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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66화 (266/316)

266화 축객령

쉬이이이잇-!

콰지지지지지직!

- 끼이이이이이!

공간 전체로 울려 퍼지는 이무기의 괴성. 그 괴성에 다른 짐승들도 긴장하며 털을 곤두세웠다. 당장이라도 이무기가 반격할 줄 알았던 부족원들이 경계 태세를 강화한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덮쳐 오는 기현상에 긴장했다. 분노한 이무기가 거대한 육신을 이끌고 부족원들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 끼이이익! 끼이이익!

이무기가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친다.

대체 사내가 뭘 했길래? 어르신들만이 황극린의 손에서 쏘아진 작은 구 형태의 뇌전을 보았다. 작은 구슬과도 같은 그것에 얼마나 큰 힘이 깃들어 있다는 말인가? 어르신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 그르응!

- 꾸룩!

- 까아아아!

짐승들의 포효가 들린다. 저들은 평범한 짐승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압도하는 근력과 치악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들은 흑석마저 깨부술 정도로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이곳에 모인 짐승들은 모두 마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그런 놈들이.

알아서 물러가기 시작했다.

몇몇 놈들은 단상 위를 바라보며 침을 뚝뚝 흘려 댔지만, 결국 도망친다. 이무기의 이탈이 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세 명의 어르신들이 단상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강림한 존재가 부족원들을 구원한다는 예언이 있다.

그런데 대지를 깨부수고 튀어나온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언서에도 그런 내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협님!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은인, 와 주셨군요!”

두 아이는 이미 사내를 알고 있는 듯했다.

황극린이 단상 위에서 멀어지는 짐승들을 바라본다. 특히 이무기는 뇌탄을 맞았음에도 쌩쌩하게 움직이고 있다. 황극린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현무라는 놈은 뇌탄에 직격한 상태로 황극린과 싸움을 벌였다. 놈이 무엇을 먹었는진 모르겠지만, 마경의 입구가 열릴 때 놈은 무언가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변에 가득 깔린 독무(毒霧)를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뇌탄까지 먹어 버렸으니 힘이 소실된 상태로 황극린과 싸운 것이다.

거기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무기가 현무보다 강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황극린 또한 무언가에 약화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상 아래의 묘에서는 그걸 느끼지 못했지만, 막상 마경에서 숨을 들이마시게 되니 속이 답답해졌다. 보통 기(氣)라는 건 공간 자체에 깃들어 있기 마련이니까.

회계산과 바다의 마경과는 또 다르다.

‘혈마교주가 이곳에서 수련한다는 이유를 알 것 같군.’

마령이 말한 적이 있었다.

제약이 걸린 상태로 수련하다가 제약이 없는 바깥으로 나가면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체력 단련을 하는 무인들을 생각하면 간단한 이치다.

“당신은.”

“누군가?”

“말하시오!”

세 명의 노인.

황극린은 저들이 하종과 율명이 말한 어르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극린이오.”

당연히 황극린이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세상은 완벽히 외부와 단절되었으니까. 저들이 아는 문파라곤 혈마교뿐이었다.

* * *

“어르신들은 어떻게 하신답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불길하군요. 황랑이 다 잡은 인간을 앞에 두고 그를 노렸습니다. 그에겐 뭔가 있습니다.”

“단상을 부수고 나타났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게 말일세. 하종과 율명은 그 사내를 잘 알고 있는 듯하던데.”

부족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부분의 부족원들은 어찌 보면 소박하게 살아간다. 가끔 쳐들어오는 짐승들과 맞서 싸우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농사라고 해 보았자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수확하여 말리거나 요리하거나 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 있었던 일은 부족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저기! 사내가 어르신들의 방으로 간다!”

일단 격리된 황극린.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싸움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이 공간 자체에 깃든 기운에 적응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황극린이 어르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하종와 율명도 있었고, 두 사람의 아버지 둔저도 있다.

“앉으시오.”

어르신 중 중앙에 앉은 노인이 말한다.

“하나 묻겠소. 당신은 예언에 나온 구원자가 맞소?”

이리저리 둘러 가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다시 예언서를 탐독했으며 황극린이 예언서에 나온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예언에 따르면 분명히 하늘에서 강림한 존재에게 모든 짐승이 경배를 올린다고 말했다.

하나.

모든 짐승은 황극린을 노렸다. 기술 한 번을 펼쳐 이무기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싸움이 더 커졌으리라. 어르신들 또한 봉인된 힘을 개방했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건 꽤 위험한 발상이다. 균형을 이뤄 살아오던 마경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거기다 황극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니다.

“예언? 회생비록을 말하는 것이오?”

하지만 어르신들은 회생비록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서책의 표지에 회생비록이라 떡하니 쓰여 있지 않으면 그게 회생비록인지 알 길은 없었다. 특히 회생비록을 찾던 혈마교주가 그냥 둔 것을 보면…….

“한번 읽어 보겠소?”

“그러겠소.”

비교적 깨끗한 서책. 예언이 담겨 있으면 보통 낡아야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사본인 모양이다. 황극린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간다. 금방 다 읽었다. 황극린은 결론을 내렸다.

‘회생비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저주나 그에 상응하는 재능 따위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가 나타나 이 세상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이야기였다.

“난 서책에 나온 구원자 같은 게 아니오.”

“…….”

이미 그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막상 황극린이 저리 말하자 어르신들이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나도 하나 물어보지.”

“말하도록 하시오.”

“이곳의 영물들은 죽으면 내단을 남기지 않는 것이오?”

“내단?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기는 건 없소. 황랑늑대를 수백 마리나 죽였지만 이빨이나 발톱 그리고 가죽까지 남기는 게 없지. 그렇기에 그들과 싸우는 건 언제나 손해였소.”

“그렇군.”

아쉬움이 남는다.

이 마경은 대체 어떤 곳일까?

모든 짐승은 실체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인간들은 어떤가? 이들도 죽으면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설마.’

황극린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묘에서 빠져나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곳이 본래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서였다. 바깥과 분리된 세상.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순환하는 세상이다.

‘이 마경 자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든 건가?’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다. 마경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동떨어진다. 거기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황극린이 회계산의 마경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중심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뇌정 폭풍을 없애거나 하진 못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의 축.

상시 천재지변이 들끓는 막대한 기가 집약된 공간이었다.

“이상하군. 왜 바깥으로 나가지 않소?”

“불가능하오.”

“우리는.”

두 어르신이 대답했다.

“우리는? 하종과 율명이 특별하다는 말이오?”

“그렇소.”

“두 아이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

“아아, 마경의 기운을 품게 되는 순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럴듯하군.”

황극린이 단번에 정곡을 찔렀다.

이미 세 번의 마경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그는 그만의 지식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온다. 유득유실(有得有失).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

“당신들은 내 생각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군. 어쩌면 이무기 따위는 그냥 몰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소?”

위험하다.

고작 몇 마디의 대화. 어르신들은 황극린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이 정보를 얻어 내려 했다. 그런데 황극린이 부족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혈황마제와 적이라고 했소?”

하종과 율명에게 들은 모양이다.

“친우는 아니오.”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소?”

“두 아이를 데려다준 것일 뿐이오.”

“단상 아래에서 뭘 발견했소?”

황극린은 운철 단검을 숨기거나 하지 않았다.

“이걸 발견했소.”

“귀물이로군.”

“귀물?”

운철을 신물도 아니고 귀물이라 칭하는 건 처음 보았다. 이곳에선 그리 소중한 물건은 아닌 건가?

“운철은 우리 생명을 갉아먹는대요! 그래서…….”

“조용.”

“아앗… 넵.”

율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엔 아직 짐승들이 가득하오.”

“알고 있소.”

“내가 보기엔 당신을 노리는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어르신의 의심은 타당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우리는 오래도록 평화를 유지했소. 짐승들도 우리와 싸우기보단 저들끼리 세력 다툼을 했고, 우리는 번영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의 마을을 유지해 왔소. 하나, 당신이 들어온 순간부터 균형은 깨어졌소.”

어르신들은 이미 황극린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결론을 내렸다.

사내가 하종과 율명을 구해 줬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예언서도 보여 주고,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 거다.

“떠나 주시오.”

“어르신들!”

“저분은 제 은인이에요!”

하종과 율명이 소리쳤지만, 어르신들의 눈짓에 둔저가 끌고 나간다. 둔저가 가장 가까이서 보았다. 황랑이 황극린을 향해 보이던 그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말이다. 그가 이곳이 머문다면 짐승들은 계속 몰려올 것이다.

이무기, 백탄, 이두백호뿐 아니라.

이 공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짐승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까지 황극린의 존재가 들킨다면? 장로들이 그걸 사용하더라도…….

“예언에 없는 존재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소.”

황극린은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저들의 상황도 이해가 된다. 듣자 하니 그런 대규모의 습격은 처음 있는 일이라 했던가? 작정하고 돌격했다면, 부족원들이 모두 죽었을 거다. 황극린도 그들을 모두 지켜 줄 자신은 없다.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 죽일 자신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겠소.”

“…….”

뭔가 가슴이 답답하다.

황극린이 여기서 떠나기 싫다고 해야 정상이 아닌가? 자신은 하종과 율명을 구해 줬는데 왜 축객령을 내리냐고 따져야 하는 게 아닌가? 오히려 너무 덤덤하게 그러겠다고 하니 묘하게 불길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소.”

“…말하시오.”

“마경의 중심에는 뭐가 있는지 아시오?”

그 말에 어르신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중심부라는 게 중요하긴 할까? 그곳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짐승이 살고 있을 게 뻔했다.

* * *

“진짜 간 건가?”

부족원들이 술렁였다. 하종과 율명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뭐, 부족원들 대다수는 잘 떠났다고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 덕분에 이무기가 물러났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건 그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짐승들이 마을로 집결한 이유는 어쩌면 그 사내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거짓말처럼 부족엔 평화가 찾아왔다.

그 무렵.

마을의 초입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부족원들이 있었다.

“주변 짐승들의 수가 줄어든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뭐지?”

그들은 황극린이 마경을 빠져나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황랑늑대처럼 한 개체마다 강력한 짐승들뿐 아니라 인간을 요리조리 공격하는 쥐나 살쾡이 같은 작은 녀석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정말 평화롭군.”

“그러게 말일세. 역시 어르신들의 선택이 옳았구나.”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안락한 평화가 다가오는 듯했다.

* * *

황극린은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마경의 중심부가 아니다. 처음엔 마경의 중심부로 향해 대체 어떤 놈이 있을까 확인할까도 생각했다. 마구잡이로 덤벼 오는 짐승들을 해치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내 그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전음석.

마경에 있음에도 그건 반응했다. 더 격하게 말이다. 전음석에 글이 새겨질 때, 전음석은 마치 부서질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글이 다 새겨진 순간 부서지고 말았다. 운철은 마경에서 귀물이라 통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마경의 기운과 상반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황극린은 부서진 전음석을 대충 챙겨 마경을 빠져나왔다.

전음석으로 전달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 무림맹주와 황제가 죽음. 범인은 흑살문주와 북해빙궁주로 추정.

황극린이 있던 미래에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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