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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71화 (271/316)

271화 살수 거미

- 끼릭! 끼릭!

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았지만, 먹는다. 참을 수 없는 허기. 짐승들이 먹을 것만 보면 달려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입에 넣지 않으면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먹을 것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흑주는 멈추지 않았다.

옴뇸뇸뇸.

거칠게 바둥대며 입을 놀리는 것과는 다르게 흑주의 먹는 속도는 엄청나게 느렸지만, 꾸준히 먹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몸은 변화했다. 몸통에 새겨진 인간의 얼굴은 점점 선명해졌고, 심지어는 단순히 형상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코로 숨을 쉬고 입으로 무언가를 섭취할 수도 있게 되었다. 표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물론, 흑주는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확실히 깨닫지 못했지만,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른 인면지주들보다 작았던 흑주의 몸은 이미 인간처럼 커졌다.

- 끼?

오늘도 열심히 식사를 마친 후.

흑주가 바닥에 고인 물에 얼굴을 비춰 본다.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왜인지 불만족스럽다.

- 끼끼!

이렇게 크면 안 되는데!

주인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사람들은 벌레를 무서워한다. 자신이 벌레라는 건 아니지만, 벌레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흑주는 인간과 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지능이 있다. 현무의 사체를 취한 후에는 더 똑똑해졌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먹는 것을 중단했다.

더 몸집이 커져 저 현무라는 놈처럼 변해 버리면, 황극린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현무를 먹고 커지면 아마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흑주는 감히 짐승들은 상상하기 힘든 인내력으로 포식을 참아 냈다. 사실상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들도 쉬이 참아 낼 수 없는 욕구를 참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천상의 맛을 자랑하는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갔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흑주는 결코 현무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모종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놀랍게도 흑주의 몸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 끼!?

거기다 더 놀라운 점은.

“아. 아. 아.”

울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몸통에 튀어나온 인간 형상에서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말’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색한 부분이 많았지만, 흑주는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간절한 소망.

그리고 막대한 힘을 품은 현무의 사체.

막대한 기운을 그냥 쌓아 놓기만 했던 흑주였다. 하지만 먹지 않고 참는 동안 그 기운은 흑주의 바람대로 움직였고, 새로운 변화를 나타냈다. 흑주는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도 주인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영물에게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 짐승은 당연하고, 영물로 진화한 존재들마저 평생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심지어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들도 거의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끼! 끼! 끼!

흥분에 찬 흑주.

오랫동안 먹지 않아서 그런지 허기가 몸을 지배했다. 부족한 힘을 채워야 한다. 그렇게 현무의 사체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 끼?

구멍이 뚫렸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흑주가 만약을 대비하여 잔뜩 친 거미줄이 모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 끼끼! 끼이이이!

현무의 사체마저 그 구멍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흑주는 분노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이게 말로만 듣던 마물인가.”

배교의 대련지부. 이곳의 배교도들은 평생 마경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마경에서 막대한 기운을 이용하여 새로운 진을 구성하고, 그 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마경에서 운기조식을 한다면 빠르게 내력을 늘릴 수가 있다. 그들은 배교의 숨겨진 비장의 수라고 할 수 있었다.

마경의 힘은 무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마경과 연결하여 부족해진 기운을 채우고, 더 많은 전력을 키우려 했다. 마경과 마경의 연결 과정은 몹시 난해하고 까다로웠기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다.

“과하게 힘을 탐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배교의 장로 곡항이 마물을 보며 설명한다.

마경의 마기(魔氣)를 통제할 수 없어 몸 자체가 폭발한 이들을 보았다. 배교에선 철저히 마경에서 흡수하는 기운을 통제하고 있다. 물론, 일부러 실험을 위해 끝없이 마기를 흡수하는 행위도 종종 했었지만 말이다.

“장로님, 여길 보십시오!”

“뭐지?”

“마물의 사체에 뜯겨 먹은 흔적이 있습니다!”

워낙 마물의 사체가 커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뭔가가 이빨로 뜯어 먹은 자국이 여럿 발견되었다. 설마 다른 마물에게 패배했다는 말인가?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아쉽군.”

휘리릭-!

장로 곡항이 휘파람을 불자 수백의 배교도들이 집결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관이 이상했다. 피부에는 종기가 가득했으며, 입에선 거품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곡항 장로는 그들의 징그러운 외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네놈들의 밥을 강탈한 놈들이 있다.”

“우어어어어-!”

“그러니 싸워라.”

“우어! 우어!”

더 세련되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저들에겐 그게 통하지 않는다. 무림인 중에서도 내력이 뇌리까지 닿아 주화입마에 빠지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평범한 자연의 기운이 머리에 닿아도 주화입마에 빠질진대, 마기는 어떠리?

저들은 모두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분류하자면 마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명령을 내린 곡항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애초에 저런 거대한 마물과 싸운 마물이 있다면, 놈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상황이 터질 것이었다면, 마경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놈도 함께 나타났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경고를 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에, 곡항은 마음을 놓고 마인들을 복귀시켰다. 마물의 사체를 해체하여 여러 실험을 시작했다. 마경은 배교도 확실하게 파악한 공간이 아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이 발견됐다. 특히 최근 회계산에서 발견된 마경은 확실히 특별했었다. 이번에 연결된 마경도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배교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흑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끼.

개는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흑주는 개가 아니었지만, 개보다 훨씬 지능이 뛰어나다. 녀석은 황극린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걸 생각하지 않았다. 분노? 마음 같아서는 배교도들을 바로 쳐 죽이고 싶었지만, 만약 일이 잘못될 수도 있지 않은가?

흑주는 사냥감을 모두 한 번에 잡아 족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마경 이곳저곳에 극독이 발린 거미줄이 가득해질 때까지 배교도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악! 이, 이게 뭐야!”

거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공간이다. 그런데 거미줄에 걸렸다. 얼굴에 붙은 거미줄을 털어 내려 했던 배교도였지만, 순간 얼굴이 타오르는 고통을 느꼈다.

“뭐 하는 거냐?”

“이놈도 이제 갔군.”

주변에선 혀를 차며 발광하는 동료를 무시할 뿐이다. 배교에선 주화입마라는 건 흔한 감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아파! 누, 눈이 안 보여! 뭐야! 대체 뭐냐고!”

“저놈은 특별히 시끄럽군.”

“쯧.”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반응이 한 곳에서만 펼쳐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으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아아!”

“내 팔! 내 팔이 타고 있어! 으아아아악!”

“귀가… 귀가……!”

흑주의 거미줄에 걸린 부위에서 극한의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 댄다. 장로 곡항은 사방에서 그 고통이 터져 나올 때, 이변을 깨달았다.

“마물이다!”

그들이 흑주의 존재를 완전히 깨달은 순간.

흑주는 살수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중독되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의 숨통을 끊는 일은 현무의 사체를 누워서 먹는 것보다 쉬웠다.

그렇게 대련지부의 멸망이 시작되었다.

* * *

- 끼이!

황극린이 피를 뒤집어쓴 채로 배를 까뒤집은 흑주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몸집이 커졌다. 거기다 몸통에 달린 인간의 형상도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거기다 녀석의 날개는 더 커졌는데, 곤충의 날개라기보단 매의 날개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원하는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건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흑주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가 황극린의 입장에선 반갑기도 했지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흑주가 그렇게 특별한 영물일까? 황극린의 곁에 있으면서 평범한 영물은 겪을 수 없는 기연을 수없이 겪었다. 넓은 세상에서 흑주만 저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인간은 영물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눈에 닿지 않는 장소에 흑주와 같이 특이한 영물들이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단순히 무림인들의 영약 보따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궁극에 도달한 영물이 말이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화경에 도달한 무인과 비견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같은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이 죽였구나.”

- 끼!

황극린의 칭찬에 흑주가 벌떡 일어나 몸을 비빈다. 흑주의 몸통에서 튀어나온, 인간 형상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황극린과 꽤 닮은 얼굴이었다. 쉽게 말하면 예쁘고 잘생겼다.

- 끼끼!

“여기서 또 발견한 게 있다고?”

- 끼익!

흑주를 따라 황극린이 이동한다.

쿵쿵, 쿵쿵!

심장이 뛰듯이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대지. 사람의 몸통만 한 거대한 검은 구체가 대지에 진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저것이 인간이 흡수할 종류의 기운은 아니라 여겼다. 황극린이 보기에도 위험하다.

‘진이 있군.’

거기다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다. 어찌나 정교한 진법인지 마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진법과 거의 동등한, 어떤 부분에선 더 뛰어난 진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진을 형성하기 위해 묵철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기관이 십 장 범위로 뻗어 있었다.

‘여기 있는 묵철만 팔아도.’

아마 성은 물론이고, 평생 돈을 써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몰락했다고 알려졌던 배교. 그들은 음지에서 막대한 자본을 굴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돈을 투자하고. 인력이 집중되어 있던 건가.’

황극린은 육금연이 처음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배교의 규모가 이 정도라면 흑살문과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전투력보다는 다른 부분에 더 치중한 감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 끼익!

“이거?”

흑주가 찾아낸 건.

수십 권의 서책이었다. 거기다 표지엔 회생비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

설마 회생비록인가?

말도 안 되는 규모에 황극린조차 놀란다. 회생비록이 이렇게 많은 것이었나? 당장 서책을 읽어 나가던 황극린은 이해하게 된다.

‘이건 전에 봤던 것들보다 더 짧고 간결하군.’

비망록(備忘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필체나 그런 것이 전부 다르다. 황극린이 보기에도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무공 구결이나 진법의 요체가 담긴 서책도 있었다.

‘역시 회생비록의 저자는 하나가 아니다.’

황극린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책만 챙겨 놓고는 마경을 더 둘러보았다. 십만대산의 마경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마경에 진입하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찾아왔지만, 이곳은 그게 덜하다. 이제껏 방문한 마경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게 배교의 대련지부를 탐색하고 있을 때였다.

- 끼이?

“그래, 알고 있다.”

무언가 거미줄에 걸렸지만, 금방 탈출했다.

황극린이 달려 나간다.

“배교도인가?”

“거미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백의를 갖춰 입은 열 명의 무인. 황극린은 딱 봐도 그들이 배교의 정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잘됐다.

“네놈은 누구지?”

“그건 알 필요 없다.”

“개진하라.”

열 명의 배교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흑주와 황극린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믿을 수 없게도 암천성휘와 비슷한 기운이 일렁인다. 저들은 마기를 품고 있는 존재였다. 황극린은 자신이 세웠던 가설에 다시 한번 확신하면서 흑주에게 명령한다.

“흑주야, 네 힘을 보여 다오.”

- 끼이!

황극린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가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흑주가 대체 얼마나 강해졌느냐.’

그건 황극린에게 꽤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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