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변주
배교에서도 특수한 임무를 도맡아 하는 백의단(白衣團). 그들은 어떤 임무를 맡든 백의가 더럽혀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보통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흑색 무복을 갖춰 입곤 했지만, 저들은 다르다.
압도적인 자신감.
배교에서도 특히 중요한 임무를 처리할 때, 차출하는 배교도들이다. 당연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인면지주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었다. 물론, 흑주는 평범한 인면지주와 완전히 다르게 생겼지만 말이다. 날개가 달린 인면지주가 어딨는가?
아무튼, 백의단 2조 조장 민예는 인면지주보다 뒤에 선 사내를 더 경계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다. 요녕성에서 패자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인물인가? 아니다. 민예는 모용세가의 강자들의 얼굴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저런 얼굴의 사내는 보지 못했다.
“공격.”
그렇다고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찌 됐든 먼저 제압하고 난 뒤에 생각하면 그만이다. 백의단 개개인의 육신에서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그 기운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응하며 폭발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기운은 감히 다른 성질의 기운을 가진 자가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뚜렷했으며, 살의가 넘쳐흘렀다.
보통 이렇게 백의단이 작정하고 기파를 내뿜으면, 상대는 알아서 꼬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인면지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대련지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놈답군.”
- 끼릭.
사내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여덟 개의 발 중 두 개의 발로 우뚝 선 흑주.
녀석은 사납게 포효하며 괴상한 기운을 흘려 냈다.
“……!”
“합!”
“흐윽?”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백의단이다. 비밀스러운 종파인 배교. 그중에서도 백의단이라는 존재들은 특이했다. 하지만 그런 백의단에게도 흑주라는 존재는…….
“죽여라!”
흑주는 독을 공간에 살포했다.
그 독은 단순히 상대를 중독시켜 죽음에 이르는 형태가 아니다. 독의 냄새를 맡는 순간, 전투 의지가 내려간다. 몸이 나른해지고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미혼약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또 그것과는 다르다.
타다다닷!
백의단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들은 모두 검강(劍罡)을 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단순히 경지로 따지면 모두 초절정이라는 뜻이다. 황극린은 그런 배교도들을 보며 그들의 잠재력에 놀랐다. 저런 이들을 데리고 있었는데도, 왜 흑살문의 의뢰를 취소해 달라고 접근했었을까?
그런 의문도 잠시.
황극린 또한 집중하여 잡념을 털어 낸다. 흑주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초절정 고수 열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검강이라면 흑주의 단단한 외피를 뚫어 낼 수도 있을 것이며, 저들의 진법이라면 흑주 또한 당황할 수도 있다.
하나.
전투는 황극린의 의도와는 약간 벗어났다.
황극린이 생각하기에 흑주는 거미줄을 이용해서 차근차근 먹잇감을 사냥하는 습성이 있었다. 정면 대결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무를 취한 흑주는 조금 달랐다.
캉캉! 캉! 캉! 캉!
흑주의 몸에 검이 부딪칠 때마다 귀를 찢는 소리가 울린다. 흑주가 일부러 맞은 것은 아니다. 백의단의 공세가 몹시 날카로웠다. 영물과 싸워 보는 것은 처음일 것이 분명한데도, 움직일 경로를 예상하여 차단한다. 그리고 틈이 보이면 검강이 깃든 검으로 흑주를 찌르고 베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세는 실패했다.
흑주가 순간적으로 두른 흑색 기운.
황극린은 그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암천성휘.’
상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힘. 저것은 혈마교와 천화련의 직계들만 사용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걸 흑주가 사용한다? 흑주가 그들의 무공을 익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암천성휘는 애초부터 존재해 왔던 성질의 기운이다. 음양오행을 다루는 무공도 같다. 빙공(氷功)을 다루는 무공은 북해의 얼음 폭풍을 재현해 낸 것이었으며, 화공(火功)은 용암과 불꽃 그리고 뇌공(雷功)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흉내 낸 것이다.
암천성휘는 마공(魔功)의 기초가 되는 성질이다.
즉, 혈마교나 천화련이나 저것을 따라 무공을 만들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흑주는 마공을 익힌 게 아니다. 그 자체로 마기(魔氣)를 발산하는 마물의 힘을 지녔을 뿐이었다.
“커억!”
“컥!”
흑주는 가만히 검강을 맞고만 있진 않았다. 순간적으로 검에 맞았을 때, 암천성휘의 힘을 발현하여 상대의 기운을 빼앗는다. 동시에 발 두 개를 휘둘러 배교도의 심장을 노렸다. 백의단의 공격은 흑주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흑주는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면서도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놈!”
두 명의 배교도가 죽고, 남은 배교도들이 흑주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거미줄이 공중에 가득했다. 저들의 공세를 피해 가며 뿌린 거미줄. 보통의 거미줄이라면 사람이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허망하게 흩날릴 뿐이었겠지만, 흑주의 것은 달랐다.
“이건 무슨……?”
“움직일 수가 없다!”
흑주의 사냥감은 단순한 곤충과 작은 짐승이 아니다.
그렇기에 녀석이 만들어 내는 거미줄은 탄력성이 남다르다. 황극린이 눈을 빛냈다. 뇌섬사의 한계는 잘 알고 있다. 뇌전이 잘 통하는 성질을 지녔다. 잘 끊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날카로운 것과 내공을 담은 ‘베기’에는 약하다. 하지만 배교도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미줄에 검은 기운이 어렸다.
황극린이 뇌섬사를 통해 뇌전을 방출했던 것처럼.
흑주 또한 암천성휘의 기운을 거미줄로 퍼트리고 있었다. 거기다 막무가내로 내력을 소모하는 게 아니다. 저들이 딱 검을 휘두르는 순간만 암천성휘가 어렸다.
흑주의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
황극린도 퍽 집중해야 할 것을 흑주는 날개를 퍼덕이며, 여덟 개의 다리를 마구 놀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황극린은 감탄했다.
놀라운 수준이다. 흑주의 전투력은 단순히 내단의 크기가 크다고 정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흑주는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캉! 캉! 카아앙!
푸욱! 푹! 푹!
굉음이 울려 퍼진다. 백의단은 열심히 대응했다. 하지만 흑주의 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황극린조차도 감탄할 수준이었으니, 제아무리 백의단이라도 버텨 낼 수 있겠는가?
“커억!”
백의단의 2조장 민예가 결국 쓰러진다.
싸움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일각에 불과했다. 그만큼 흑주는 성장했다. 과거였다면 백의단 한 명과의 전투에서도 꽤 고전했으리라.
- 꾸?
흑주가 전투가 끝나자마자 황극린에게 다가와 배를 뒤집었다.
칭찬을 해 달라는 것이다.
“잘했다.”
- 꾸룩, 꾸룩.
“정말 강해졌구나.”
- 끼리릭! 끼이이익!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흑주는 평범한 서당 개도 아니다.
“혹, 이번 전투에서 보여 주지 못한 게 있느냐?”
흑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황극린 앞에서 자랑하기 시작했다.
암천성휘를 사용해서 금방 탈진하고 말았지만, 그런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흑주는 더 강해질 길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은가?
저 멀리 보이는 산과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존재.
현무.
어찌 보면 녀석은 가진 것에 비해 싸우는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어른의 힘을 가진 한 살짜리 어린아이 같았다고 할까? 흑주가 만약 현무의 힘을 다 흡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 * *
“묻지.”
정신을 차린 민예.
그는 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죽는 순간, 황극린이 그를 살려 줬다. 몽롱한 눈동자로 황극린을 올려다본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인지 살의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옆에서 흑주가 연분홍빛 연기를 입에서 내뿜고 있었는데, 그 효과가 꽤 컸다.
“배교에 너희 같은 자들이 몇이나 되지?”
“백의단은 총 오십 명…….”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오십이라.
물론, 완벽한 초절정이라 할 수는 없었다. 검강을 다룬다는 것으로만 보면 초절정은 맞지만, 검강을 다룰 만큼 경험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그들은 인위적으로 특정한 깨달음을 얻었으리라. 그 방법이 황극린으로선 잘 예상이 되지 않았지만.
“배교는 흑살문과 싸울 수준의 전력을 갖추고 있지 않나?”
“아니… 우리는 싸우지 못한다.”
“왜지?”
“교주께서 부재중이시기 때문이다.”
“어디에 간 건가?”
“나도… 모른다.”
“무슨 목적을 위해 떠난 거지?”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떠나셨다.”
술술 대답해 준다.
황극린은 매번 극한의 고통까지 주며 상대의 정신을 무너뜨렸지만, 흑주가 발산하는 분홍빛 연기는 그보다 더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약병에 담아 둬야겠군.’
황극린은 오랜만에 무언가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통하는지도 실험을 해 보아야겠지만.
“육금연은 어디에 있지?”
“알 수 없다…….”
“배교는…….”
황극린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매번 배교도에게 정보를 뜯어낼 땐, 황극린도 고생깨나 했다. 고문이라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애초에 황극린이 남의 고통을 즐기는 성향이 아닌 탓이기도 했다.
“음, 그렇군.”
꽤 많은 의문이 해소됐다.
배교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마경을 관리하는 데 막대한 인원이 소모되기 때문이며, 마경의 힘으로 만들어진 무인들도 여럿 있지만, 그들은 곧장 마경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육금연이 흑살문의 의뢰에 난색을 보인 이유가 있었다.
“네가 알고 있는 마경의 위치는?”
“정확히는 모른다. 귀주성 귀양(貴陽)현 근처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민예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멈춘 것이다.
‘대가는 치르도록 해 주마.’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귀주성으로 향할 것은 아니다. 지금은 여기에 있는 마경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이곳에 있는 귀물들만 수거해도 배교에는 상당한 타격이 되리라.
“흑주, 가자.”
- 끼이!
흑주가 날개를 퍼덕이며 황극린의 뒤를 따랐다.
* * *
“마도 무리를 섬멸하자!”
사태는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림맹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감히 무림맹주를 해하고, 팽가의 대공자인 팽여해를 해한 사파 놈들을 쳐부수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림맹의 정예부대들은 착실하게 진군하였다. 당연히 사파의 세력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무림맹이 무슨 오해를 했든 간에 대화로 풀 생각은 없었다. 대규모의 무인이 경계를 넘으니, 대응을 시작했다.
처음엔 무림맹이 승승장구했다.
꽤 오래전부터 한마음으로 뭉쳐 작전을 수립했으니까.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혈마교와 북해빙궁 그리고 흑살문까지. 그들 또한 알게 모르게 연합을 만들어 무림맹에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처음 다섯 번의 전투에서 무림맹의 정예들은 연전연승을 이어 갔지만, 이제는 무림맹이 패퇴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예부대의 패퇴 소식은 무림맹 본성까지 전해졌다.
“빙궁의 마후가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혈마교의 소교주 후보라는 것들도 나타났습니다.”
“흑살문의 살수가 중요 인사들만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고 합니다.”
“후우.”
사흑련이 작정하고 나서니 무림맹으로선 난감하다. 지금 무림맹의 전력은 분산되어 있었다. 황실에서 무인들을 차출한 탓도 있었다.
새로이 맹주의 위에 오른 계립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맹주령을 발동하여 조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황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그런 마음을 예상한 듯 총군사, 제갈서운이 조언한다.
“아직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잠시 총군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계립.
잠시 뒤, 그가 누굴 지칭하는지 알아차린다.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계립의 얼굴에 공포가 떠오른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 총군사는 굳이 그 부분을 언급하진 않았다.
“예, 그분이 나서 주신다면… 전세는 역전될 겁니다.”
“련주님께서는…….”
“그분은 혈교를 중원에서 쫓아내고, 마교를 공포에 떨게 했던 분입니다. 혈교와 마교가 공포에 떨며 결국 혈마교를 만들게 되었지요. 그분의 힘과 무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주 계립은 천화련 출신이었지만, 직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천화련이 가진 어둠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그는 천화련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사흑련과 정면 대결을 하면서도 천화련을 끌어들이는 게 왜 이리 껄끄럽단 말인가?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혹, 련주님께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계립이 각오를 다진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전달하겠습니다. 천화련주님께 직접 나서 달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제갈서운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맹주님의 부탁이시라면 그분도 필히 나서 주실 겁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총군사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