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연결
“황극린이다!”
“진을 펼쳐라!”
처음엔 회계산의 동굴을 무너뜨려 황극린을 매몰시키려 하더니, 다음 방안도 세워 놓은 모양이다. 배교도들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진 않았다. 분명 환우멸절관(環宇滅絶關)이 펼쳐져야 했다. 놈은 저항하지 못하고 새로운 진에 빨려 들어갔어야 됐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왜 진을 펼치지 않는 것이냐!”
“그놈들 거의 다 죽었다.”
“뭐……?”
이들은 회계산에서, 황극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당연히 암벽에 황극린이 깔려 죽을 것을 예상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빠져나오면 황극린은 이들을 가장 먼저 만났어야 했다. 그런데 다 죽었다고?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나서 말이야. 조금 돌아서 왔지.”
“……!”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동굴이 무너진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탈출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곳에서 빠져나와 진을 형성하고 있는 배교도들을 모두 척살하고 마지막에 이곳에 들렀다고? 오판했다. 회계산의 동굴을 무너뜨리고, 환우멸절관까지 준비하라는 명을 들었는 땐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과하지 않았다.
한참 모자랐다.
“제기……!”
“그럴 줄 알았다.”
“꺼억!”
배교도 세 명.
황극린이 이미 죽여 버린 놈들과는 달리, 이들은 수뇌부였다. 아는 것도 많으리라. 고문 따위에 정보를 털어놓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하지도 않을뿐더러, 고통을 견디는 훈련도 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황극린은 자신 있었다. 이들에게 정보를 뜯어낼 자신이 말이다.
“육금연.”
배신이라고 하기엔 뭣하다.
애초에 그녀와 황극린 사이에 신뢰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뭐, 뒤통수를 쳤다고는 할 수 있으리라. 그에 대한 대가는 조만간 치르게 될 것이다.
‘전음석이 없는 게 아쉽군.’
십만대산의 마경.
그 어떤 마경보다 넓어 보였던 그곳에서 전음석이 부서졌다. 그래도 검후신제라는 대비책이 있으니, 육금연이나 배교가 표적을 바꿔 만뇌문을 노리더라도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제정신이 박혔다면 감히 만뇌문을 노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테지만.
육금연은 뇌불을 구하기 위해 천화련의 대공자마저 납치하는 황극린을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만뇌문까지 건드릴 수 있을까?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황극린이 기절시킨 배교도들을 끌고 간다.
무문(無門)에서 회계산을 조사할 때 만들어 놓은 은신처가 있다. 다행히 회계산과 꽤 거리가 있었기에 화염에도 잡아먹히지 않았다.
* * *
“끄르으으으읍!”
“꾸으윽! 꾸륵! 꾸룩!”
비명이 약간 이상했다. 거침없이 고통을 쏟아 내는 게 아니다. 마치 억지로 고통을 쥐어짜 내는 듯한 신음이었다. 그들은 황극린에게 아혈이 봉해진 상태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배교도들은 기회만 엿보이면 자결하려 했다. 황극린은 혀를 깨물지도 못하게 조치한 후 고문을 시작한 것이다.
무려 반나절 동안 이어진 고문.
황극린은 끊임없이 고통을 가했다. 거기다 치료까지 해 주면서 말이다. 전 무림에서 만뇌문이 만든 내상약과 외상약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황극린은 그중에서도 특상품만 골라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끄룹! 끄루우웁! 끄루우욱!”
“조금 다쳤군. 약을 발라 주마.”
“끄루우우욱!”
황극린은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해괴한 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의 고통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도 없었다. 단지 그는 무심하게 일련의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죽음을 초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배교도들이 질릴 만큼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마.”
“……!”
고문을 받던 배교도들이 환희에 찬 눈을 빛냈다.
드디어 이 고문이 끝나는 것인가? 최소한 반나절은 쉴 수 있을…….
“이각 뒤에 다시 오지.”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루의 정의는 황극린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고문실이 되어 버린 문주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간 황극린. 제갈소희는 끙끙 신음을 내며 누워 있었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긴 했다. 황극린이 진기를 안정시켜 주고, 곧장 내상약을 복용케 했기 때문에 위기는 넘긴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왔던 거죠……?”
제갈소희의 기억에 스쳐 가는 무너지는 동굴.
그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깔려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였다. 죽다 살아난 제갈소희였지만, 그게 가장 궁금했다.
“반탄지기를 좀 넓게 펼쳤소.”
“네……?”
그게 가능하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황극린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제갈세가에서 가주가 되고자 아등바등 살아가는 자신이 어이없을 정도로 하찮아 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 내력을 많이 썼소.”
“그, 그렇군요… 쿨럭!”
“대화할 수 있겠소?”
“네, 꽤 나아졌네요. 만뇌문의 내상약이 좋다더니…….”
물론 더 쉬면 좋겠지만, 제갈소희는 상체를 일으켜 황극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
“누워서 해도 되오.”
“배려 감사해요.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육금연 그 여자는 꿍꿍이가 있었어요. 쿨럭…….”
“마경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모양이오.”
“네, 그걸 결국 성공하더군요. 미리 눈치채지 못했어요. 순박한 웃음을 지으면서… 쿨럭, 함정을 파 놓았더군요. 폭풍 안으로 몸을 맡기지 않았다면 저도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잘도 살아남았다.
오히려 육금연과 싸우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황극린의 의문을 예상한 것인지, 제갈소희가 부연 설명을 했다.
“당시 폭풍은 흔들리고 있었어요. 분명 위험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 그런 느낌이었죠. 물론, 거의 죽을 뻔했지만 말이에요.”
“그 이후에 육금연은 보지 못했겠군.”
“목소리는 들었어요. 절 살려 주려 했다느니 개소리를 하길래 무시하고 폭풍을 제어하려 했었죠. 황 공자님처럼 하려 했는데, 역시 안 되더군요.”
이렇게 되면 제갈소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말을 마지막에 남겨 두는 성향이었다.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어요. 마경이라는 게 중원 곳곳에 퍼져 있다는 것을요.”
“그건 알고 있소.”
“마경끼리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연결?”
“네, 애초에 ‘진법’이라 정의되는 공간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장소죠. 와룡께서 본가에 만든 진법만 보더라도 그곳엔 울창하고 광대한 숲이 펄쳐져… 쿨럭!”
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흥분하던 제갈소희. 황극린이 건넨 물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그건 모두 별개의 공간이라 정의하는 게 맞아요. 하나, 현실에 펼쳐진 공간도 따지고 보면 다 연결되어 있지만 거리라는 개념이 있기에 분리된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마경이라는 장소는 무공으로 따지자면 ‘마공’이에요. 즉, 현실에선 먼 거리를 접어 이동하지 못하지만… 마경은 그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게 조금 설명하기 어려운데, 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개념이라…….”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들은 다른 마경과 회계산의 마경을 연결했어요.”
“그래서 뇌정 폭풍의 크기가 작아진 것인가 보군.”
“네, 거대한 힘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당기죠. 회계산의 마경은 그들이 연결한 마경에게 흡수당했답니다. 물론, 근간이라 부를 수 있는 기운은 남았지만 말이에요. 거기까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어요.”
후욱, 말을 쏟아 낸 제갈소희가 탈진하여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예상보다 더 강하답니다. 그러니 황 공자님이라도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고맙소.”
황극린은 제갈소희의 말을 기억해 뒀다. 솔직히 말해서 황극린으로서도 어려운 개념이긴 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 마경끼리 연결되어 있다? 더 큰 마경이 작은 마경을 집어삼킨다? 상식적으로 마경의 존재 자체가 의문투성이이긴 했지만, 애초에 황극린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선 가장 이질적이다.
‘전생’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황극린은 신비로운 마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황극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문실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히 눈을 뜬 제갈소희.
‘저도 제 말이 믿기지 않는데, 전혀 당황하지 않으시는군요.’
황극린.
처음엔 단순히 재능이 뛰어난 무인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무언가 다르다.
‘제가 육금연이었더라면 황 공자님을 제거하기보단 내 편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제갈소희 또한 야망이 크다. 그리고 그런 야망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가주에 오른 다음 그것으로 더 큰 것을 노렸으리라. 육금연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잘못 선택했다.
‘넌 잘못 선택했어.’
제갈소희가 죽어 가는 육금연을 상상하며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세 명의 배교도들이 죽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은 것이 아니다. 황극린에게 더는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꽤 있었지만, 황극린이 놀랄 만한 것은 없었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제갈소희에게 들었던 것을 계속 생각했다. 마경과 마경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그렇군.”
생각대로만 된다면 황극린도 배교의 뒤통수를 칠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회계산이 무너져서 마경으로 진입하려면 땅굴을 파 내야 한다.’
이래저래 제약이 많았다. 단순히 탈출하기 위해서 출구를 향해 진기를 방출하며 달려갔던 것과는 다르다.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곧 나왔다. 그가 알고 있는 마경은 회계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바다에도 마경이 존재했다.
제갈소희에게로 향한 황극린이 물었다.
“가 봐야 할 곳이 있소. 괜찮겠소?”
“네, 이제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된답니다. 가까운 곳에 제갈가의 지부가 있으니까요.”
“알겠소.”
“어디로 가시려는 건가요?”
“또 다른 마경.”
“다른 마경이 어딨는지 알고 계시나요?”
“멀지 않소.”
“그 마경을 통해 배교가 있는 곳으로 가시려는 것이군요.”
“맞소.”
제갈소희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극린은 회계산의 마경을 제어했던 적이 있다. 그라면 마경과 마경을 연결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래도 여기서 얻은 지식이 꽤 많답니다. 어쩌면 와룡께서 남기신 진법도 다시 한번 살펴볼 수도 있겠지요. 언젠가 만뇌문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소희는 진법에 대해서라면 천재 중의 천재다.
그녀가 깨달음을 체화한다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나중에 뵙겠소.”
“네, 공자님, 살펴 가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극린이 사라진다.
참, 폭풍 같은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고…….”
며칠 만에 몸을 꽤 회복한 제갈소희. 그녀가 죽은 배교도들의 앞에 섰다.
“제법, 좋은 실험체가 되겠네.”
그녀는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악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자신과 황극린을 죽이려 했던 놈들의 시체 따위, 어떻게 활용하든 그녀의 마음이 아니던가?
그녀는 끙끙 신음을 내면서 시체를 보따리에 담기 시작했다.
* * *
“역시 실패했구나.”
육금연은 아쉬움과 묘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동굴은 확실히 무너졌지?”
“예.”
“그라면 굴을 파서 다시 마경에 진입할 수도 있으니까, 연결을 끊어.”
“조금만 더 있으면 태초의 힘까지 흡수할 수 있습니다.”
“됐어. 그것보단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먼저야.”
“예, 알겠습니다.”
육금연은 황극린의 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별 상관 없었다. 그녀가 작정하고 숨는다면, 그 또한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지금 무림의 상황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교주님은 아직 거기에 계신가?”
“예.”
“거기도 얼른 끝내야 하는데.”
“놈이 워낙 강하지 않습니까? 방법을 찾는 데 오래 걸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어. 나가 봐.”
“예.”
육금연이 손을 옮겨 탁상 위에 올려진 고기를 집어 입에 넣는다. 우물우물 씹다가 금방 뱉어 냈다.
“이건 왜 그 맛이 안 날까?”
황악반점이라는 곳에서 황극린이 만든 양념과 비슷한 음식을 팔았다. 거기서 산 건데 맛이 황극린이 해 준 것보다 훨씬 못하다.
“쯧.”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육금연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부교주님!”
“왜?”
“큰일 났습니다!”
“뭐가?”
“방금 요녕성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요녕?”
요녕의 대련(大連)현.
그곳에 또 다른 마경이 있다. 배교에서 오래도록 관리해 왔으며, 최근 진입하여 그곳의 마기(魔氣)를 추출하고 있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이긴 했지만, 배교에겐 중요한 거점 중 하나다. 마기를 추출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된 마경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설마 황극린이?’
회계산과 그곳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을 텐데?
“웬 거미 한 마리가……!”
“거미?”
육금연이 황급히 서신을 뺏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