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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69화 (269/316)

269화 회계산의 이변

황극린은 육금연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의 의도대로 움직였으며, 계빈을 납치하는 데에도 꽤 도움을 줬었다. 그렇다고 신뢰가 두텁게 쌓였다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만뇌문에 해를 입히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검후신제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들었다.

과연 그녀는 황극린에게 도움만 되었을까?

부교주였던 천흉도 배교에서 혈고독에 당하였던 상태였다. 그렇다면 육금연은 어떨까? 평소엔 꽤 밝고 명량한 성격을 보여 줬었다. 황극린이 주는 양념 구이에 어물쩍 넘어가기도 했다. 그것이 만약 고도의 연기였다면?

황극린은 최근 마경이라는 장소를 알게 되었다.

살수였던 207호로 살아가던 적에는 몰랐던 거다. 최근 벌어지는 사건들이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회계산의 마경은 과거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당시의 육금연은 무엇을 했을까?

“어, 어딜 가시나요?”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니 검후신제가 당황한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황극린에게 죽기 위해서 난동을 피웠다. 스스로 죽을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혀를 깨물어 자결하지 못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으니까. 이제 그녀는 살고자 했다.

“부탁 하나 하지.”

“뭐든 말씀하시지요. 제 아들만 살아 있는 걸 확인한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만뇌문에 위험 요소가 생긴다면 네가 나서 다오.”

만뇌문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구자광을 필두로 하여 문도들은 강해졌다. 거기다 혈마교의 부교주가 강시로 부리던 공야월도 꽤 힘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지 않은가? 당장 그녀를 풀어 줄 생각은 없다. 서문세가로 서신을 보내 용왕궁의 답장을 받는다. 그걸 확인하면 검후신제는 최소한 만뇌문을 공격하진 않으리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육금연 말고 다른 배교도와 만난 적이 있나?”

“그 아이를 따르던 교도들은 보았습니다. 하나, 그 이상의 존재와 마주하진 못했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검후신제는 조금 전 보여 줬던 광녀의 모습은 벗어던졌다. 황극린의 질문의 의미를 알아채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그가 물은 건, 부교주보다 더 높은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냐는 것이었다.

“알겠다.”

“그리고 배교는 저희와 달랐습니다. 저는 그들의 목적을 알지 못하여 선뜻 손을 잡지 못했었지요.”

“저주와는 상관이 없는 건가?”

“상관이 없진 않겠지만, 그들의 눈에선 탐욕이 느껴졌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탐욕.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투지.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검후신제는 이틀에 한 번 점혈을 당했다. 단전을 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잡아 놓은 물고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비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가 뇌옥에서 풀리지 않길 바랄 뿐.

황극린은 만뇌문의 문도들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회계산으로 떠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림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 * *

“미쳐 버렸군.”

뇌불이 혀를 차고 있다.

황실에 모인 무림인의 수만 사천이 넘는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다. 대부분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으며, 각 문파의 수장급들도 여럿 보인다. 용성의 성주와 부성주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러게 말일세. 대체 뭐가 겁난다고. 황족을 다 죽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워낙 자의식이 강한 놈들이니까, 그렇겠지.”

뇌불이 하품을 한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고 빠져나가야겠다. 이렇게 무인들이 많은데 한 명이 빠졌다고 뭔 일이야 생기겠는가?

‘여차하면 독립이라도 해야겠군.’

뇌불은 용성에 어떤 애착도 없다.

과거 부성주가 되려고 애썼던 검후신제가 듣는다면 분노할 발언이긴 했지만, 지금의 검후신제는 아마 용성에 관심도 없으리라. 뇌불은 얼른 흑주가 있다는 바다로 향하고 싶을 뿐이었다.

“황태자 폐하 납시오!”

딱 봐도 나 황제요, 라고 소리치듯 금칠을 한 소년.

아니, 이제는 소년의 태를 벗고 청년의 길로 접어들었다.

“거참, 잘 먹고 잘 싸서 그런지 많이 컸구나.”

“황태자님을 뵌 적이 있나?”

“아니.”

“근데 무슨 많이 컸다는 말인가?”

뇌불은 깔끔하게 언치골의 말을 무시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앞으로 나와 무림인들을 격려하고, 직접 포상을 내려 주겠다 선언했다. 내심 불안이 있던 무림인들이었지만, 황제의 포상 약속에 꽤 분위기가 좋아졌다.

‘하기야 가만히 여기서 쉬면서 돈도 받아 가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황태자가 언치골과 뇌불에게 사람을 보냈다.

“황태자께서 무영전(武英殿)으로 두 분을 뫼시라 하셨습니다.”

“황태자가 나를?”

뇌불의 말에 언치골이 뇌불을 한껏 흘겨보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황궁의 내시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감히 뇌불 앞에서 뭐라 하지는 못했다. 워낙 무림인이 많아 관료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자네, 황태자 폐하 앞에서도 그리 말할 건가?”

“나보다 배분이 낮지 않느냐. 껄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언치골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는 말했다.

“가서는 내가 다 말할 테니 네놈은 그냥 가만히 있거라.”

“마음대로 하거라.”

뇌불과 언치골이 황태자가 있는 무영전으로 향했다.

* * *

저 멀리서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그리고 황극린이 달려가니 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타오르는 회계산이 보였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황극린은 회계산에 불이 붙은 지 꽤 시일이 지났다는 걸 짐작했다.

타닷!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하다.

회계산으로 가니 열기가 후끈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극린에겐 따뜻한 수준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도 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사방으로 재가 흩날리고 있었기에 회계산 주위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미 타 죽어 버린 사람들은 몇 있었지만 말이다. 황극린은 그들이 무문의 정보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곳에서 다 타 죽어 버렸으니 교특범의 귀에도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경의 경계와 맞닿은 순간.

황극린은 바로 진 내부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회계산의 마경은 황극린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거절하는 건가? 그런 느낌은 아니다. 마경의 기운 자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축소되었다. 어느 장소에서든 마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장소가 가진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식 정도는 그냥 비틀어 버리는 거대한 힘이었다.

그런 마경의 기운이 대폭 축소됐다.

진입하려면 처음처럼 동굴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날다람쥐처럼 회계산을 주파한 황극린.

금세 진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니 열기가 후끈했다. 황극린도 땀을 주르륵 흘릴 정도로 말이다.

상황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는다. 황극린이 벽에 손을 댔다. 바로 마경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잡아당기는 힘이 확실히 약해졌다.

정신을 집중하여 틈을 파고든다.

그러자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공간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솨아아아아-!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황극린의 의복이 펄럭인다. 하지만 황극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와는 전혀 다르다. 몸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폭풍이 몰아쳐야 했건만, 지금은 의복이 흩날리는 것으로 끝이다. 폭풍 자체가 약해졌다.

그 짧은 시간에 기운을 모두 소모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황극린이 움직인다. 과거처럼 황극린을 집어삼키려는 악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거대한 뇌정 폭풍이 얼마나 볼품없이 작아졌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피식자를 바라보는 듯이 떠올랐던 무한한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지 않고 폭풍 안으로 들어간 황극린.

중심에 가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었다. 뇌정 폭풍의 기운이 반의반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마치 생기를 빨아 먹힌 듯이 볼품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런 거대한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던가? 설마 육금연인가?

‘이 냄새는?’

폭풍의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냄새가 짙어졌다.

그리고 핵에 도착하여 보이는 것은.

“…….”

피투성이가 된 채로 허덕이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제갈소희. 그녀는 어떻게 한 것인지 폭풍의 중심부에 와 있었다. 황극린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폭풍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텐데도.

“제갈 소저.”

“…….”

미동이 없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정도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한 탓이리라.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맥을 통해 뇌전의 기운을 흘려준다. 그 순간.

쿠릉!

미약하게나마 뇌전이 흘러 나간 탓인지 뇌정 폭풍의 힘이 강해지려 했다. 황극린은 철저하게 흩어지는 기운을 줄이며 제갈소희에게 불어넣었다. 일각쯤 지나니 제갈소희의 눈동자에 초점이 생겨났다.

“황… 공자님?”

“정신이 드시오?”

“와… 와 주셨군요. 정말 죽는 줄…….”

조금만 늦었다면 제갈소희는 목숨을 잃었으리라. 지금도 사실 안전한 건 아니었다. 황극린이 겉옷을 벗는다. 그리고 제갈소희에게 입혀 주었다. 그녀는 폭풍에 도착한 탓인지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빠져나가려면 바깥의 열기에 적응해야 한다.

“조금만 참으시오.”

그렇게 제갈소희를 데리고 마경에서 빠져나간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황극린이 있는 곳은 회계산의 깊은 동굴이었다. 이곳을 통해서만 마경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너진다?’

지축이 떨리고 있다. 산 자체가 완전히 허물어지려는 것은 아닐 테다. 다만, 회계산 중턱에 뚫린 동굴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황극린과 제갈소희는 회계산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누군가 있구나.’

황극린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뻔한 짓을 하고 있었다.

화르륵-!

황극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친다.

콰아아앙-!

동시에 회계산의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감히 인간의 힘으로는 버텨 낼 수 없는 무게와 압력. 사방에서 덮쳐 오는 자연의 순수한 악의. 제갈소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기운에 헛바람을 삼켰다.

두 사람은 그렇게 회계산에 깔려 버렸다.

* * *

“휘유!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백발의 중년 사내가 휘파람을 분다. 회계산이 크게 들썩이는 장면은 멀리서 보아도 소름이 돋았다. 눈으로 보기엔 높이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아마 몇 장 정도는 회계산의 높이가 낮아졌으리라. 거기다 대지에선 용암이 들끓고 있다.

“근데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는 겁니까?”

중년 사내의 곁에 선 작은 체구의 대머리 사내가 물었다.

백발 사내, 배교의 장로 중 하나인 그가 혀를 차며 대답한다.

“부교주님 말씀 듣지 못했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쉽게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했어. 그리고 회계산에 깔린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궁금하다고도 하시더군.”

“설마 마경이 화경에 이른 고수를 먹고 다시 회복한다는 말씀입니까?”

“부교주께서 허튼 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튼, 임무는 완수했군요.”

“아니.”

백발 사내가 온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 더 지켜보자.”

“설마 저기에 깔려서 살아날 수 있을 리가…….”

“뭐, 그건 그렇지만.”

회계산에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봐야 한다. 부교주의 추측대로라면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감당치 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조언했었다. 그들은 끝까지 이곳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났지만, 회계산에선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마경이 인간 하나를 취했다고 다시 회복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대지가 흔들리지도 않았고, 회계산에 붙은 불이 거세지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회계산은 퀴퀴한 재만 쏟아 내고 있었다.

“하기야, 부교주님이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테지. 하루 정도 더 기다려 보고……!”

그렇게 말을 이어 가던 백발 사내. 그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목소리가 달라졌다. 마치 찢긴 종이처럼 강제로 끊어졌다.

“커억?”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그의 복부를 꿰뚫은 검은 손.

그 손을 내려다보는 순간.

백발 사내는 정신을 잃었다. 뇌전이 그의 육신과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다.

“역시 배교였나.”

검게 물든 사내의 몸.

그게 회계산의 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내 자체에서 뿜어져 나온 것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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