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곳곳에서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지만.
무림인이 없던 시절에도 홀로 수십 명의 병사와 맞서 싸운 일당백(一當百)의 용장들이 존재했었지만, 현재에 이르러선 홀로 천 명과 맞서 싸우는 존재들도 있었다. 그런 존재들이 있다면 단 한 사람의 존재로도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한 명의 기세에 물러난다면 믿겠는가?
대표적으로 꼽으라면 정파의 천하칠대고수가 있을 것이며.
사파에선 사대마제(四大魔帝)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존재들보다 단연 위라고 평가받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천화련주 계양이었다.
* * *
“그게 뭐 어쨌다고? 쪽수로 밀어붙이면 제아무리 천화련주라도 별수 있겠느냐? 그놈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고 하디?”
귀룡방(鬼龍幇).
감숙 북쪽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세력을 키운 거대 문파였다. 자그마치 이천에 달하는 방도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감숙성 주천(酒泉)현에서는 방주는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누려 왔다. 그들이 세력을 넓힌 이유는 하나였다.
철저한 보복.
강한 놈 하나가 나타나면 열 명이 에워싸서 잔인하게 복수했다. 잘난 맛에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나대던 강호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성벽에 걸렸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진다. 귀룡방주는 세력을 넓혀 가며 수하도 늘리고, 무공도 강해졌다.
거기다 전설의 마공이라 불리는 패천신공(覇天神功)도 ‘우연히’ 획득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천 명에 달하는 수하를 이끌고, 홀로 다닌다는 계양을 잡는다면?
‘단번에 사대마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지. 어쩌면 오대마제로 불릴 수도.’
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당장 수하들을 왕창 잃더라도, 천화련주를 잡았다는 명성으로 그의 밑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 몰릴 것이다. 사파는 분열되어 있다. 사흑련은 사파 모두를 지배하지 않는다. 무림맹과 같은 연합이 아니었다. 사파인들은 불만이 있었다.
‘사도맹을 만든다면 난 단번에 우뚝 올라갈 수 있을 거다.’
그는 수의 논리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한 명이 안 된다면, 열 명으로.
열 명이 안 되면 백 명으로.
사대마제니 천하칠대고수니 치켜세워 봤자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귀룡방주인 유겸 그 자신도 귀룡방의 간부 열 명에게 에워싸이면 아무리 패천신공을 익혔더라도 패배하리라.
그는 귀룡방도 절반.
아니, 그 이상도 내어 줄 용의가 있었다.
“방도들에게 준비하라 일러라!”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그 흑마질풍단도 퇴각했다고 합니다.”
“흥, 그들과 나의 차이가 뭔지 아느냐?”
“그게 뭡니까?”
“그들은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거야. 작은 손해를 감수하지 못하니까 더 큰 것을 얻지 못한 거지. 내가 만약 혈마교주의 핏줄로 태어났어 봐라. 난 이미 무림일통을 이뤄 냈을걸?”
귀룡방의 호법 좌냉심은 왠지 모르게 설득되고 있었다.
사실 그도 많이 봤지 않은가? 무력을 믿고 유아독존의 태도를 취하던 무인들이 얼마나 추하게 죽어 갔는지 말인가?
“어차피 계양 그 새끼는 무림맹 놈들도 없이 혼자 다닌다며?”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뒈질 놈이다. 우리가 먼저 잡는 거지.”
“수하들의 상당수가 죽을 겁니다.”
“그냥 밀어붙이면 돼. 이천 명이 사방에서 몰려드는데 제깟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내가 허튼 말 하는 것 봤냐? 내가 했던 일들은 당장 손해처럼 보였는데, 결국 이익으로 돌아왔지 않냐?”
좌냉심은 어린 시절 귀룡방주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 동네 거지들에게 노예처럼 부려지던 그가 귀룡방이라는 어엿한 거대 사파 문파를 거느리게 된 것은, 그의 지략과 용맹함 그리고 결단력 덕분이었다. 당연히 그가 무공에 재능이 있었으며, 패천신공이라는 희대의 마공을 얻은 덕도 있었다.
“이래서 내가 궁병을 키워 놓으라 한 거다. 멀리서 화살 비를 내려 주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돌격하는 거지.”
“후우, 이번에도 믿겠습니다.”
결국, 설득이 된 좌냉심이었다.
“좋다. 그럼 가 보자.”
그렇게 감숙 제일 사파 문파인 귀룡방이 천화련주 계양과 가장 먼저 맞붙게 되었다.
며칠 뒤, 계양이 기련산(祁連山) 부근에 도착했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 * *
“활을 쏴라!”
수백의 궁병이 쏟아 내는 화살 비. 천화련주 계양은 혼비백산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파인들은 그의 명성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 이번에도 기회를 잡고 앞서 나가는 건 귀룡방주가 될 것이었다.
적어도 초반에는 그렇게 보였다.
“씨발!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쏘라고!”
“뭐, 뭔가 이상합니다! 화살의 궤적이…….”
“그냥 돌격! 돌격해서 팔다리를 묶어라!”
“돌겨어어억-!”
“우아아아아아-!”
귀룡방도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솔직히 이천 명에 달하는 방도들이 고작 한 명에게 겁을 집어먹는 건 말이 안 된다. 처음엔 긴장했던 귀룡방도들이었지만, 듣던 것처럼 무림맹의 무인들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걸어가는 계양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크크크, 천하칠대고수 목을 쳐 볼까!”
“닥쳐라! 이 몸이 먼저다!”
심지어 서로 경쟁하며 달려가는 방도들도 있었다.
멀리서 그걸 바라보던 귀룡방주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우리 귀룡방의 힘을 보여라!”
소음이 사라졌다.
“뭐야? 왜 소리가 안 들려?”
코앞에서 굉음을 지르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귀에 전달되지 않는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
“────!”
“……!”
옆에서 귀룡방의 호법이 소리치는데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순간 피 냄새가 코를 타고 뇌까지 스며들었다. 비릿한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자신이 외친 목소리에 귀가 찢어질 정도였다. 깜짝 놀란 귀룡방주가 펄쩍 뛴 순간.
“앞을 보십시오! 앞! 앞!”
“뭐?”
왜 보지 못했을까?
한눈에 보기에도 홀릴 듯한 외모를 지닌 귀공자. 천화련주 계양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뭐야?’
이천 명에 달하는 든든한 귀룡방도들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모두 죽었다고?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
아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모두 죽은 게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아니, 이천 명의 포위를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온 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귀룡방주는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끼기긱- 끼긱-
사람의 웃음소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마치 괴물과도 같은 웃음소리.
“패천, 신공인가.”
“……!”
“끼긱, 이 정도면, 괜찮겠군.”
그 순간.
피의 폭풍이 몰아쳤다. 천화련주의 전신에서 튀어나온 붉은 물줄기. 피가 분명하다. 수십 가닥의 피가 귀룡방주의 피부를 꿰뚫었다.
“…….”
도주할 수 없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 이게 인간이라고? 인간이 어떻게…….’
쪽수만 있다면 못 이길 상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힘이란 언제나 한계가 있었으니까. 귀룡방주가 보아 왔던 세상은 그러했다. 혼자선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다수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현재의 귀룡방이 탄생했다.
귀룡방주가 고개를 돌린다.
그 잠깐 사이에 수백의 귀룡방도가 죽었다. 절대다수가 단 한 사람의 기세에 도주하고 있었다. 아비규환. 그것이 귀룡방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 * *
기련산에서 백 리는 떨어진 어느 한적한 마을.
그곳에 한 노인과 사십 대로 보이는 장년인이 마주하고 있었다.
“천화련의 그 괴물이 나타나다니. 예상외로구나.”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소?”
노인의 말에 장년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노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사대마제라 불리지 않지만, 그 정도로 사파에서 입지를 가진 존재였다.
기련노괴(祁連老怪).
돈황의 지배자이기도 한 그가 긴장하고 있었다. 장년인이 혀를 찬다.
“백 노인이 긴장하는 건 처음 보는구려. 댁도 괴물이지 않소?”
“네놈은 그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를 본 적이 있소?”
“있지.”
“다른 사대마제 놈들도 나설 텐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소?”
“그때는 그러지 않았겠느냐?”
“그때?”
“혈교가 중원에서 쫓겨나던 날.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던 천마가 등을 보이고 떠나던 날.”
그 말에 장년인이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반론한다.
“당시엔 백 노인께서 살아 있던 시절이 아니지 않소? 혈마교의 힘은 강하오. 특히 혈마교주는 진짜배기라오.”
장년인은 마치 혈마교주와 만나 본 것처럼 말한다.
당연했다. 그 또한 사대마제라 불리는 존재였으니까.
독수마제(毒手魔佛)라 불리는 그는 만독문의 문주였다. 그는 그나마 사파의 고수 중에서 기련노괴와 친분이 있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정사대전에 감숙성까지 왔다.
“다른 마제들을 만나러 가자꾸나.”
“당신은 혈마교와 친분이 있으니 돕고 싶으면 도우시오. 난 그럴 생각 없소.”
“그럼 여기까진 왜 왔느냐?”
“어차피 각자도생이오. 나야 홀로 남쪽에 있으니 평생 그렇게 살아왔소. 솔직히 사흑련이라 묶여 있지만, 그리 동료 의식도 없고 말이지.”
맞는 말이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기련노괴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심상치 않은 배후가 존재한다. 그것만 알아 둬라.”
“흥, 정사대전이 일어났는데 배후가 없을까?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마시오.”
“그래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나야 머리는 예전부터 백 노인보다…….”
말을 하던 독수마제의 목소리가 뚝 그친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독문에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던 위엄을 드러내는 절대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있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앉아도 되겠나?”
피 냄새가 진동하는 천화련주 계양.
그가 기련노괴와 독수마제의 앞에 나타났다.
* * *
휘이이이익-!
농사를 짓던 농부는 검은 무언가가 지나가는 걸 보고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나니 그것은 사라져 있었다.
“자네, 봤나?”
“뭘?”
“사람이 검은 새를 타고 하늘을…….”
“이 형, 내가 술 좀 그만 먹으라 했소, 안 했소?”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봤대도. 사람이 새를 타고…….”
“에잉, 쯔쯔. 날이 하도 더우니 요령을 피우는 것도 참.”
“아니!”
하늘을 나는 검은 새를 보았던 농부가 자꾸 ‘아니’를 외치며 반박했지만, 결국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신선도 아니고 말이다.
얼마 뒤.
청성산의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진 바깥에서 경계를 서던 백건악과 공야월이 나타났다.
“백건악, 긴장해라. 이 정도 굉음이면 범상치 않은 실력자다. 느껴지는 기세도 심상치 않아.”
“그 여자를 불러야 할까요?”
“일단 안에 전갈을 보내거라. 여기는 내가…….”
공야월이 말을 멈추고 만다.
거대한 거미 한 마리를 타고 누군가 날아오고 있었다.
‘날아오고 있다고?’
거미에 올라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공야월과 백건악이 입을 떡 벌린다.
“흐, 흐, 흑 대사형? 장로님!?”
“허허허허, 강시였던 내가 봐도 이건… 믿을 수가 없군요.”
두 사람이 황극린과 흑주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의 머리에 올라타는 걸 즐겼던 흑주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과거엔 약간 귀여운(?)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광택이 전혀 없는 흑색의 비늘로 뒤덮인 흑주. 마치 갑주를 착용한 흑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디 급하게 갈 장소가 있으면 흑주에게 부탁하도록. 꽤 편하더군.”
- 끼, 이?
흑주가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단 소리를 냈다. 몸통에 떠오른 인면의 표정도 그와 비슷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등에 탄다는 말에는 화가 났지만, 황극린이 편하다고 하니 또 화가 스르르 녹는 듯하다.
황극린이 하늘을 바라본다.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조만간 비가 왕창 내릴 것 같았다.
“서문세가에서 서신은 왔었나?”
“예! 서문세가에서 서신이 와서 검후신제에게 전달했습니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께선?”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문주께서 장로님께 전해 주라고 하신 서신이 있습니다.”
“그래?”
황급히 진 안으로 들어간 백건악.
잠시 기다리니 서신을 들고 나타났다.
황극린이 서신을 펼쳤다.
- 극린아, 여기에 도원향이 있단다. 내가 보기에 이거, 마경 같다.
“…….”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북경에 들렀다가 왔다면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뭐, 황극린이 무당도 아니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긴 했다.
“흑주야, 준비하거라.”
- 끼이?
“북경으로 간다.”
흑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