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75화 (275/316)

275화 도원향

“그러니까 황태자의 말은 도원향이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있을 것 같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황태자 주원일.

그 또한 처음엔 흑살문을 의심했었다. 황제라 불리는 존재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있다. 온갖 강자들이 판치는 무림에서 황제의 권위를 지켜 주는 건, 그를 따르는 막대한 수의 신하와 병사들에게서 나온다.

황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금군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가 호위한다. 황실도 무림인의 무서움을 알았기에 온갖 진법을 자금성에 깔아 놓았다. 그것을 유유히 지나치고, 황제가 있는 침소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살수를 키워 낼 수 있는 무인을 꼽으라면 최소한 천하칠대고수는 되어야 한다. 아니, 천하칠대고수라도 어려웠다.

그러니 흑살문을 의심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황태자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알게 모르게 수많은 정보가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만인지상이라는 황제의 바로 밑의 권세를 누리던 태사. 그가 최근에 달라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젊을 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첩을 불러들여 밤일을 했다는 태사였지만,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이제는 여인을 침소에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침소에 여인을 불러들였다고 했다. 더 의문인 것은 여인들이 태사의 힘에 놀라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는 소문이 있다.

오래 묵은 인삼이라도 캐 먹은 걸까?

황제가 죽어 침통한 분위기의 북경이었지만, 음지의 소문이 야금야금 퍼져 나갔다.

황태자는 그런 소문을 듣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평생 검은커녕 붓만 휘둘러 온 태사가 무략장군(武略將軍) 장호청과 비무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늙은이가?”

뇌불은 이미 태사의 나이를 들었다. 뭐, 뇌불이 늙은이 타령을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평생 먹만 갈아 온 놈들이 주먹 휘두르는 법이나 알겠는가?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만, 왜인지 무략장군 장호청은 다음 날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칩거하고 있다더군요.”

“으음, 묘한 일이긴 하군.”

“예, 태사에게 무언가 있습니다.”

“근데 웃기는 일이오? 도원향이라는 게 뭔지 대충 예상은 가오만, 거기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절대고수라도 된다는 말이오?”

“황실의 비밀 서고에 들러서 확인했습니다. 그곳은 예로부터 제를 지내는 곳이라 했습니다.”

“무슨 제를 지낸단 말이오?”

“도원향에 제물을 바치면, 도원향의 신선이 깨달음과 상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상을 받아서 평생 먹만 갈던 태사가 강해졌다?”

“예…….”

황태자는 겸연쩍은지 목덜미를 긁었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제물만 바치면 강해진다. 그렇다면 황실은 왜 용성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금의위에게 폭발적인 지원을 했을까?

“대충 도원향이 어딘지는 알 것 같은데, 으음.”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마경이라 불리는 곳이오.”

“마경.”

그것 또한 말이 된다.

애초에 도원향에 바치는 ‘제물’이라는 것은 평범한 게 아니다.

“극린이 놈이 마경에서 마물을 만났다고 했었지. 어쩌면 북경에 똬리를 튼 마경에도 그런 괴물 하나가 있을지도 모르겠소. 뭐, 예상에 불과하오만.”

솔직히 마경의 존재는 오랫동안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건지 뇌불은 의아했지만, 황극린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마경이라는 공간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뇌불 또한 과거의 상식은 집어치우고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해야 했다.

“도원향에서 말하는 신선이… 마물이라 불리는 괴력난신일지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괴력난신은 무슨. 그냥 너무 많은 내력을 단전에 품은 짐승이나 인간에 불과하겠지.”

“그렇습니까?”

“소림사에서 막 나왔을 때, 당시에 난 천하칠대고수의 반열에 든다고 자부하고 있었소.”

난데없는 자랑이었지만, 황태자는 뇌불의 말에 집중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 만난 게 육관음이라는 놈이었소. 당시에 놈의 별호가 혈해마군(血海魔君)이었소.”

“사특한 마인이었군요.”

“그전에 그의 별호가 뭐였는지 아시오? 군자검(君子劍)이오.”

“군자검…….”

황태자는 왜인지 뇌불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팔뚝에 솜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군자검이라 불렸던 육관음. 놈은 지나가는 곳마다 혈겁을 일으켰소.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소. 그는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무림을 활보했었소. 그 이유가 뭔지 아시오?”

“내력이 넘쳐흘러서 말입니까?”

“맞소. 전문 용어로 주화입마라고 하지.”

“아……!”

“난 솔직히 우스웠소. 군자검이니 혈해마군이니, 그딴 별호 따위는 강함의 척도가 아니라 생각했소. 하지만 만나 보니 다르더군. 백대고수 반열에도 들지 못했던 놈은 주화입마에 걸린 후에 더 강해졌소. 육관음이 살아온 평생의 삶은 잃어버렸지만 말이오. 그가 혈해마군으로 변한 뒤에 가장 처음 죽인 게 처와 자식들이라 했었지.”

“슬픈 일이로군요…….”

“그는 운이 좋게도 희대의 영약을 취했소. 이름이 뭐랬더라……? 아, 기억났소. 혈령사왕초(血靈邪王草)! 무려 백 년의 내력을 품은 영약이었지.”

“그게 그를 변화시켰던 겁니까?”

“그렇소. 혈기가 가득한 영약을 취하고, 그걸 제어하지 못했소. 단전의 내력이 머리까지 차올라 미쳐 버렸지. 그랬더니 웬걸? 그는 무공의 벽을 몇 개나 생략하고 경지가 상승했던 것이오.”

“허어.”

황태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듣다 보니 걱정이 되었다. 황제를 견제하던 태사였다. 그의 권력은 황제보다 조금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혈해마군처럼 미쳐 버린 것이라면?

“내 말은 대충 이해한 것 같군.”

“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겠습니다.”

“일단 극린이에게 서신을 보내겠소. 그리고 차차 알아보도록 합시다.”

“예. 저도 철저히 준비해야겠습니다. 어쩌면 태사뿐 아니라… 그 마물이라는 게 도원향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대비를 하려 했던 황태자와 뇌불이었다.

뇌불은 바로 황극린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전서구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꿰뚫듯 날아간 순간이었다.

쿠으으으…….

뇌불 정도만이 느낄 수 있는 미약한 진동.

뇌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부랄.”

무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황실에서 사용하는 전서구는 청매라 하여 무림에서 흔히 보이는 전서구보다 훨씬 빠르고 지구력이 좋다. 황극린은 다행히도 전서구가 도착한 다음 날 청성산에 복귀했다. 거기다 흑주가 있었으니 며칠 만에 북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북경의 이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 끼!

흑주가 깜짝 놀란다.

저 멀리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 한눈에 봐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자금성은 북경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자금성 전체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려가자. 저 위로 올라가면 안 될 것 같구나.”

- 끼이! 끼이!

흑주도 동감하는지 황급히 땅으로 내려갔다. 북경은 난장판이 되었다. 온통 피 냄새가 흐르고 있다. 수천의 군세가 자금성과 멀찍이 떨어져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정지! 정체를 밝히시오!”

괴이한 것이 하늘을 날아 북경의 하늘을 날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쉬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였을 텐데, 말을 한 사내는 신기영주 교진운이었다. 과거 서문세가의 일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

“황 대협?”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황극린은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물었다.

신기영주도 친분을 과시할 생각은 없는지 활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하여 포위망을 풀었다.

“저도 한 시진 전에 도착했습니다. 북경에 변고가 생겼다는 서신을 받고 말입니다. 자금성에 진입이 불가합니다. 진법이 발동된 것 같습니다.”

“진법?”

“예, 저도 처음 보는 거지만 무림인들이 자금성에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자금성 전체에 깔린 거대한 진이 있습니다. 저 검은 안개가 보이시지요? 저기에 인간의 몸이 닿으면, 피를 토하며 죽게 됩니다.”

“으음.”

마경을 발견한 것 같다는 뇌불의 서신.

그것을 받자마자 도착하니 북경에 난리가 났다. 우연일까? 아니다.

“어쩌면 흑살문주가 쳐들어왔을 수도 있겠군요. 진이 발동되었고, 내부엔 구파일련의 정예 고수들도 있으니… 무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신기영주의 몸에선 피 냄새가 가득했다.

말은 저리했지만, 아마 검은 안개를 뚫고 들어가려 했던 모양이다.

“저건 자금성을 지키기 위한 진이 아닙니다.”

황극린의 말에 신기영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솔직히 한눈에 봐도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요사스러웠다.

“…정말입니까?”

황극린은 천하칠대고수와 필적하는, 그보다 더 뛰어난 고수로 알려져 있다. 그가 괜한 말을 하지 않으리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특무 부대 신기영을 이끌며, 황제의 적을 말살하던 신기영주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검은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겪어 보았지 않은가? 몸에 살짝만 닿았는데도, 검은 피멍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황극린이 신기영주의 손목을 바라본다.

“손을 내어 주십시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흑주.”

- 끼이.

이제야 신기영주가 깜짝 놀란다. 왜 지금까지 놈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 흑주가 은형술을 펼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활의 대가인 신기영주의 시선조차 피했으니 상당한 수준이었다.

신기영주는 벌벌 떨면서 손을 내밀었고, 흑주가 신기영주의 팔뚝을 괴롭히던 독을 빨아 먹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누구도 저 안개에 닿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 누구도 말입니까? 조금 있으면 진주언가와 개방의 정예들이 북경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황 대협께서도 그들의 조력이 있다면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저건 인간의 피를 먹는 안개입니다.”

“예?”

“저기로 인간이 몰려가면 몰려갈수록 안개는 점점 더 강해질 겁니다.”

“그게 무슨…….”

흑주도 동감한다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

“누군가 자금성에 덫을 놓은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금성 안에 있던 모든 인간은 저 연기에 먹이가 됐을 수도 있다.

황극린의 기세가 달라졌다. 신기영주는 황극린에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정말 저것이 합정이라면 누가 저런 것을 자금성에 설치했단 말인가? 자금성에 모인 수천의 무인들의 시선을 속이고 그게 가능한가? 저기엔 천하칠대고수에 속한 고수가 둘이나 있었다.

“어떤 놈이 수작을 부린 모양입니다.”

“그게… 그게 대체 누굽니까?”

“알아봐야지요.”

황극린의 기세가 돌변한다.

어떤 일이 닥쳐도 무뚝뚝함을 견지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감정이 잘 요동치지 않게 훈련받았으며, 그런 성격이었을 뿐.

그렇다고 황극린에게 분노가 없다는 게 아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고.

황극린의 살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흑주조차 깜짝 놀라고, 신기영의 군사들 몇 명이 오줌을 지릴 정도의 강렬한 살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신기영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턱을 덜덜 떨어 댔다.

“그럼 믿겠습니다.”

살기가 가득한 황극린의 말.

대상이 신기영주가 아니었길 망정이지, 살기가 향하는 방향이 신기영주였다면 그의 말을 듣는 즉시 졸도했으리라.

“최, 최선을 다해서 자금성에… 닿지 못하도록…….”

이미 황극린은 떠나갔지만, 신기영주는 덜덜 떨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던 검은 연기.

가장 오래 버틴 금군도 고작 일다경을 버티지 못했다. 그것도 자금성 끄트머리의 미약한 검은 연기에서였다. 그 누구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 *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 있다.

상황이 벌어지고, 처음엔 낙관하던 강호인들이었다. 그들은 중원 어디를 가더라도 고수로 대접받는다. 거기다 이곳엔 만뇌문의 문주 뇌불과 용성주 언치골 그리고 무당파의 장문인까지 있었다. 사특한 마공을 펼치는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해도, 금방 제압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진다.

자금성 전체에 휘몰아치는 검은 기운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곳에 남은 무림인들이 죽을 때마다 말이다.

“커헉!”

가부좌를 튼 채로 운기행공을 하던 무인 하나가 또 쓰러졌다. 그나마 남은 무인들이 모두 모인 동서6궁엔 마기(魔氣)가 그나마 옅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쉴 새 없이 운기행공을 하며 심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금방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리고 죽은 인간의 피부에서 피가 땀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이미 준비를 했는지 노인 한 명이 다가와 죽은 무인을 바깥에 던져 버린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동서6궁과 꽤 멀어졌다. 죽은 무인의 근처로 검은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진다.

단지, 눈 아랫부분이 거무스름하게 그늘져 있을 뿐이다.

“쓰벌! 제기랄! 개새끼들!”

뇌불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욕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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