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73화 (273/316)

273화 개입

천화련주의 개입.

역대 천화련주는 언제나 황당한 수준의 활약을 보여 왔다. 무림맹이 마교의 군세에 밀려 호북성까지 밀려났던 적이 있었다. 당시 마교의 전력은 역대 최강이라 평가받았다. 그들이 자랑하는 흑마질풍단에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물론이고 재야의 고수들까지 목이 바닥에 떨어졌었다.

그들은 정파였지만, 어지간한 일에는 일어서는 일이 없는 거인이었다.

천화련이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강호엔 피바람이 불었다. 본래 구파일방이었던 정파의 세력 구도가 구파일련으로 변화한 것은 천화련에 대한 강호인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천화련이 개입을 선언했다.

단순히 천화련의 무인들이 아니다. 천화련주가 직접 움직인다고 했다. 그 소식이 들리자마자 일방적으로 밀리던 정파의 군세가 버티기 시작했다.

아니, 버틸 뿐이랴?

파죽지세로 정파의 고수들을 유린하던 사흑련의 마인들이 숨을 죽였다. 언제 천화련주가 나타나 대학살극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인들 사이에 감돌았다. 그는 전선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정도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련주님.”

“그렇군.”

현 무림맹주 계립.

만묘신수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으며, 무림맹에서 그의 위상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런 계립도 천화련주 계양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강아지가 될 뿐이었다. 그 또한 사선을 넘어온 무인이었지만, 천화련주 앞에서는 제대로 입도 떼지 못하였다.

“저… 그게…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겨우 꺼낸 말이 저거다.

계양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받는다.

“썩 유쾌한 건 아니지.”

“그, 그렇군요. 하하하…….”

“그래, 내가 뭘 해 주면 되는 건가? 혈마교도를 잡아 족치면 되는 건가?”

“그,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마음이 동하지 않아.”

“예?”

무림맹이 있는 정주까지 와서는 무슨 소리인가.

하나, 맹주는 천화련주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동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시군요. 일단 감숙성까지 밀려났던 무인들이 다시 전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련주님의 존재만으로도 맹이 사기를 되찾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쉬시면서 기다리시는 것도…….”

련주를 두려워하는 맹주치고는 꽤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연습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힘에 의한 굴복은 의미가 없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맹주는 강제로 참음을 당하면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세상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파가 사파를 밀어내면 온전히 협이 가득한 세상이 올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맹주는 련주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소신이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정파도 썩어 있지요. 만약 정파가 온전히 활개를 친다면, 정파 내에서 또 다른 악이 자라날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말입니다.”

“맞는 말이다. 정파라는 이름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파가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에 선조께서는 혈교와 마교를 완전히 끝내지 않으셨다. 더한 꼴을 보지 않으려고 말이야.”

“…….”

혹자는 말한다.

천화련주의 힘이라면 십만대산도 정복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

당시 그의 무위를 직접 목격한 강호인들은 그를 무신(武神)으로 칭했다. 천하칠대고수? 천하에 일곱 명이나 있는 고수라는 뜻이다. 사실 따지고 들면 그만한 실력자들은 무림에 더 존재한다.

그런데 무신은 무엇인가?

오롯이 선 존재.

천외천(天外天). 천하칠대고수가 강호인들에게 하늘이라면 그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무신 또한 정파 속에서 자라나는 ‘어둠’을 경계했다.

사실 맹주는 련주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무력은 동경했지만, 그 강함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련주가 저리 말하니 심장이 뛰어 감각을 요동시켰다.

“그렇다고 죽어만 가는 정파인들을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은 가족들을 누구도 원망할 수 없게 되었지요. 원한을 사기가 두려워 행동하지 못한다면 어찌 무를 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준비했던 발언이 아니다.

평소 해 왔던 생각이다. 련주가 맹주를 빤히 바라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게 네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내 직접 나서 주지.”

“예?”

천화련의 정예들을 파견하는 게 아니라 련주가 직접 움직인다고?

설마 거기서 또 다른 제물을 찾으려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맹주로선 달가워할 일이다. 련주가 나서 준다면 북해빙궁이나 흑살문이 대수랴?

맹주는 딱 한 번 련주의 무위를 목격한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요동치는 그림자. 어둠보다 더 어둡고, 밤보다도 깊었다. 그의 심연은 감히 맹주가 마주할 수도 없는 아득함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황씨 가문의 아이들을 데려와라.”

“예, 알겠습니다! 예……?”

황씨 가문?

거기가 어딘데.

오래도록 무림에서 활약해 왔던 맹주도 모르는 가문이다. 황씨 성을 가진 가문 중에서 천화련주가 찾을 곳이 또 있던가?

“강서성 남창.”

“강서성 남창… 황씨 가문이라면… 설마?”

갑자기 떠오르는 이름. 황극린에 대하여 조사할 때, 그의 어린 시절부터 파고들었다. 그는 황씨 가문에서 노비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황극린은 황씨 가문의 출신이다.

설마 황극린을 알고 계신 건가?

그를 불러서 같이 싸우시겠다는 건가? 그런데 황씨 가문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용황신가(龍皇神家). 과거 황씨 가문이 불렸던 이름이지. 아직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이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뭘 대비한다는 걸까?

용황신가. 무림맹주는 처음 듣는 그 가문의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천화련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순간 등불로 밝혀지던 방 안의 공간이 암전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둠이 다녀왔는지도 긴가민가하다.

‘방금 뭐였지?’

맹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련주를 배웅하고,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용황신가에 대하여 정보를 모아 와라. 청룡비고까지 뒤져서라도.”

“예, 맹주님!”

“그리고 황씨 가문… 그들을 맹으로 데려와라.”

“황씨 가문 말입니까?”

당연히 맹주전의 무인들도 모르는 가문이다.

“강서성 황씨 가문. 상가로 유명한 가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상가로 ‘유명했던’ 가문이었다.

세심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충분하다. 맹주전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끼룩!

흑주의 몸은 황극린을 만난 후부터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예상은 된다. 흑주는 현무의 사체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황극린의 어깨만 바라봤다. 과거엔 황극린의 품속에서 안락하게 잠을 청하곤 했는데, 이제는 너무 몸집이 커져 버린 탓이다.

‘크면 육체 능력이 더 강해지긴 할 테지만…….’

뭐, 흑주가 원하는 대로 변화하는 걸 황극린이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흑주도 날개가 달렸으니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커지면 황극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태우고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 황극린이 빠르긴 해도 지형지물의 영향을 받는다. 하늘을 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흑주.”

- 끼이?

“아니다.”

흑주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흑주의 몸통에 난 얼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

사람의 얼굴로 표정을 저리 적나라하게 나타내니, 황극린은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날 태우고 날 수도 있겠느냐?”

- 끼이!

당연하다고 말했던 흑주였지만, 금방 자신의 날개를 몇 번 파닥여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몸통에 있는 인면이 움직인 것이다.

- 끼이! 끼! 끼!

조금만 기다려.

뭐, 그런 소린가.

황극린은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쓸어 온 묵철을 바라본다. 지금 그들은 바닷속 마경에 있다. 엄청난 양의 묵철을 싹 쓸어 담아 마경의 통로를 이용하여 되돌아왔다.

‘묵철로 갑주를 만들 생각을 하는 건 나밖에 없을 것 같군.’

뭐, 장군 한 사람이 심장을 보호할 장신구 정도로 만드는 경우는 있었지만, 황극린은 아예 다른 걸 생각하고 있다.

장인은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니, 오히려 고수일수록 장비가 훨씬 중요하다.

‘여기에 흑주의 뇌섬사까지 엮는다면…….’

이래저래 갑주의 모양을 생각하던 황극린.

그때, 해촌의 장로가 나타났다. 정수를 취했기 때문인지 예전보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느낌이다.

“은공!”

허겁지겁 황극린에게 달려온 해촌의 장로.

그는 사방을 가득 채운 정수가 왠지 거북한지 흐느적거리며 달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공!”

황극린은 해촌과 용왕궁의 영웅이었다.

“해촌에도 대장장이가 있소?”

“대장장이요? 당연히 있습니다! 용왕궁도들의 병기는 모두 우리가 만들…….”

해촌의 장로가 겹겹이 쌓인 묵색의 무언가를 바라본다.

“허……?”

“이걸로 무구를 만드시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이건 묵철 아닙니까?”

“맞소. 묵철 중에서도 최상등품이지.”

“…….”

무림인들이 철검을 가장 선호하는 이유는 하나다.

어떤 물건은 내공이 잘 통한다. 거기다 날카롭게 벼릴 수도 있다. 손날을 이용해서 날카로운 강기를 형성하는 건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검에 검기를 불어 넣을 수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예기를 띤 검기가 만들어진다.

“반절은 서문세가와 함께 나눠 쓰도록 하시오.”

“이, 이걸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만뇌문은 인원이 적어서 말이오. 대신 만뇌문까지 이걸 옮기는 걸 도와줘야 할 것 같소.”

“예, 맡겨만 주십시오! 아이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안전하게 이동시키겠습니다.”

촌장과 대화한 후, 흑주에게 다가간다.

흑주는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지 인면이 입술을 빼죽 내밀고 있었다. 점점 표정이 다채로워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군.’

* * *

“저희도 싸우고 싶습니다!”

“나서게 해 주십시오!”

북경에서도 무림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파가 밀리기 시작할 땐, 이런 목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천화련주가 개입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가 직접 전장에 나타나자, 반응이 달라졌다.

황실에서도 천화련주라는 말에 고민하는 눈치였다.

“황 문주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어깨가 딱 벌어지기 시작한 황태자. 그는 자주 뇌불을 찾았다. 솔직히 뇌불은 귀찮았지만, 친우인 언치골이 하도 사정하여 적당한 공손함을 유지했다.

“뭐, 가고 싶다는데 말릴 필요가 있겠소? 어차피 황제를 암살한 놈이 다시 나타나면 저들로는 막지 못할 것이오. 오히려 방해만 되겠지.”

“크음!”

옆에서 듣고 있던 호위대장이 헛기침한다. 황태자를 모시는 내시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황태자도 고민이 많았다.

황실은 사파나 정파나 반동분자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파에 더 정감이 간다. 그래도 겉으로는 착한 척을 하지 않는가?

천화련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손을 거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왜 자꾸 나를 찾소? 나보다 똑똑한 이는 많을 텐데 말이오.”

뇌불은 대답해 주기 귀찮은 탓인지, 황태자에게 그리 물었다.

북경까지 온 김에 흑주가 있다는 마경에 찾아가려 했는데, 황태자가 하도 들러붙는 통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파천뇌권께서 만뇌문 소속이 아닙니까? 그리고 황 어르신께서는 만뇌문의 문주시지요. 파천뇌권께서 모시는 분이시니 당연히 신뢰가 갈 수밖에요.”

“…….”

뜻밖의 말을 들은 뇌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으음, 황태자가 결정권자니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눈치 볼 사람도 없지 않소?”

뇌불의 말에 황태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시와 호위대장마저 밖으로 내보낸다. 호위대장은 끝까지 나가지 않으려 했지만, 엄명이라는 말에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황 문주.”

“음?”

“북경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십니까?”

“잘 모르오. 여기에 올 일은 잘 없었지.”

“혹시 도원향(桃源鄕)이라고 아십니까?”

“들어 본 적은 있소.”

“북경 내에 도원향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뇌불은 황태자가 농이라도 건네는 줄 알았지만, 황태자의 얼굴은 더없이 진중했다.

“사실 황제 폐하를 시해한 존재가 흑살문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흑살문주가 사용하는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소?”

“예, 고명한 무림의 대종사들은 그리 말했지요. 하나… 저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황태자가 잠시 숨을 멈췄다가 말을 이어 간다.

“태사(太師)가 도원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요즘 태사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많고 말입니다. 혹, 황 문주께서 그걸 알아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금성 내에서 믿을 분이 황 문주뿐입니다.”

황제가 될 사내의 부탁이라.

당연히 공짜는 아닐 것이다.

“그럼 내가 뭘 얻게 되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뇌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