 원흉입니까!”

동서6궁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사가 말한다.

“너희는 다 죽는다. 그러니 이만 포기하도록 하여라.”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는 겁니까! 당신의 처와 자식들도 죽었습니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겁니까!”

피를 토하며 외치는 황태자.

태사는 무심하게 그를 마주할 뿐이다.

“천재지변은 그 누구도, 설령 황제라 하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너희의 죽음은…….”

그의 목소리는 검은 연기를 타고 웅장하게 동서6궁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것으로 연기가 그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절망에 휩싸인다. 심지어 뇌불과 진주언가의 언치골마저도. 이제 동서6궁에 남은 무인들이 과연 저것을 막아 낼 수 있을까?

“필연이다아아아아아아악!”

“……?”

근엄하고 웅장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태사.

그는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듯이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뇌불의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 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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